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애절한 사연들이 깃든 서호 ‘연인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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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과 궂은 날, 새벽과 저녁, 봄·여름·가을·겨울, 시시각각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닌 서호에는 슬프고 비장한 전설과 역사가 가득하다. 그 비장함에서 나온 힘일까? 서호를 품고 있는 항저우는 오늘날 빛을 발하고 있다.

서호에는 정인교(情人橋), 즉 ‘연인의 다리’로 불리는 3개의 다리가 있다. 단교·장교·서령교다. 이들 다리는 어떤 연인의 사연을 담고 있을까?

한 쌍의 나비와 한 쌍의 연꽃이 된 연인들
서호 동북쪽에 있는 단교(斷橋)는 그 이름만 보면 끊겨진 다리일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명나라 전여성(田汝成)의 <서호유람지(西湖遊覽志)>에 따르면, 고산(孤山)에서 시작된 백제(白堤)가 이곳에 이르러 끊기기 때문에 ‘단교’라 이름했다고 한다. 단교는 서호십경의 하나인 단교잔설(斷橋殘雪)로도 유명하다. 아치형 다리에 눈이 내리면 다리 가운데 부분의 눈이 먼저 녹아, 멀리서 보면 마치 다리가 끊어진 듯 보인다는 데서 ‘단교’라고 이름했다는 설도 있다. ‘백사전’ 전설의 백낭자와 허선이 만난 장소가 바로 단교다. 이후 법해 때문에 둘은 헤어지게 되고, 슬픔에 빠진 백낭자는 이렇게 토로한다. “단교는 끊어지지 않지만, 내 애간장이 끊어지는구나.” 단교, 만남의 기쁨보다는 헤어짐의 고통이 짙게 밴 이름인 듯하다.

악비 사당에 모셔진 악비의 상

악비 사당에 모셔진 악비의 상

단교가 끊어진 다리가 아니듯 장교(長橋) 역시 결코 긴 다리가 아니다. 서호 동남쪽 장교공원 안에 있는 장교의 길이는 9m에 불과하다. 장교에는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사연이 담겨 있다. 동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야기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발원지에 관한 견해도 분분하다. 둘이 함께 공부했다는 서원, 함께 묻혔다는 무덤이 허난·산둥·저장·장쑤 등 여러 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허난의 마샹진(馬鄕鎭)은 행정구역의 이름까지 량주진(梁祝鎭, 양축진)으로 바꿨다. 양축 전설의 버전 역시 다양한데, 기본적인 플롯은 다음과 같다. 축영대가 남장을 하고 서원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축영대는 양산백을 만나게 되고 그림자처럼 함께한다, 몇 년 뒤 두 사람은 서원을 떠난다, 축영대가 여자임을 알게 된 양산백이 청혼하지만 축영대의 집안에서는 그녀를 다른 곳에 시집보내려 한다, 양산백이 병에 걸려 죽는다, 축영대가 양산백의 무덤을 찾아가자 무덤이 열리고 축영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의 영혼은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쉬커(徐克) 감독의 <양축>(1994)은 바로 이 전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항저우 버전의 양축 전설에 의하면, 양산백과 축영대는 항저우의 만송(萬松)서원에서 함께 공부했다. 당시 두 사람은 서호의 장교에서 자주 노닐었다고 한다. 장교는 두 사람이 헤어진 곳이기도 하다. 축영대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차마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서로를 거듭 배웅하며 장교를 18번이나 오갔다고 한다. 이렇게 면면한 정이 깃들었으니, ‘장교’라는 이름이 제격이다.

장교는 송나라 순희(淳熙) 연간의 왕선교(王宣敎)와 도사아(陶師兒)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집안의 반대로 맺어질 수 없었던 두 연인, 달 밝은 밤에 다리 위에서 서로를 꼭 껴안은 채 호수로 몸을 던졌다.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영원토록 지키기 위해 차디찬 호수 속으로 뜨겁게 몸을 던진 것이다. 영원한 사랑의 의지가 깃든 다리, ‘장교’라는 이름이 제격이다. 장교는 쌍투교(雙投橋, 둘이서 투신한 다리)라고도 한다. “쌍투교 아래의 물을 보니, 고운 연꽃 두 송이가 새로 피어났네”(서호 죽지사(竹枝詞))라는 시구처럼 두 사람은 연꽃으로 피어났으리라.

단교에서 서호 강변을 따라 서남쪽으로 한참 걸어가다 보면 서령교(西?橋)가 나온다. 다리 곁 정자 안의 무덤이 심상치 않다. 무덤의 주인은 남북조시대 남제(南齊) 때의 유명한 기생 소소소(蘇小小)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소소소는 가기(歌妓)가 된다. 그녀는 완욱(阮郁)이라는 명문가 자제와 사랑에 빠지는데, 두 사람이 사랑을 맹세한 곳이 바로 서령교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나비가 되어 날아가지도 못하고 연꽃으로 피어나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진링(金陵, 지금의 난징)으로 가버린 완욱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소소소는 완욱과 닮은 포인(鮑仁)이라는 서생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가난한 포인이 과거를 보러 갈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포인이 급제하고 돌아왔을 때 소소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포인은 그녀를 서령교 곁에 안장하고 모재정(慕才亭)이라는 정자를 세워주었다. 열아홉에 세상을 떠난 소소소는 “죽어서도 서령에 묻혀 서호와 짝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늘 함께한 것은 서호가 아닌가. 소소소의 무덤이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다.

추근

추근

반청 혁명가 추근과 장타이옌
서령교 근처에는 또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 역시 “서령에 묻어 달라”고 했던 그녀, 바로 혁명가 추근(秋瑾, 1875~1907)이다.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니, 자유라는 술 한 잔을 권한다”(면여권가(勉女權歌))고 외쳤던 그녀는 여성 해방과 반청(反淸) 혁명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스물둘(1896)에 결혼한 추근은 이듬해 아들을 낳고, 몇 년 뒤에는 딸도 낳는다. 하지만 집안에서 정해준 남자와의 결혼 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시국에 무관심한 남편은 추근과 성향이 너무도 달랐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자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봉건적 속박을 끊어내는 일을 감행한 것이다. 일본에서 그녀는 동맹회에 가입하고 저장성의 책임자가 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중국여보(中國女報)>를 창간해 여성 해방과 반청 혁명을 부르짖었고,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무장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거절한다.

“혁명은 피를 흘려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만주족 놈들이 나를 단두대로 끌고 간다면, 적어도 5년은 혁명을 앞당길 수 있을 겁니다.”

추근은 샤오싱(紹興)의 다퉁(大通)학당에 의연히 남아 있다가 청나라 군인에게 체포된다. 체포된 이튿날 새벽, 그녀는 샤오싱 쉬안팅커우(軒亭口)에서 처형된다. 목을 자르는 참형이었다. 여자에게는 행하지 않던 형벌이다. 추근이 처형당한 날은 1907년 7월 15일이다. 1904년에 일본으로 떠났다가 귀국한 지 겨우 1년 반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자신을 태웠고, 그 불꽃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추근의 무덤은 아주 여러 번 옮겨졌다. 그녀의 뜻대로 서령교 근처에 묻힌 건 1908년과 1913년, 그리고 1981년이다. 그녀가 처음 묻혔던 곳은 원적지인 샤오싱이다. 샤오싱에서도 두 차례나 장소를 옮긴 끝에 항저우 서령교 근처로 옮겨진 게 1908년 1월,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다시 샤오싱으로 옮겨진다. 청나라 조정의 압력 때문이었다. 이듬해에는 후난 샹탄(湘潭)으로 옮겨진다. 추근의 남편이 병사하자 부부를 합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해혁명 이듬해인 1912년에는 후난 동맹회에서 추근의 유해를 샹탄에서 창사(長沙)로 옮긴다. 순국 6주기인 그 이듬해에는 다시 서령교 근처로 옮겨진다. 1965년에는 서호 일대의 무덤을 모두 없애면서 임시 묘소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에 항저우 지룽산(鷄籠山)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81년 10월, 신해혁명 70주년을 맞아 최종적으로 다시 서령교 근처에 안장된다. 추근은 서령교 근처에 묻히길 원했고 지금 그곳에 있다. 조상이 있는 곳, 남편이 있는 곳이 아닌 그녀가 있고 싶은 그 곳에. 청나라 조정 때문에 옮겨졌고 동맹회에서 옮겼고 마오쩌둥 정권 때문에 옮겨졌지만, 결국은 자신이 바라던 곳에 있다. 추근이 떠나간 지 한 세기도 넘은 지금, 그녀가 권한 ‘자유라는 술 한 잔’은 얼마나 채워졌을까? 그러고 보니 서호 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舊址)기념관이 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이후,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옮겨온 것이다. 임시정부는 항저우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오늘날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살아간다.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고자 피땀을 흘렸던 많은 이들에게. ‘부채의식’은 결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망각에 저항함으로써 역사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힘이다.

1937년 악비 사당의 일본군

1937년 악비 사당의 일본군

서호 삼걸, 악비·우겸·장창수
서호 남쪽에는 또 한 명의 반청 혁명가, 장타이옌(章太炎, 1869~1936)의 무덤이 있다. 무덤 곁에는 1988년에 세워진 장타이옌기념관도 있다. 장타이옌은 광복회의 발기인이었고, 일본에서 동맹회에 가담했으며, 동맹회 기관지 <민보(民報)>의 주필로 활동했다. 그는 한족의 민족혁명을 부르짖으며 만주족의 청나라를 타도하고자 했다. 장타이옌이 생전에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장창수(張蒼水, 1620~1664)다. “같은 날에 나지는 못했지만 죽어서는 마땅히 가까이에 묻히겠다”던 장타이옌의 말대로, 그의 무덤 가까운 곳에 장창수의 무덤이 있다. 장창수는 명나라 말에 정성공과 더불어 끝까지 청나라에 항거했던 인물이다.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된 장창수는 항저우에서 처형된다. 어떤 스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장창수의 시신을 거두긴 했지만, 그의 무덤임이 발각될까봐 비문에는 “왕(王)선생의 묘”라고 성씨까지 바꿔야 했다. 장창수 무덤임을 표방할 수 있게 된 건 사후 80년이 지나서다.

장창수는 악비·우겸과 더불어 ‘서호 삼걸(三傑)’로 불린다. 세 사람의 무덤과 사당은 모두 서호에 있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이민족에 맞서 싸운 한족의 민족영웅이다. 장창수에게 악비와 우겸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항저우로 압송될 때 지은 시 ‘갑신년 팔월에 고향과 이별하며(甲辰八月辭故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라가 깨졌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서호에 나의 스승이 있다네. 해와 달이 함께 우겸의 무덤 위에 걸렸고, 절반의 산하가 악비의 사당 앞에 있네.” 우겸과 악비는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명나라 때의 우겸(于謙, 1398~1457)은 몽골의 공격으로부터 베이징을 수호했다. 그보다 삼백 년 전 남송의 악비(岳飛, 1103~1142)는 여진족의 금나라와 맞서 싸웠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다.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이건만 ‘모반죄’를 씌워 죽게 한 것이다. 훗날 악비와 우겸에게 각각 내려진 충무(忠武)와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그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었을까?

“맑은 날의 서호는 비 내리는 서호보다 못하고, 비 내리는 서호는 밤의 서호보다 못하고, 밤의 서호는 ‘인상 서호’보다 못하다.” 세계 최대의 수상 공연인 ‘인상(印象) 서호’의 홍보 문구다. 만남·사랑·이별·추억·인상의 총5막으로 이루어진 한 시간 동안의 공연은 그야말로 서호에 대한 ‘인상’을 뇌리에 각인시켜준다. 이 인상을 끌고 가는 주선율은 남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다. 멀리서 날아온 학이 남자로 변하고 또 다른 학이 여자로 변해 사랑에 빠지지만 슬픈 이별을 맞게 되는 내용은, ‘백사전’ 전설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공연의 규모와 수준은 가히 환상적이다. 세 명의 연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장이머우 감독이다.

어두운 저녁 드넓은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인상 서호’, 이 공연을 보는 관객들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 악비의 사당인 악왕묘(岳王廟)다. 대전에 들어가면 늠름한 악비의 상(4.5m)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위에 걸린 편액의 글씨가 매우 인상적인데, 악비의 서체라고 한다. ‘환아산하(還我山河)’, 나에게 산하를 돌려 달라! 금나라에 빼앗긴 북부 중국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악비의 외침이다. 대전 오른쪽으로는 악비의 무덤과 아들 악운(岳雲)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악비의 죽음을 명했던 고종이 세상을 뜨고 효종이 즉위(1162)하면서 악비의 명예도 회복된다. ‘한족’의 민족영웅 악비의 사당이 처음 세워진(1221) 지 700여 년 뒤, 중국인의 분노를 일으킬 장면이 벌어진다. 1937년, 상하이를 함락하고 항저우에 침입한 일본군이 이곳까지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한족의 영웅 악비를 넘어선 ‘중화민족’의 영웅 악비가 외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순간이다.

맑은 날과 궂은 날, 새벽과 저녁, 봄·여름·가을·겨울, 시시각각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닌 서호에는 슬프고 비장한 전설과 역사가 가득하다. 그 비장함에서 나온 힘일까? 서호를 품고 있는 항저우는 오늘날 빛을 발하고 있다. 올해 9월, G20 정상회의가 바로 이곳에서 개최된다. 2022년 아시안게임 유치에도 성공했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본사도 항저우에 있다. 마윈(馬雲) 알리바바 회장은 바로 항저우 출신이다. 일찍이 항저우를 기반으로 청나라 최고 부자가 된 호설암은 생사 무역을 둘러싸고 서양 상인과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아시아 최고 부자 마윈은 어디까지 비상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물의 도시, 애환과 영욕이 서린 이곳 항저우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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