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는 흑인들의 한이 서린 음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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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였으나 다들 못 배운 것은 아니고, 정통 클래식 화성에 개별 악기 연주의 극한까지 섭렵한 자들이 그 무기로 차별과 억압의 한복판에서 보편의 예술적 경지와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 재즈다.

재즈에 대한 통속적인 오해의 하나는 격렬한 육체성의 음악을 토해내는 재즈 뮤지션들이 음악 이론에는 다소 무지하고 대체로 흑인 특유의 리듬 감각을 바탕으로 그들의 인종적 울분을 원시적인 에너지로 토해낸다는 식의 거친 인식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좀 더 확대해 보면, 재즈 뮤지션들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결손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성장하여 거리 또는 교도소에서 우연히 악기를 익히게 되어 그 길로 곧장 야생적인 힘으로 음악의 길을 걷다가 술과 마약에 휘말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식의 상투적인 연상이 이어진다.

물론 루이 암스트롱은 1901년 뉴올리언스의 홍등가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부터 술집에서 일을 하면서 음악을 익혔다. 아버지는 루이 암스트롱이 아주 어렸을 때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는 생의 첫 주기 때 다른 여자와 다른 삶을 찾아 떠났고,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홍등가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1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소년이 거리에서 할 만한 일들을 하면서 컸다.

그러나 재즈가 휘황찬란한 문화산업의 총아가 되고 대도시 시카고의 밤을 주름잡게 된 이후로 이 장르 역시 산업과 제도라는 틀이 생기게 되었다. 곳곳에 재즈 학교가 설립되었고, 뛰어난 프로듀서가 활동했으며, 세계적인 음반사들이 최고 사양의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뮤지션들을 불러모았다. 그 이후 재즈 뮤지션들은 대체로 정규 학교를 다니며 화성학 이론과 연주기법을 연마한 후에 여러 제도와 산업의 바탕 위에 펼쳐진 클럽과 스튜디오로 진출했다.

색소폰을 부는 재즈 음악가 존 콜트레인.

색소폰을 부는 재즈 음악가 존 콜트레인.

비록 부모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별거를 하긴 했지만, 마일스 데이비스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줄리어드 음대를 클래식 트럼펫 전공으로 다녔다. 존 콜트레인도 감리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대학 졸업자였고 아버지는 유능한 재단사였다. 콜트레인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모더니스트 음악가인 레오 오른스타인이 설립한 음악학교에서 클래식 음악의 기초를 닦았으며, 2차 세계대전 참전 후에는 필라델피아의 그라노프 스튜디오에서 스트라빈스키를 중심으로 한 혁신의 작곡 이론을 연마했다. 1년 만에 그만뒀지만, 1970년대 이후의 재즈 피아노 거장 키스 재럿은 재즈 명문 학교인 버클리 음대를 잠시 다녔고, 21세기 재즈 피아노의 기린아인 재이슨 모랑은 맨해튼 음대에 진학하여 거장 재키 바이어드 밑에서 공부했다.

홍등가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
이러한 성장과 학력사항이 흑인 음악가들이 ‘흑인’이기 때문에 당했던 차별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얘기는 아니다. 재즈 뮤지션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성장하여 10대 시절에 이미 독특한 패션감각을 빛냈던 마일스 데이비스를 평생 괴롭힌 것도 자신의 음악적 지향이 결국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극빈은 벗어났으나 그렇다고 중산층에 끼어들지는 못했던 존 콜트레인의 집은 흑백 분리 지구에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 정책을 SF 기법으로 날카롭게 묘사한 영화 <디스트릭트 9>에서 묘사되는 흑인 분리 주택단지, 바로 그러한 곳에서 존 콜트레인은 성장했다. 그는 1926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마을 햄릿에서 태어났고 얼마 후 도시 하이포인트로 이사를 갔는데, 그 도시는 공공연히 흑인 분리 지구가 있었다. 음악가로 성공한 뒤에도 콜트레인은 “단 한 번도 하이포인트를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줄리어드 음대를 다닌 마일스 데이비스
재즈만이 아니라 흑인음악, 나아가 흑인문화 전체의 ‘아버지’로 통하는 듀크 엘링턴은 1931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흑인)의 음악은 미국적인 악풍을 넘어서고 있다. 흑인음악에 깊이 배어 있는 우울함은 격앙된 슬픔 속에서, 그리고 암중모색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우리의 음악은 길이 남을 것이고, 후세 사람들은 우리의 음악을 단순한 무도회 음악 이상의 것으로 존경할 것이다.”

그의 바람은 머지않은 20여년 후에 현실로 증명되었다. 그 한 축이 마일스 데이비스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흑인’이라는 인종적 범주 안에 갇히는 것을 거부했다. 흑인성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재즈가 흑인 내부의 음악, 흑인의 전유물, 흑인만이 할 수 있는 음악으로 제한되는 것을 뛰어넘고자 했다. 비록 흑인이 주도하지만 재즈를 세계의 어느 도시에서나, 세상의 어떤 인종이거나, 누구라도 기꺼이 격렬하게 음미할 만한 높은 차원의 보편적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 대표작인 1958년 작 ‘카인드 오브 블루’다. 이 앨범을 정점으로 하여 재즈는 피부색의 제약을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흑인의 위대한 음악성을 알렸다.

존 콜트레인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앨범 재킷.

존 콜트레인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앨범 재킷.

또 다른 방향은 존 콜트레인이다. 그는 다름 아닌 ‘카인드 오브 블루’에 참여했던 멤버였으나 곧 마일스 데이비스 곁을 떠나 프리의 세계를 지향했다. ‘프리’, 곧 자유인데, 두 가지 측면의 자유다. 먼저 형식의 자유. 마일스 데이비스가 구축한 안정적이고 세련된 화성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다음 정치적 자유. 비록 경제적으로는 다소 안정된 조건에서 성장했으나 그 역시 흑인 분리 지구에서 자랐고, 전쟁 직후에는 친구가 백인 경찰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겪기도 했다. 콜트레인은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 엑스가 주도하는 흑인 인권운동 집회에 자주 참여하였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완성한 ‘보편적 경지의 재즈’는 이 격렬한 사태들을 격렬하게 다루기가 어려웠다. 두 가지 측면의 자유를 위하여 존 콜트레인은 그 자신까지 가담하여 10여년에 걸쳐 형성된 모던 재즈의 문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하나의 작품 안에 2개의 자유가 마치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몸부림처럼 뒤엉켜 있지만, 굳이 구분하여 예시하자면 존 콜트레인의 형식적 자유가 빛나는 작품은 ‘나의 소중한 것들’이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아주 짧은 노래를 존 콜트레인은 라이브 연주에서 무려 20여분이 넘게 확장한다. 재즈의 즉흥성, 시작하자마자 어딘가로 기필코 달려가야만 하는 즉흥성을 극도의 불협화음으로 추구한다.

그의 정치적 자유가 돋보이는 작품은 ‘앨라배마’다. 몇 해 전, 앨라배마에 간 적이 있다. 끝도 없는 평원, 아열대의 땅, 겨울에는 온화하면서도 1년 내내 비가 내리는 곳, 열대저기압으로 여름에는 탐욕스러운 허리케인의 목표물이 되는 곳, 1년 중 70~80회가량 번개가 내리치는 곳. 물론 며칠 동안의 급한 여정이었으므로 이 모든 지리와 기후사항은 다만 심상의 참조물이었을 뿐, 현지의 광막한 평온은 따스한 햇살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딥 사우스, 흑인들에게는 천형의 땅이었던 깊고 깊은 남부 도시에서 1963년에 큰 사건이 있었다. 그해 9월 15일 앨라배마주의 소도시 버밍험의 한 교회에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몰래 폭발물을 설치하였고, 그들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바에 따라 폭발물은 흑인 소녀 4명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그 당시 남부 주요 도시들에서 곧잘 터져나온 비극이었다. 소녀들의 장례식 때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와 샘 쿡의 ‘A change is gonna come’,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앨라배마’가 연주되었다.

그리고 ‘숭고한 사랑’이 있다. 1964년의 작품으로, 그의 형식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가 거의 종교적 차원으로, 그야말로 앨범 제목처럼 숭고한 초월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작품이다. 이 앨범은 1부 ‘Acknowledgement’(승인), 2부 ‘Resolution’(결의), 3부 ‘Pursuance’(추구), 4부 ‘Psalm’(찬미)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4부에 이르면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숭고하게 위로해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제 ‘재즈’라는 단어에서 곧바로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 즉 ‘가난하여 제대로 배우지 못한 흑인들의 한이 서린 음악’이라는 표현은 버릴 때가 되었다. 가난하였으나 다들 못 배운 것은 아니고, 정통 클래식 화성에 개별 악기 연주의 극한까지 섭렵한 자들이 그 무기로 차별과 억압의 한복판에서 보편의 예술적 경지와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 재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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