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폭파 운명을 안고 개통한 ‘첸탕장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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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이 전면화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첸탕장대교가 1937년 11월 17일 개통되었다. 그러나 다리의 운명은 일본군이 항저우를 침입하는 그날에 폭파되어야 했다. 결국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2월 23일 오후,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937년 11월 17일, 첸탕장(錢塘江)대교가 전면 개통했다. 첫 차량이 대교를 지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이들이 박수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첸탕장대교는 중국이 자력으로 만든 최초의 대교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현대식 대교는 죄다 외국인이 만든 것이었다. 황허(黃河)대교는 벨기에인, 화이허(淮河)대교는 영국인, 쑹화장(松花江)대교는 러시아인이 만들었다. 첸탕장대교는 무려 1453m에 달한다. 조수가 거세기로 유명한 첸탕장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첸탕장 바닥에는 40m에 달하는 진흙층이 있다. 이 진흙층을 뚫어야만, 다리를 지탱해줄 말뚝을 강바닥의 암석층에 박을 수 있다. 첸탕장대교 전 구간에 걸쳐 1400개나 되는 말뚝을 촘촘히 박아야 했다. 이밖에도 많은 난제를 극복하고 첸탕장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인 것이다. 그것도 아래층에는 기차가 달리고 위층에는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다리! 이 일을 해낼 중국의 엔지니어는 없다고 장담하던 이들을 무색하게 만든 사람, 바로 마오이성(茅以升, 1896~1989)이다.

마오이성은 열여섯에 탕산(唐山) 노광학당 예과에 입학했다. 그해(1911)에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가을 마오이성은 학교를 방문한 쑨원의 강연을 듣게 된다. 쑨원은 학생들에게 강조하길, 중국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군사적 무장뿐 아니라 건설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때 마오이성은 교량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 교량사의 이정표가 되는 첸탕장대교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육화탑

육화탑

중국이 자력으로 만든 최초의 대교
1937년 9월 26일에 첸탕장대교의 아래층인 철도교가 우선 개통된 데 이어서, 11월 17일에는 위층의 도로교까지 개통되었다. 이날, 박수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군중 속에서 마오이성의 마음은 어둡기만 하다. 정작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사람인데 말이다. 바로 전날에 그는 매우 비밀스런 일을 했다. 첸탕장대교를 언제든 폭파시킬 수 있는 준비를 해놓으라는 정부의 명령을 받고 밤새워 100여개의 도화선을 설치한 것이다. 몇 달 전 7월 7일의 노구교(蘆溝橋)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불길함을 직감한 마오이성은 다리 아래에 폭약을 설치할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원래 설계에는 없었던 것이다. 8월 13일 쑹후 전투로 중일전쟁이 전면화된다. 결국 상하이가 함락되고, 항저우도 코앞에 위험이 닥쳤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첸탕장대교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도화선까지 연결된 폭약이 다리 아래에 설치되어 있던 1937년 11월 17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첸탕장대교의 탄생을 축하했지만 마오이성은 눈물을 삼켰다. 자신의 손으로 탄생시켰으나 곧 자신의 손으로 소멸시켜야만 하는 다리의 운명 때문에. 일본군이 항저우를 침입하는 그날에 다리는 폭파되어야 했다. 결국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2월 23일 오후,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도화선이 타들어가고 굉음이 나고 다리는 파괴됐다. 마오이성은 이 일을 두고 지은 시(눈물을 흘리면서 첸탕과 이별하며(灑淚別錢塘))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물 흘리며 다리를 폭파해 길을 끊었네. 오행에서 화(火)가 부족했는데 정말 화가 왔구나. 다리를 복원하지 않으면 사내가 아닐지니.” 첸탕장다리를 나타내는 전당강교(錢塘江橋)라는 글자에 오행의 금(金)·토(土)·수(水)·목(木)은 있는데, 화(火)만 없다. “정말 화가 왔다”는 건 다리의 폭파(爆破)로 오행이 다 갖추어졌다는 의미다. 시에는 다리를 복원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마오이성은 첸탕장대교 복원을 주도했다. 이 다리는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첸탕장대교 북쪽 기슭의 첸탕장대교기념관에서는 이 다리의 역사와 마오이성에 관한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기념관 근방의 동상은 바로 마오이성이다.

1937년에 폭파된 첸탕장대교

1937년에 폭파된 첸탕장대교

대교를 내려다보는 육화탑의 전설
드넓은 첸탕장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첸탕장대교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서호의 남쪽 월륜산(月輪山)에 세워진 육화탑(六和塔)이다. 육화탑이 세워진 시기는 오월(吳越)의 마지막 왕 전홍숙 때다. 첸탕장의 거센 조수를 진압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육화탑이라는 명칭은 불교의 ‘육화경(六和敬)’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육화탑을 육합탑(六合塔)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 사방과 위아래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다. 신기하게도 육화탑을 세운 이후 거센 조수가 많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또 육화탑은 첸탕장을 비추는 등대 역할까지 했다.

육화탑의 높이는 60m에 달한다. 겉으로는 13층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부는 7층이다. 각층마다 걸린 편액이 매우 인상적이다. 청나라 건륭제가 육화탑을 찾았을 때(1751) 남긴 것이라고 한다. 초지견고(初地堅固), 이체구융(二諦俱融), 삼명정역(三明淨域), 사천보망(四天寶網), 오운부개(五雲扶蓋), 육오부대(六鰲負戴), 칠보장엄(七寶莊嚴). 이상의 편액은 모두 불교의 가르침과 관계가 있다. 건륭제가 이곳에 남긴 자취는 이뿐만이 아니다. 육화탑 근처의 비정 안에 세워진 어비 역시 건륭제의 친필이다. 13줄에 달하는 비문은 육화탑의 역사, 건륭제가 첸탕장을 노닐며 느낀 감회 등을 담고 있다.

육화탑에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먼저 육화탑 근처에 있는 남자아이 석상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오른손에 커다란 돌덩이를 쥐고 있는 이 아이, 노려보는 표정이 심상찮다. 전설에 의하면, 육화라는 아이의 아버지가 고기잡이하러 나갔다가 첸탕장에 빠져 죽었다. 이윽고 어머니 역시 해일에 휩쓸려갔다. 이에 육화는 첸탕장을 메워버리겠다며 날마다 강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 때문에 용궁은 평안한 날이 없었다. 결국 용왕은 육화의 어머니를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 첸탕장의 해일도 많이 잠잠해졌다. 이를 기념해서 사람들이 탑을 세웠는데, 그게 바로 육화탑이라고 한다.

첸탕장과 맞짱 뜬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오월을 세운 전류다. 그는 첸탕장에 방조제를 쌓으려 했다. 하지만 거센 조수로 인해 쌓기만 하면 무너지고 말았다. 시종이 말하길, 조수의 신 때문이라고 했다. 전류는 조수가 가장 크게 일어나는 날을 기다렸다. 조수의 신의 생일이라는 음력 8월 18일, 전류는 궁수들을 이끌고 일제히 조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고 조수는 물러갔다. 이후 전류는 무사히 방조제를 쌓을 수 있었다. 백성들은 전류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 방조제를 ‘전당’이라고 명명했다.

전류의 ‘전(錢)’에 제방을 의미하는 ‘당(塘)’이다. 전당강(첸탕장)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조수의 신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전설이다. 어쩌면 전류는 실제로 조수를 향해 활을 쏘았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주술 의식으로서 말이다. 아무튼 전류의 수리사업을 통해 항저우가 큰 혜택을 누린 것은 사실이다. 서호 동남쪽의 ‘전왕사(錢王祠)’는 바로 전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전왕사는 유랑문앵공원 경내에 있다. ‘유랑문앵(柳浪聞鶯)’은 버드나무가 파도치고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의미다. 서호십경의 하나인 이곳을 둘러보면서 전왕사도 놓치지 말고 들러보시길.

다시 육화탑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곳에는 유독 인물상이 많은데, 청동좌상의 스님이 누군지 먼저 알아보자. 바로 육화탑을 중건했던 지담(智曇) 스님이다. 북송 휘종 선화 3년(1121)에 육화탑은 전화에 소실되고 만다. 남송이 들어서고 고종이 육화탑을 중건하고자 했을 때(1152) 지담 스님이 그 일을 떠맡겠다고 자원했다. 지담 스님은 조정의 돈을 일절 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사방에서 자금을 모아 10년 동안 애쓴 끝에 마침내 육화탑을 다시 준공(1163)했다. 이후에도 육화탑은 천재 혹은 인재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하지만 늘 재건·보수되며 그 자리를 지켰다. 970년에 처음 세워졌던 육화탑이 지금도 육화탑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탑을 지켜온 많은 이들 덕분이다. 지담 스님의 청동좌상은 바로 그들의 노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리라.

첸탕장 조수를 향해 활을 당기는 전류의 동상

첸탕장 조수를 향해 활을 당기는 전류의 동상

지담 스님의 청동좌상이 있는 곳에서 더 올라가면 ‘육화 전고(典故)’라고 명명된 곳이 나온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든 인물상 세 개가 있다. 용맹하게 활을 당기고 있는 청동상이 바로 전류다. 한백옥상과 화강암상은 각각 <수호전>의 노지심과 무송이다. 양산박의 이 두 호걸은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육화사로 들어왔다. 특히 노지심은 첸탕장의 조수와 깊은 인연이 있다. 조수가 크게 밀려오던 날, 노지심은 그 소리를 듣고 전쟁의 북소리라고 생각했다. 타향 출신이라서 이곳의 조수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다. 그 소리가 첸탕장의 조수 소리인 것을 안 그는 깜짝 놀랐다. 일찍이 그의 사부가 일러준 말 때문이다. “하(夏)를 만나 사로잡고 납(臘)을 만나 사로잡는다”라는 사부의 말대로, 일찍이 노지심은 적장 하후성을 사로잡았으며 농민 기의를 일으킨 방랍 역시 생포한 바 있다. 사부는 노지심이 “조신(潮信)의 소리를 들으면 원적(圓寂)할 것”이라고도 했는데, 이제 그때가 된 것이다. 조신이란 일정한 시기에 생겨나는 조수를 의미하고, 원적이란 스님의 죽음을 뜻한다. 과연 바로 이날 노지심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하제일의 조수’
육화탑의 주소는 ‘항저우시 서호구(區) 지강로(路) 16호’다. ‘지강’은 바로 첸탕장이다. 첸탕장은 저장성에서 가장 큰 강이다. 강물의 흐름이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지강(之江), 절강(折江), 절강(浙江)이라고도 했다. 저장성이라는 성의 이름 역시 저장(절강)이라는 강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안후이성에서 발원해 저장성을 가로질러 항저우만(灣)으로 흘러드는 첸탕장의 총길이는 589㎞에 달한다. 첸탕장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생겨나는 조수는 ‘천하제일의 조수’라고 불릴 정도로 장관이다. 바닷물이 육지를 향해 밀려오면서 생겨나는 이곳의 해일은 아마존 강의 ‘포로로카’에 비견된다. 첸탕장의 해일은 달과 태양의 인력,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원심력, 항저우만의 특수한 지형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지구를 끌어당기는 천체의 인력 중에서도 달의 영향이 가장 크다. 때문에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조수간만의 차가 유난히 크다. 첸탕장의 해일을 구경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는 음력 8월 18일 즈음이다. 이때 첸탕장에서 그토록 큰 해일이 발생하는 것은 나팔 형태의 지형 때문이다. 하만(河灣)의 입구는 폭이 100㎞에 달하는데, 강의 상류는 폭이 불과 2㎞다. 때문에 역류하는 바닷물의 유속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팔 형태의 구간에서 강의 상류 쪽 바닥에 모래 둔덕이 형성되어 있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수심은 10m인데, 강폭이 급격히 좁아지는 상류의 수심은 2m에 불과하다. 밀려드는 바닷물이 이 둔덕에 이르면 마치 벽에 부딪친 듯 파고가 높이 일게 마련이다. 첸탕장 해일의 굉음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음력 8월 18일 즈음이면 첸탕장 해일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관조절(觀潮節)’ 혹은 ‘조신절(潮神節)’이라고 하는 이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항저우에서 50㎞ 떨어진 곳의 하이닝(海寧)이다. 청나라 때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첸탕장의 해일을 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 역시 항저우에서 하이닝으로 바뀐 것이다.

일찍이 남송의 고종은 첸탕장 해일 소리를 듣고 금나라 병사가 쳐들어온 줄 알고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이후 그는 첸탕장 조수를 즐겨 구경했다. 흥미롭게도 남송 말에 원나라 군대가 수도 항저우로 쳐들어왔을 때, 마침 첸탕장의 대역류가 발생할 시기였다고 한다. 원나라 측에서는 첸탕장의 조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첸탕장 가에 주둔했다. 남송 조정에서는 곧 조수가 밀려와 원나라 병사를 죄다 휩쓸어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대역류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첸탕장의 조수는 주기대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다만 그 크기에 차이가 있는데, 당시에 원나라 병사들을 휩쓸어갈 정도의 대역류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왕조의 운명이 다할 징조로 여겨졌고, 과연 남송은 멸망하고 말았다.

첸탕장의 조수는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현대인의 마음속에 조수의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첸탕장을 메워버리겠다며 돌을 던진 육화, 첸탕장을 향해 화살을 쏘았던 전류, 육화탑을 세웠던 이들, 그들이 두려워하고 이겨내고자 했던 첸탕장에 놓인 다리 위로 기차와 자동차가 내달린다. 첸탕장대교가 전면 개통하던 날, 다리 아래는 폭약이 있었다. 일본군이 항저우에 침입하던 날, 다리는 폭파되었다. 인간이 대자연의 위협을 몰아낸 그 자리에 스스로 불러들인 것, 그것의 본질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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