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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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은 1977년 5월 4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를 끝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그 공연을 마친 뒤 그는 밤새 술을 마시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원곡이 따로 있었다. 그 곡이 여러 가수들을 거쳐 조용필의 몸을 통하여 세상의 노래가 되었고, 그 이후로도 조용필이 이 노래를 여러 번 녹음함으로써 불멸성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복기해보자.

원곡은 1970년 가수 김성술(예명 김해일)이 발표한 ‘돌아와요 충무항에’다. 유니버설레코드사가 1970년 12월 16일에 발매한 옴니버스 앨범에 김성술은 김해일이라는 예명으로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비롯, 4곡을 수록했다. 김국환, 이장용, 남미성 등의 노래도 함께 수록된 앨범이다. 안타깝게도 김성술은 이 노래를 발표한 뒤 군에 입대하였고, 앨범 발매 후 1년쯤 지난 1971년 12월 24일에 휴가를 나왔다가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작사·작곡가로 활동하는 황선우가 원곡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고치게 되고, 이미자·조미미·김석일 등이 불렀으며, 조용필도 1972년에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에 수록하게 된다.

조용필 1972년 앨범

조용필 1972년 앨범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른 사연
2004년 김성술의 어머니가 황선우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냈고, 2006년에 재판부는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되 “‘돌아와요 충무항에’가 이별한 연인을 그리는 내용이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형제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창작성이 더해졌고, 가수 김씨가 음반 발표 후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점을 참작해 3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저작권 관련이 일단락되었는데, 나의 관심사는 일차 해결된 그 사안이 아니라 1972년에서 1980년에 이르는 조용필의 노래, 즉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어떻게 몇 차례나 앨범마다 힘겹게 변이되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가사를 보자.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원곡, 그러니까 김성술의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동백섬이 아니라 미륵섬이고 부산항이 아니라 충무항이며 오륙도가 아니라 세병권이다. 충무, 그러니까 오늘의 지명으로 통영에 있는 지형지물들이다. 곡의 기본적인 전개는 1970년대의 전형적인 트로트다. 해방 이후 크게 변화·발전이 없는 기본적인 연주방식, 기타와 색소폰이 이끄는 전주를 따라 상당한 저음이 미륵산 아래 충무항의 실연을 노래한다.

이 노래를 1972년에 조용필이 부르게 된다. 조용필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의 염전업을 하는 넉넉한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호방한 아버지와 그런 기질을 닮은 형들에 비해 막내 조용필은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는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이를 자주 혼냈고 음악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따라서 조용필은 훗날의 조용필이 되기 위하여 고교 3학년 때 가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8군 무대나 여러 밤의 공연들을 거침없이 소화한 기타리스트였지만, 무명 생활은 꽤나 길었다. 1960년대 전 세계를 휩쓴 록에 열광하여 밴드에서 기타를 쳤으나 어느 날 보컬을 맡은 사람이 입대를 하는 바람에 노래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2년 앨범에서 조용필은 ‘부산항’으로 주소지가 바뀐 이 노래를 전형적인 남성 트로트의 전개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부른다. 이때 앨범의 노래 제목은 ‘돌아와요 해운대에’였는데, 2절의 가사를 보면 ‘해 저문 해운대에 달은 떴는데’로 진행한다. 조용필은 이남이 등과 일시적으로 팀을 이뤘던 밴드 ‘김트리오’로 이 곡을 불렀고, 앨범을 낼 때는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이 됐다. 곡 전체를 어쿠스틱 기타 두 대가 이끄는데, 젊은 날 조용필의 애틋한 미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조용필이 아니고 그 당시 레코딩 산업의 시장 흐름에 따라 ‘스테레오 힛트’ 앨범을 내야만 했던 목소리다. 1절의 ‘갈매기만 슬피 우네’에서 조용필은 나훈아·남진 같은 사람의 ‘꺾는 목소리’를 절묘한 기교로 들려주는데, 본인의 꺾는 소리는 아직 아니다. 그럼에도 후렴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라고 부를 때,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그곳을 떠난 사람이라면 당장 돌아가고 싶을 만큼 애절하다. 이 곡이 장안의 ‘힛쏭’이 된 것은 1976년의 첫 독집 앨범 때 일이다. ‘너무 짧아요’, ‘정’, ‘돌아오지 않는 강’이 수록된 이 앨범에서 단연 히트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조용필은 어느 인터뷰에서 “당시까지는 나름 로커로 자부하고 있었는데, 트로트 한 곡으로 졸지에 스타가 되었다”고 했다.

조용필 1976 앨범

조용필 1976 앨범

미성을 깎아 탁성으로 만든 그의 목소리
1972년에 처음 녹음할 때는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에 특유의 미성을 실어 보냈는데, 이 앨범의 시작은 1970년대 중반을 강타했던 ‘트로트 고고’ 스타일이다. 전자 기타와 오르간, 그리고 드럼 비트. 그런데 여기에 전자 바이얼린이 등장한다. 안정된 연주와 애절한 전자 바이얼린, 그리고 조용필의 여지없이 탄탄한 목소리다. 그리고 1980년의 앨범 <창밖의 여자>에서 조용필은 이 곡을 한 번 더 녹음한다. 이 앨범의 전체 곡들, 그러니까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한오백년’, ‘너무 짧아요’,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등은 이 글을 읽고 있을 모든 독자들에게 당장 환청처럼 들려올 것이다. 세련되고 원숙하게 부르던 1970년대의 조용필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발성을 다 소화해낼 수 있는 목소리의 조용필 말이다. 위의 곡은 물론이고 함께 수록된 ‘대전블루스’나 ‘한오백년’도 환청인 듯 되새겨보라. 그의 목소리는 때로 그 작은 몸에서 곱게 배어나오기도 하고, 거칠게 뿜어져 나오기도 하며, 더없이 고운 성악 같기도 하고, 밤새 눈물짓다가 그 눈물 다 말라서 겨우 내뱉는 한숨 같기도 하다. 그 사이에 조용필은 인생 최악의 시련과 모욕을 당했다. 1975년 겨울, 조용필은 남산으로 끌려갔다. 긴급조치 시대, 대중문화를 일차 타격하여 온 국민을 얼어붙게 만든 강력한 문화 통치의 시대에 조용필, 이장희, 한대수 등 수많은 가수들이 일벌백계의 시범 케이스로 혹독한 고문과 모욕을 당했다. 조용필은 어느 인터뷰에서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벽틈 사이에 밀어넣고는 무시무시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찔러댔다”고 말한 적 있다. “거기엔 인간이 없었다. 그렇게 당한 많은 음악인들이 좌절했고 이 땅을 떠난 음악가도 많다”고 그는 비통하게 회고했다. 결국 조용필은 1977년 5월 4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를 끝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그 공연을 마친 뒤 그는 밤새 술을 마시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얻게 된 공백들, 긴 시간들, 허망한 세월들 앞에서 조용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발성을 다 연습하게 된다. 누가 어떤 악보를 내밀어도 순식간에 그 악보가 요구하는 창법으로 거침없이 부를 수 있는 경지 말이다.

그리하여 발표된 1980년의 정규 앨범 1집, 그 안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다시 수록된다. 다시, 들어보자.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 ‘한오백년’과 ‘너무 짧아요’. 도저히 한 사람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는 현묘한 경지의 목소리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다시 부른다. 항구의 파도소리, 기적소리, 갈매기 소리가 잠깐 들린 후 우리 모두가 반세기 가까이 들어온 노래가 시작한다. 미성을 깎아 탁성으로 만들고 록의 창법에 판소리를 더한 목소리, ‘형제 떠난 부산항에~’라고 할 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린다. 성대의 기교가 아니라 온몸이 흔들리는 소리다. ‘오륙도 돌아가는~’이라고 할 때, 그 오륙도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갈 수 없는 어떤 곳인 듯하다. 틀림없이 해맑은 목소리인데 거친 한숨이 동시에 들리는 애절하고 기이한 목소리, 특히 2절을, 그 중에서도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를 꼭 다시 들어보라. 거기에 조용필이 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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