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이 시대 노동·인권·사법의 바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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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 69만1136명이면 울산시 88만6000여명보다 적지만 제주도 45만1000여명보다 많다. 이 정도 유권자가 선출한 대표의 수적 영향력은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장 이상이다. 나이가 되면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보통 투표권과 달리, 회원으로 가입하고 회비를 납부하는 이익단체의 대표는 더욱 단결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다. 그는 한국노총과 함께 합법적인 대한민국 양대 노동조합 중 한 축의 대표다.

하지만 그는 7월 4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3중2 120’이라는 수인번호를 단 누런 색 죄수복을 입고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법정에 들어서자 방청석에서 박수와 함께 “힘내세요” “승리하십시오” “파이팅” 소리가 연발로 터져나왔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오른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는 방청석을 둘러보며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판장 심담 부장판사(함철환·박가람 배석판사)가 양형이유를 길게 낭독하는 것을 들으며 가벼운 웃음까지 띠어 보였다. 오히려 옆에 앉은 변호사들이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대비됐다.

“동지들이 무죄라 생각하면 무죄”
심 재판장은 “피고인 일어서라”고 말했다. 그가 일어섰다. 심 재판장은 “징역 5년에 벌금…(방청석에서 ‘우~’ ‘뭐냐’는 야유소리가 터져나왔다) 7일 안에 항고할 수 있으며….” 심 재판장의 선고는 방청객의 항의와 야유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심 재판장은 황급히 법정을 빠져 나가고 사전에 계획된 듯 피고인석 주변을 경위들이 에워쌌다. 그는 경위들이 붙잡은 오른손을 겨우 빼내 치켜들면서 “투쟁” 한마디를 외쳤다. 경위들은 손으로 그의 입까지 막으려 했다. 그는 더 이상 꼼짝 못하고 경위에게 끌려 나갔다.

이튿날 한상균 위원장은 면회자를 통해 “동지들이 무죄라 생각하시면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독재정부 때보다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탄압은 더 가혹하고 교묘합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태세가 필요합니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그러나 이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메시지가 아닌 부인을 면회한 자리에서는 “군대에 간 아들 제대하기 전 면회를 갈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5월 군에 간 아들이 군복을 입은 자랑스런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평범한 아버지였다. 군에 간 아들을 면회하고픈 그의 개인적 기대는 징역 5년이라는 중형으로 이뤄질 수 없게 됐다.

/ 김정근 기자

/ 김정근 기자

그는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주도해 경찰을 다치게 했다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구속돼 검찰 구형 8년·법원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같은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복역한 전과가 있다. 이번에 중형이 선고된 배경에는 누범기간 중에 같은 범죄를 저지른 점도 포함됐다.

그의 중형 선고에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민중연합당, 녹색당 등 야당은 일제히 “사법부가 인권과 민주를 지켜주지 못한 판결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이라는 비난 성명을 냈다. 국제적 비난도 쇄도했다. 그의 중형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인권연맹(FIDH)과 세계고문방지기구(OMCT) 등 인권단체와 국제노총(ITUC), 유럽노조총연맹(ETUC) 등 노동단체는 공식성명을 냈다. 이들은 “계속되는 노조 집행부에 대한 탄압과 위협, 가혹한 처벌을 비판한다”고 주장했다. 국제앰네스티도 “그에 대한 유죄판결은 부당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심지어 제32차 유엔인권이사회는 지난 6월 17일 발표한 한국 조사보고서에서 한상균 위원장을 직접 거명하며 “다른 사람의 불법행위에 의해 야기된 손해에 집회 주최자가 책임지도록 하는 것은 과도하고 불합리하다”면서 “한국 법은 여러 영역에서 국제인권법 기준과 배치되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존중, 보호, 촉진해야 할 의무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전 세계 86개 노동조합과 산별노조는 한국 대통령에게 석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한국 대사관·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국제인권단체와 국제기구에서 대한민국 한 개인에게 이렇게 관심을 나타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대표적 양심수에게 보였던 ‘국제적 예우’였다. 사실 경찰이 그에게 적용했던 ‘소요죄’는 권위주의 정권의 절정기인 1986년 이후 처음이다. 소요죄는 비록 검찰 기소단계에선 빠졌지만 검찰은 징역 8년을 구형했다. 집회 주최자에게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한 것은 전두환 시절 사법부뿐이다.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 대표(경남대 명예교수)는 “과거 권영길·단병호 등 노동운동가들에게 집행유예 정도 선고했는데, 이 정부 들어 유독 실형을, 그것도 중형을 선고한다”고 말했다. 현재 60명 정도의 노동자가 투옥돼 있다. 결국 한상균은 30년 전으로 되돌아 간 2016년의 기본권·노동·인권·사법의 바로미터임을 의미한다.

쌍용차 노조위원장에 ‘3전4기’ 당선
한상균은 196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는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1975년 대통령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100만 기능인 양성계획’을 발표하고, 전국에 19개 시범 공업고등학교를 지정했다. 그 중 하나가 한상균이 진학한 전남기계공고(현 광주공업고등학교)다. 장학금을 주고, 100% 취업을 보장하는 이곳에 공부 잘하고 가난한 어린 인재들이 몰렸다. 그러고 보면 한상균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키운 ‘인재’였던 셈이다.

전남기계공고를 졸업한 한상균은 지프 생산업체인 거화에 입사했다. 이 회사의 전신은 신진자동차로 이후 동아자동차를 거쳐 1986년 쌍용그룹에 인수되면서 쌍용자동차로 바뀌었다. 그는 쌍용자동차에서 주어진 일만 하는 평범한 노동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 노조 설립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위원장이 되지 못했다.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단체들이 7월 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중형 선고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원희복 선임기자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단체들이 7월 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중형 선고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원희복 선임기자

그는 무려 세 번이나 위원장 선거에 떨어지고 2008년 11월 네 번 만에 당선됐다. 쌍용차 노조 고동민 사무국장은 “공장에서 가장 힘든 곳이 직접 조립하는 생산라인”이라며 “노조위원장에 나설 정도라면 지원부서와 같은 상대적으로 편한 자리를 회사에서 제안했을 텐데 한상균 위원장은 20년 동안 한 번도 생산라인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세 번의 낙선에도 힘든 현장을 지키며 노조위원장을 꿈꿨다는 것은 집념과 의지가 매우 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고동민 사무국장도 “네 번째 도전 때도 당선은 어렵다고 봤는데, 하루 2~3시간만 자면서 새벽까지 생산라인을 돌며 조합원을 설득했다”면서 “결국 구조조정을 우려한 노조원의 바닥민심을 움직여 1·2차 투표에서 모두 1등으로 당선됐다”고 말했다.

노조위원장에 당선된 직후인 2009년 1월 회사는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그 해 4월 2646명의 노동자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구조조정 철회를 요구하며 5월 21일부터 77일간 평택공장 점거 파업을 주도했다. 물과 음식이 끊긴 가운데 무자비한 경찰특공대와 용역에 대항했던 쌍용차 농성은 당시 TV로 생중계됐다. 그는 농성이 끝난 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2012년 8월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그는 석 달 만인 11월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송전탑에 올라 171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흔히 ‘쌍차사태’로 불리는 쌍용차 노동투쟁은 점거·고공·해외 원정 농성 등 투쟁의 다양성은 물론, 종교계의 지지를 끌어내고 국회의원 출마를 통한 정치투쟁도 이뤄졌다. 그래서 ‘쌍차사태’는 노동투쟁의 종합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 ‘쌍차사태’를 주도하면서 노동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2014년 12월 사상 처음 직접 선거로 치러진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그의 ‘신화’가 재연됐다. 그는 정부의 노동법 개정에 총파업으로 맞서자는 ‘박근혜에 맞선 노동자 살리기 총파업’을 공약으로 당선됐다. 노동계의 한 분석가는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한상균의 현장파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면서 “그는 선명성과 20년간 민주노총을 장악했던 중앙·국민파에 대한 세대교체 분위기로 당선됐다”고 풀이했다.

민주노총에는 3개 계파가 존재한다. 단병호가 이끌던 중앙파와 이수호의 온건 노선의 국민파, 그리고 이갑용을 위시한 강성 현장파다. 정치적으로 중앙파는 정의당, 국민파는 더민주, 현장파는 해산된 통합진보당과 가깝다. 간선제 시절 위원장은 보통 이 세 계파의 합종연횡으로 선출했고, 직선에서 다수인 중앙파와 국민파에서 당선자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달랐던 것이다.

선명성으로 민주노총 위원장에 올라
민주노총 위원장이 된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은 2015년 4월 세월호 1주기 희생자 추모집회 때 집시법과 교통방해죄로 기소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4월 24일 공약대로 10만 총파업을 주도했다. 파업 반대파조차 “뻥파업인 줄 알았는데 공약을 지켰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노동계의 한 분석가는 “민주노총 파업은 규모도 크고 국민경제에 미치는 등 파급도 커 집회만 열고 실제 파업에 돌입하지 않는 보통 ‘뻥파업’이 일반적”이라며 “상대적으로 과격하다는 현장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상균 위원장은 달랐다”고 말했다.

쌍차사태를 통해 그는 강성 이미지가 심어졌다. 보수언론인 류근일씨는 그를 1920년대 중국공산당 내 급진파인 이립삼에 비교해 ‘맹동주의자’ ‘극렬주의자’ 등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게다가 보통 ‘뻥파업’이 아니라 공약을 지키는 파업 돌입은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는 노조가 진보정당의 뿌리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구노회) 대표는 “지난 총선 직전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는 진보연합정당 창당을 추진했다”면서 “민주진영 다수가 그의 계획을 지지했지만 일부 계파의 정략적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지난 총선에서 진보정치 세력이 크게 약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상균의 활동반경이 노동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넘보는 상황을 정권이 그냥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며 1급 수배자였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신문사에 경찰력을 투입하고, 나중에 조계사에까지 경찰력을 투입하려고 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한상균은 지난해 12월 10일 조계사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경찰에 잡혔다.

그는 지난 6월 13일 법정 최후진술에서 “저는 살인범도 파렴치범도, 강도범죄나 폭동을 일으킨 사람도 아닌 해고노동자”라며 “저는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개악을 막겠다며 투쟁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1급 수배자 한상균의 실질적인 죄명”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에게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렇다고 한상균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집념에 비추어 그렇다. 실제 그는 지금도 여전히 민주노총을 지도하고 있다. 변호인을 비롯한 민노총 지도부가 거의 매일 면회를 해 그의 메시지를 받아 오고 있다. 그는 옥중에서 7월 20일 20만 민중총궐기 대회와 7월 22일 금속노조 15만 총파업을 지도하고 있다. 산별노조 위원장은 물론 단위 사업장까지 무려 1000곳이 넘는 곳에 총파업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를 자주 면회한 조영건 구노회 대표는 “그는 결의로 일을 치러내는 특유한 인간형이고, 자신을 던지는 희생형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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