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렁이’ 백기완 “분단을 이용하는 자 민족·인륜반역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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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 최루탄 가스를 가장 오래 마신 사람, 가택연금을 제일 자주 당한 사람(최장기 연금자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이 두 개의 세계기록은 여든다섯 백기완이 ‘시위현장’과 함께하며 쌓은 ‘관록’이다. 시위현장은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마지막 절규의 장이며, 억울함에 짓눌린 민중의 마지막 하소연 장소다. 그가 보유한 이 세계기록은 바로 민중과 함께했다는 것을 웅변한다.

그는 이 시대 억울한 민중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을 건립하는 데 조그만 힘을 보탠다. 그와 비슷한 ‘거리의 신부’라는 별명을 가진 문정현 신부와 함께다. 두 사람은 7월 5일부터 17일까지 종로 류가현에서 붓글씨·서각전을 연다. 그는 “붓글씨를 써본 적이 없어 거절했지만 한사코 요청해 어쩔 수 없이 응했다”고 계면쩍어했다.

사실 세계기록을 두 개나 가지고 대통령에 두 번이나 출마했던 그에게 탐구할 새로운 뭐가 있나 싶다. 그냥 안부나 묻고, 세상 얘기나 듣자고 만났다. 혹 지금까지 인간 백기완과 다른 모습을 발견하면 기자로서 ‘횡재’라 생각했다. 그의 전형적 모습은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뜨거운 분노로 권력을 질타하는 것이다. 기자는 첫 질문으로 “이제 나이도 여든이 훨씬 넘었으니, 좀 부드러워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나이가 들어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썩는다는 얘기요.(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잘못됐으면 질타를 해야지. 같이 놀던 친구들이 ‘야 백기완, 넌 아직도 그러냐’ 그러면 내가 ‘그때보다 더 나빠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응수한다.”

그에게 새로운 면모를 탐구하려던 기자의 기대는 초반부터 여지없이 무너졌다. 기자는 재빨리 ‘얼굴 혈색도 좋아 보이신다’며 부드러운 화제로 돌렸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나는 건강은 따로 없고, 죽기 아니면 살기야. 어떡하다 이런 박근혜 같은 독재자 지배를 받게 됐는지 말이야. 휴~”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화제를 돌려도 역시 마찬가지다.

/ 이상훈 선임기자

/ 이상훈 선임기자

백 선생은 1년 전 다리를 다쳤다. 지금은 거의 나았지만 아직 앉았다 일어설 때 불편하다고 한다. 그를 잘 아는 의사가 “또 한 번 뼈를 다치면 회복하기 어렵다”며 책상과 의자를 놓아줬다. 비록 몸은 늙지만 그의 말과 글, 즉 정신은 더욱 예리해지는 느낌이다. 그는 최근 한국작가회의가 발행하는 잡지(<내일을 여는 작가> 2016년 상반기)에 ‘아 짓밟힐수록 불꽃이 이는 불씨 서돌이여’라는 ‘비나리’ 한 편을 썼다.

“내가 시를 쓰는 정서가 있어. 비나리라고 하지. 글을 아는 사람들이 쓰는 것은 시(詩)이고, 글을 모르는 사람이 웅얼대는 것을 비나리라고 그래. 시는 대부분 달, 꽃과 나비, 인생을 읊조리는 넋두리야. 그런데 글을 모르는, 가진 게 알통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진짜 시는 ‘달구질’과 ‘을러대기’야. 달구질은 기죽지 말라고 다짐하는 것이고, 을러대기는 싸우라고 닦달하는 것이야. 이 두 개를 뼈대로 쓰는 것이 나의 비나리야.”

최근 그가 발표한 비나리(시) 중에 ‘비지땀은 시퍼런 칼’ ‘피눈물은 날선 도끼가 되어 대들보, 밑돌까지 찍어버리라’는 대목이 있다. 섬뜩한 선동이다. 그는 “그 구절을 섬뜩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 고생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런 말이 안 나올 수 없어”라며 “내 정서는 짓밟히는 사람들의 피눈물로 적은 것”이라고 일축했다. 백 선생은 순수한 우리말(그는 이를 ‘무지렁이’, 즉 민중이 쓰는 말이라고 한다)을 찾아 쓰는 대표적 인물이다.

“황해도 구월산 밑에 살던 열세 살 촌놈이 서울 내려왔는데, 애들이 ‘VICTORY’라고 하는 거야. 내가 ‘빅토리를 우리말로 쓰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촌놈이라고 때리더군. 20대 초반 강원도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80대 노인에게 ‘뭘 보시냐’고 물으니 ‘몰개를 본다’는 거야. 몰개? 파도라는 순우리말이야. 나는 이때부터 순우리말을 일반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썩는다는 얘기”
그는 지식인들은 한문이나 영어로 사고하는데, 이는 지배층의 사고방식라고 강조했다. 신문도 새로 떴다는 의미의 ‘새뜸’, ‘파이팅’도 아리랑의 ‘아리아리’가 우리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말을 살리자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말을 살리자는 것”이라며 “이건 인류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도 그의 ‘무지렁이’, 즉 민중사상이 배어 있는 것이다.

민중이라는 단어 얘기가 나왔으니, 최근 ‘민중’이라는 단어 자체를 불온시한다. 불과 10년 전에도 흔히 썼던 말인데, 요즘은 정당 해산의 사유가 되기도 한다.
“간단한 거야. 왜정시대 왜놈 앞잡이 했고, 미군정 시대에 미군정 앞잡이 하고, 군사독재 앞잡이 하며 돈 번 사람들 있잖아, 그 돈을 지키는 방법으로 일체의 저항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부셔’로 보는 거야. 적(敵)을 ‘부셔’라고 그래. 민중을 적으로 보는 거지. 이걸 부숴야 한다니까.”

백기완 선생은 1932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황해 일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 여덟 식구 중 아버지와 형, 자신과 여동생 등 다섯은 남으로, 어머니와 누님, 할머니 등 세 식구는 북에 남았다. 곧이어 터진 6·25전쟁에 그와 형은 군대에 갔다. 그는 남한의 아버지 편에서 북한의 어머니 편을 상대로 싸웠다. 말도 안 되는 이 전쟁에서 그의 형님이 죽었다.

“6·25 때 1950년 9월 한강 백사장을 가는데, 모래 위에 시커먼 뭐가 불쑥 나와 있는 거야. 보니까 불에 탄 사람의 손이야. 이게 하늘을 할퀴고 있어. 모래와 낙엽으로 덮어주고 돌아올 때 보니까 그 손이 다시 나와 있는 거야. 나는 ‘폭격으로 불에 타 죽은 저 원통한 생명이 잘못된 인류를 할퀴고 있는 저것이야 말로 진정한 조각품’이라고 생각했지.”

그는 이때부터 생명운동을 하겠다며 농촌으로 가 산림녹화·농촌계몽 운동을 했다. 1960년대 초 고향 선배인 함석헌·장준하·계훈제 선생들과 어울리며 ‘재야’라는 말을 처음 붙였다. 자연스레 이들 선배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함석헌·장준하·계훈제 이런 늑다구리가 나에게 ‘젊은이들은 한일협정 어떻게 보느냐’고 묻기에 나는 ‘반대가 아니라 분쇄해야 한다’고 말했지. 그 이유를 세 개 말했어. 하나는 일본과 미국의 독점자본주의로 분단이 장기화되고, 두 번째는 박정희가 일본자본으로 민중을 수탈할 것이며, 세 번째로 일본 정신대 문제를 제기하며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정조까지 짓밟았다고. 그런 일본이 제국주의 해체도 안 하고 이 땅에 다시 온다고? 도저히 안 된다. 이 말을 듣던 함석헌·장준하·계훈제 선생 다 울었어.”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그는 평생 반독재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의 길을 걷게 했다. 권력은 그를 긴급조치·계엄법 위반 등으로 몇 번이나 투옥했지만 그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백기완 선생은 ‘이산가족’이라는 말 대신 ‘눈물의 가족’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백기완 선생은 ‘이산가족’이라는 말 대신 ‘눈물의 가족’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한복 입고, 시위현장에 매일 나가는 거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시위현장엔 민중의 아우성이 있어. 그저께 세월호 잠수사(김관홍씨) 상가에 갔다가 조의금 봉투에 ‘위대한 생애 우리들이 빛내겠습니다’라고 썼어. 나이 80이 넘은 할아버지가 젊은이가 죽었는데 ‘내가 빛내겠다’고 했어. ‘영면하라’ 그 따위 말 난 안 해. 며칠 전 민주민족열사 합동추도식이 있었는데, 안 한다는데 굳이 한마디 하라고 해 추도사 한마디 했지. …원형이 나에게 각서를 하나 써.”

백 선생은 갑자기 기자를 원형이라고 부르더니, 각서를 쓰란다. 자신이 지금 한 말을 꼭 기사에 쓰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날 자신이 한 추도사를 취재한 많은 기자 중 그 누구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자는 ‘약속한다’고 확답을 줬다. 그는 “이건 꼭 적어야 한다”며 또박또박 말했다.

“어떡하다 독재자 지배를 받게 됐는지”
“박근혜 독재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이 땅에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 독재가 이어졌지만 이 네 명의 나쁜 점을 다 합해도 박근혜 독재를 못 당하는 끔찍한 독재다. 두 번째는 친일파 반역의 역사를 정당한 역사로 보는 소름이 끼치는 독재이고, 세 번째는 독점자본을 강화시키면서 민주주의라고 우기는 지긋지긋한 독재다. 끔찍하고 소름끼치고, 지긋지긋한 독재다. 우리는 추도만 할 게 아니라 청산작업을 해야 한다.”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질타 대상이다. 그가 고개를 숙일 만큼 존경심을 표하고 싶은 인물이나 존재는 없어 보였다. 혹 그래도 기억에 남는 누가 있나 물었다. 이에 백 선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백범 할아버지가 기억에 남아. 아버지 따라 경교장에 갔는데, 백범 할아버지가 나를 무릎에 앉히더니 ‘네가 황해도 백씨 어른의 손자냐. 똑똑하게 생겼는데 왜 이리 초라하냐’라며 ‘기완아, 통일이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싸움이 아니다. 통일이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던 양심이 하나가 되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며 우시더라. 난 그때 이 말의 뜻을 몰랐어, 단지 배가 고프니 국밥이나 한 그릇 사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는 백범 얘기를 하면서 차분해졌다. 실향민인 그에게 통일은 남다른 감회일 것이다. 그는 2000년 북한을 방문했다. 고향에 가려 했지만, 북측에서 길이 험하다고 만류해 못 갔다. 대신 55년 만에 헤어진 누나를 만났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들었다.

“내 동생 인순이가 남으로 내려올 때 아홉 살이었어. 엄마(그는 분명 엄마라고 말했다)는 아홉 살 먹은 막내를 남쪽으로 보내고 50년 넘게 못 만났으니 얼마나 그리웠겠어. 엄마가 돌아가실 때 계속 우시더래. 숨이 끊어졌는데도 맥도 안 뛰고 몸도 하얘졌는데도… 자율신경 때문인지 계속 우시더래. 우리 누나 딱 하루 만났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한마디 하다 울고, 또 울고. 그냥 울다 왔어. 이산가족이라는 말 쓰지마, 눈물의 가족이야. 이산가족이라는 말 쓰는 신문사 불 질러 버릴 거야.”

그는 격한 말을 하며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최고 권력에도, 최대 자본에도 당당했던 ‘철혈남아 백기완’도 엄마에겐 약해지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는 통일을 “눈물과 땀이 맑은 물이 돼 썩어 문드러진 분단의 부패를 자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기자가 ‘요즘 이 눈물의 가족(이산가족·탈북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작태가 벌어졌다. 유우성씨 간첩조작사건처럼 오빠를 간첩이라고 거짓 증언하게 하고, 탈북자들의 변호사 접견을 막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질문했다.

(그는 이 질문에 맥이 탁 풀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분단문제를 권력 유지에 이용하는 놈들은 민족반역자라구, 친일파만 민족반역자가 아니야. 이건 인류(인륜) 반역자야. 휴~(다시 긴 한숨) 그 얘긴 그만하자”며 말문을 닫는다. 이미 권력에 대한 최고조 비난을 다 쏟아냈는데, 더 잔인한 질문이 나오자 더 이상의 대답거리를 찾다 숨이 막힐 뻔했으리라.

백 선생은 살아 생전 마지막으로 ‘민중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자료집을 만들고,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민중·통일운동가, 정치인, 작가 등에서 본인은 뭐라 불러주길 원하나”라고 물었다.

이에 그는 “나는 그저 무지렁이 하나로만 평가 받았으면 좋겠어”라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라고 자신이 쓴 ‘묏비나리’(원래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로, 나중에 <님을 위한 행진곡>의 원전이 됐다) 한 구절을 읊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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