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에서 떠오른 송창식의 ‘날이 갈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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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종 감독의 걸작 <바보들의 행진>에 수록된 곡으로 더 애틋하다. 영화의 막바지는 그 무렵의 청년들이 극단의 허무와 고립과 좌절을 다소 낭만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비극성으로 그려낸다.

중간고사 기간이다. 비좁은 강의실에 학생들이 빼곡이 들어찼다. 평소 수업 때는 빈 자리가 그래도 열댓 정도는 보였는데, 거의 꽉 차서 아직 봄인데도 젊은 친구들이 뿜어내는 훈기가 강렬하다. 그래도 시험이라고, 아니 토플이나 토익은 두 번 세 번 다시 쳐서 점수를 올릴 수 있지만, 한 번 매겨지면 평생 따라다니는 학점 걱정 때문에 남은 자리를 다 채운 녀석들마저도 반갑다.

아이들은 칠판에 제시된 문제를 궁리하여 쓰느라 여념이 없고, 나는 머리를 책상에 콱 처박고 뭐라도 한 글자 더 쓰려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마음으로는 지긋이 정성껏 바라보는 것인데, 학생들 입장에서는 커닝이라도 하지 않나 하고 감시하는 그런 시선으로 여겨질 것이다. 아이들의 글씨 쓰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그러나 상당한 리듬감을 갖고 들려오는데, 그 소리를 들으며 노래 하나를 생각한다. 송창식의 노래 ‘날이 갈수록’, 1975년도 노래다. 지금 내 앞에서 문제를 풀고 있는 학생들, 아마도 그들의 부모들조차 유년기였을지도 모를 20세기 중엽의 오래전 노래가 왜 갑자기 21세기 초엽을 살아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떠올랐는지는 차차 써보겠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포스터.

영화 <바보들의 행진> 포스터.

이 노래, 즉 ‘날이 갈수록’은 송창식의 노래로 유명하지만 달리 기억해 보면 하길종 감독의 걸작 <바보들의 행진>에 수록된 곡으로 더 애틋하다. 영화의 막바지는 그 무렵의 청년들이 극단의 허무와 고립과 좌절을 다소 낭만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비극성으로 그려낸다. 경희대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절망의 대화를 나눈다.

“선배들이 지켜준 소중한 학교가 있어, 학교가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해”, “난 이제 떠날 거야”, “어디로 가니?” “고래를 잡으러 떠나겠어”, “같이 떠나자”, “넌 안 돼”. “나 혼자서 떠나야 해”, “같이 떠나 임마, 너와 나는 지금까지 무엇이든 같이 해왔잖니”, “넌 학교로 가면 돼. 난 갈 데가 있어.”

그리고 영화는, 심각한 검열 때문에 참혹하게 잘려나갔다가 다시 복원된 화면은, 자전거에 몸을 싣고 멀리 떠나는 청년과 학교로 돌아가서 잔혹한 벽보를 읽는 청년을 보여준다. 멀리 떠난다고 한 청년도 패퇴자이고 학교 벽보를 읽는 청년도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벽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교수회의 결정에 따라 무기한 휴강을 발표함, 학생처장 백” 긴급조치 시대의 스산한 캠퍼스. 학생은 교내 방송에 대고 절규한다. “들립니까, 들립니까, 들립니까?” 그때, 노래가 흐른다. 송창식의 노래 ‘날이 갈수록’이다.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 꽃이 지네 루루루루 가을이 가네

역설의 힘으로 영화를 압도한 ‘고래사냥’
한편, 자전거를 타고 동해까지 달려간 청년은? 짙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때 또 흐르는 노래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역설의 힘으로 영화를 압도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어느 학생이 답안지를 바꿔 달라고 해서 내 생각은 끊어졌다.

대학이 위기라고들 한다. 학령인구 감소로 수많은 군소 대학들이 존폐의 기로에 놓여 있다. 기존의 대학 규모 유지 및 그 운영방식에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 대안의 하나로 ‘사이버’나 ‘무크’ 같은 디지털 시대의 온라인 교육이 의미 있게 제시되고 있다. 시간도 아끼고 비용도 아끼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 접속하여 들을 수 있는, 더욱이 무의미할 정도로 남발된 기존의 대학 ‘졸업장’ 시스템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중요하게 검토할 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해본다. 과연 대학이 강의를 듣는, 그러니까 온라인으로 들어도 되는 그런 정도일 뿐인가. 나는 그 ‘공간적 의미’에 한정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성공회대학교 캠퍼스의 느티나무.

성공회대학교 캠퍼스의 느티나무.

캠퍼스는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자유 공간
초·중·고, 그리고 대학. 이 공간들 중에서 비교적 넉넉하고도 자유롭게 공부도 하고 여러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은 비통하게도 대학뿐이다. 이 대학마저도 상업화되거나 쉴 틈도 없거나 건물 위주로 급격히 재편되는 마당이다. 현재의 한국 공간에서 널찍한 시야, 사계절의 변화, 활기찬 웃음들, 의미 있는 토론, 한가로운 ‘멍 때리기’ 등이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곳은 대학 캠퍼스가 유일하다.

이 ‘공간’ 속에서 많은 학생들이 걷고, 쉬고, 대화하고, 혼자 앉아 있기도 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 모든 풍경이 다 교육이고 문화다. 이런 공간이 상업화되거나 박제화되거나 온라인 원격교육으로 대체된다면 한국 사람들은 비좁은 아파트와 성냥갑 같은 중·고교 건물과 틀에 박힌 사무빌딩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대학의 캠퍼스는 일생의 단 몇 년 동안이나마 혼자서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도 있고, 교수들과 한가롭게 대화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이를 밀어버리고 큰 건물만 짓거나(고대, 이대, 연대 등) 학생들이 뛰거나 노는 공간을 주차장으로 변경(동아대 등)하는 것은 ‘캠퍼스 라이프’의 교육적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다.

지난주, 대학원 강의 때문에 성공회대학교에 갔다가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성공회대 새천년관 1층에는 ‘책 나눔 서가’가 있는데, 다른 교수들이 내다놓은 책들을 누군가 꼼꼼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였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누군가 내다놓은 책들을 하나씩 꺼내서 살펴보는 한홍구 교수의 실루엣은 아마도 그 순간 그 옆으로 지나쳤던 많은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는 교육의 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 보니 성공회대의 상징인 느티나무 근처로 학생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참새들처럼 모여 있었다. 예전에 이 대학의 캠퍼스 조경을 바꾸면서 이 나무를 베려 했다고 들었다. 그때 그랬더라면, 저 큰 나무의 교육적·문화적 가치는 사라졌을 것이다. <장자>에 보면 크고 굽은 나무가 있는데, 목재로도 선박으로도 가구로도 쓸 수 없는, 그러나 바로 그 쓸모없음 때문에 새도 날아들고 아이들은 뛰놀고 노인들은 볕을 피하여 큰 나무의 그늘 밑에서 쉰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작은 캠퍼스를 교육적으로나 심미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난한 아이들은 어디서나 태어나고 성장한다. 그 중 많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한다. 학벌 서열이나 취업을 위한 졸업장 같은 폐단이 있지만, 그러나 이 가난한 청년들의 기나긴 인생에서 그래도 널찍한 캠퍼스에서 보낸 몇 년은 영원히 삭제할 수 없는 삶의 원형질, 그 애틋한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부실하고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한 아이들에게 캠퍼스는 평생을 살면서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 친구도 만나고, 연애도 하고, 혼자서 한참이나 해가 저무는 것을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졸업하여 캠퍼스 밖으로 나가면 생존의 지옥이요 압살의 공간에서 평생 살아갈 ‘헬조선’의 운명들이다. 1975년의 ‘날이 갈수록’은 불행하게도 재현되고 있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지니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우리들의 시절
루루루루 세월이 가네 루루루루 젊음도 가네

이런 캠퍼스 공간의 교육적 의미를 온라인이 대체할 수는 없다. 요즘 보니, 수많은 대학들도 빽빽하게 건물을 세우고 또 그 건물의 주차난을 해결한다고 한 뼘의 휴식공간도 다 밀어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캠퍼스의 한가로움 그 안에서 빈둥거리며 깊고 넓게 사색하는 장소 자체의 교육적·문화적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 또 다른 의미의 긴급조치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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