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조영남 ‘딴짓’하며 인생 즐기는 아나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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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기자는 형님의 석사학위 논문 자료 수집을 도운 적이 있다. 시인 이상의 시집과 평론집에 있는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이상 시의 원전을 찾는 작업이었다. 그때 기자가 발견한 것은 기존 이상 시집과 석·박사 논문에 많은 오류가 있고, 이상 시를 해석한 평론집 역시 매우 난해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상의 시가 난수표처럼 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시를 매우 간결하면서, 경쾌하게 해설한 책을 발견했다.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라는 제목의 이 책은 지금까지 이상의 시를 해설한 그 어떤 평론가나 교수가 쓴 것보다 뛰어났다. 기자는 ‘저자는 정말 천재다’라며 무릎을 치며 저자를 살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는 ‘조영남’, <화개장터>를 부른 바로 그였다. 기자는 ‘가수가 어떻게 어렵다는 이상의 시를 연구했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 의문을 풀 기회가 왔다.

난해한 이상의 시에 대한 명쾌한 해설서
4월 6일, 벚꽃이 만개한 서울 강남 청담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조영남을 만났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넓은 그의 집은 그가 그린 그림으로 가득했다. 사실, 그는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해설서를 썼다. 난해한 현대미술을 쉽게 해설한 이 책 역시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나왔다. 아무 글이나 출판해 주지 않는 권위 있는 그 출판사에서 출판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실 그는 ‘유명 작가’다. 기자는 그를 만나자마자 “그 어려운 시를 어떻게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나”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오히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책을 쓰고 나서 단 한 번도 어떻게 썼느냐, 네가 왜 썼느냐, 무슨 배경으로 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 책을 쓰기 위해 이상에 대한 권위자들을 거의 다 만나봤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한 번도 연락 오지 않았다. 그동안 자주 만나던 기자들조차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기자가 처음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래, 지금 당신이 처음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상은…> 책에 대한 존재감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는 점에서 흥분한 듯 보였다. 기자는 <이상은…>이 문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이후 쓰여진 이상과 관련한 석·박사 논문에 많이 피(彼)인용 됐을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 조영남은 그림을 그리지만 평생의 작업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라는 책을 저술한 것에 비하면 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요즘 조영남은 그림을 그리지만 평생의 작업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라는 책을 저술한 것에 비하면 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문학계에 왜 반향이 없었을까. 그 난수표 같은 이상의 시를 이렇게 명쾌하게 해석했는데.
“내가 보기엔, 이 인간들(문학계 인사들)이 질문조차 할 줄 몰랐던 걸 거야. 내 생각이 그래. 이상의 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돼야 질문도 할 수 있어. 이상의 시는 마치 외계의 언어 같잖아. 그런 외계의 언어를 못 알아 들으니 질문조차 못하는 거지.”

아니면 문학 비평가나 교수들이 수십 년 동안 못한 것을 ‘비전문가’가 이렇게 명료하게 해석한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 아닐까.
“맞아 그럴 거야.”

‘이상 시에 대한 연구’는 그의 버킷리스트
너무 ‘깔때기’(칭찬)를 들이대는 질문과 답변이 오고갔다. 그러나 조영남의 이상에 대한 연구는 아마추어 수준이 아닌, 웬만한 평론가나 교수보다 훨씬 깊고 오래됐다. 그는 자신의 버킷리스트, 즉 평생 ‘하고 싶은 일’로 ‘이상의 시에 대한 연구서’를 내는 것을 꼽았다. 그의 평생 버킷리스트는 바로 이 하나였다. 따라서 조영남은 가수라기보다 문학평론가, 특히 ‘이상 연구가’라는 직함이 더 어울린다.

“중학교 때 이상의 소설 <날개>, 수필 <권태>를 읽고 ‘아, 이 사람은 귀신이구나’라고 생각했어. 이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 이상 전문가들 쓴 책을 다 봤는데, 단 한 사람도 마음에 드는 책이 없었어. 게다가 그렇게 어려운 시를 짜증나게, 쓴 사람도 못 알아 먹게 쓰냐 이거야. 불평만 하면 뭐해 에이 씨X, 내가 한 번 써보자. 그래서 쓴 거야.”

그는 이때 이미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문장도 일종의 ‘시’라고 규정하고 나중에 이상 해설서를 쓰면 책 제목으로 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이상의 시 얘기를 하면서 도중에 “아휴, 격해진다”는 말을 몇 번 했다. 그는 이상 이야기만 나오면 ‘엔돌핀’이 마구 도는 것처럼 보였다. 기자가 호칭을 ‘선생님’ 혹은 ‘작가’로 하니까 그는 ‘선배로 하자’고 제안했고, 기자는 이를 수용했다.

그 후 그는 이상의 자료는 물론 한국 시와 영·미 시, 심지어 중국 시까지 두루 공부했다. 관련 전문가도 많이 만나 설명도 들었다. 그럴수록 그는 ‘이상은 예이츠, 랭보, 보를레르를 능가하는 세계적 천재’라고 생각했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그는 <이상은…>을 쓰기 시작했다. 3년 내리 원고를 썼다. 그는 “원고를 쓰다가 ‘자야지’ 하고 불 끄고 누우면 아이디어가 생각 나 일어나 쓰고, 그러니 밤을 꼬박꼬박 새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막판에 다운됐다, 피가 올 스톱, 병원에 실려가면서 ‘아, 내가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이상이 28살에 각혈하면서 죽었는데, 나는 살 만큼 살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쓰면서 나는 단 한 줄도 남의 글을 (신모씨처럼) 베낀 적이 없어. 난 성질상 그런 짓 못해. 인용하면 분명히 출처를 밝히고 인용했지. 책에는 그런 인용도 별로 없어. 이상의 시는 공부를 안 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어느 한 구석도.”

그는 <이상은…>이 정말 처절하게 쓴 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단 한 사람에 대해 10대부터 관심을 가져 20대부터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나이 66세에, 그것도 3년 동안 죽자사자 쓴 책이라면 웬만한 박사논문 서너 배의 ‘내공’이 담겨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상의 시는 시어는 물론 당시 이상의 심리·건강상태까지 이해해야 해석된다. 그러니까 이상과 거의 같은 상태가 돼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단시간 시만 읽은 문학비평가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쓴 책은 대부분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이다. / 이상훈 선임기자

그가 쓴 책은 대부분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이다. / 이상훈 선임기자

이 책은 이상을 천재라 규정하고 그 천재가 쓴 난해한 시를 명쾌하게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천재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건 나중에, 나 죽은 다음에 얘기해. 아냐… 100% ‘치기’로 쓴 거야.”

스스로 <조영남씬 천재예요>(2002)라는 책을 내기도 하지 않았나.
“그건 앙드레김이 어느 날 파티에서 내 손을 잡으면서 ‘영남씨는 천재예요’라고 말하더라고. 그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책 제목으로 쓴 거야.”

그는 이상을 좋아한 이유로 ‘이상은 자질구레한 역사, 허접스런 인습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나 스스로가 아나키스트적이다. 나는 체 게바라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극렬한 이데올로기에 극성스럽게 매달리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로 남고 싶은 사람이다. 이상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하고 비슷했다”고 말했다.

체게바라 얘기를 했는데,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가.
“노, 노,(관심 없다)”

역사·인습·정치 이런 것은 정말 허접하고 자질구레한 것인가.
“그럼, 다 사소한 것이지.”

투표는 하는가.
“질문 잘했어, 내 생전 투표를 해본 적이 없어. 학교 때 반장 선거? 투표 안 하고 대충 하잖아. 그 때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이후 투표한 기억이 없어. 그렇다고 나는 방관자가 아니야. 내 주위 사람들이 누구를 뽑으면 ‘인정하겠다’ ‘따라가겠다’ 그거야.”

문학·미술·종교 등 다방면에 저서 20권
문학에서 시작한 그의 ‘작가론’은 미술을 거쳐 정치를 지났다. 사실 그는 문학·미술·사랑·양심 등 각 분야에서 20권 정도의 책을 썼다. 그는 <예수의 샅바를 잡다>라는 책으로 종교까지 범접했다. 물론 그는 신학대학을 나왔다. 그럼 ‘종교는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 신학대에서 리포트를 쓰기 위해 한국에 ‘한국 사람이 쓴 예수에 대한 책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는데, 한 권도 없다는 답장이 온 거야. 그래서 아, 이것은 ‘신이 네가 한번 써봐라’ 하는 계시로 봤지. 예수가 서른셋에 죽었지만 나는 서른셋에 예수를 공부하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는 “신학대 졸업하면서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이 말은 기독교에 대해서 별 매력을 못 느꼈다는 말이다. 그는 종교적 측면에서 예수보다 우리 고유 종교인 천도교 창시자인 나철을 더 존경한다. 그는 “나로서는 우리의 나철을 섬겨야지 중동 청년 예수를 죽자사자 섬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자신이 ‘예수에게 샅바’를 걸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보통 천재는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 자신이 워낙 잘 났으니까. 그가 그린 <묘비명>이라는 그림에는 맨 위에 나철을 그리고 ‘단군을 세우다 말다’라고 썼다. 그 다음 가운데에는 이상을 그리고 ‘시를 쓰다 말다’라고 쓰고, 맨 아래에 그의 얼굴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다 말다, 그리고 웃다 죽다’라고 썼다. 그는 “존경의 제일 꼭데기에 있는 사람은 나철이고, 정서가 맞는 사람은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이 그림은 우리 근·현대사의 3대 천재는 우리 고유 종교를 창시한 나철과, 그 어려운 시를 쓴 이상, 그리고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조영남은 다방면에 걸쳐 20권의 책을 낸 작가로, 자신이 쓴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조영남은 다방면에 걸쳐 20권의 책을 낸 작가로, 자신이 쓴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혹시 아이큐 검사를 해봤는가. 아이큐가 얼마인가?
“나와 같이 일하는 저 친구(매니저를 지칭)는 잘 알겠지만, 난 머리가 무지하게 나빠.”

본인은 뭐라고 불러주는 것이 가장 좋은가.
“개의치 않아. 아이 돈 노.”

그래도 후세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해 줬으면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평가는 무슨, 죽은 다음에 평가는 우스운 것이야. 죽으면 그만이야. 죽으면 끝이야. 자질구레한 것이야.”

그는 ‘인생을 딴짓하며 즐기자’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또 다른 천재인 아인슈타인을 인용했다.

“아인슈타인이 인생의 성공(A)=xyz라는 멋진 공식을 만들었지. x는 하는 일, y는 삶을 즐기는 것, z는 입을 다무는 것, 즉 자기 자랑을 말라는 것이야. 그런데 아인슈타인도 종종 바이올린과 피아노 콘서트를 하는 자기 자랑을 했어. 자신이 만든 인생의 성공 공식을 지키지 못한 것이지. 나도 그 공식을 지키지 못하는데, 아인슈타인도 지키지 못한 공식이라 위안을 삼아.”

그는 비유와 변명도 천재를 동원했다. 앞서 ‘당신은 천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에둘러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왕 비유하자면 그에게 아인슈타인보다 미술가·과학자·사상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유일한 버킷리스트인 <이상은…>을 쓴 그는 무슨 재미로 살까. 실제 그는 “<이상은…>을 쓰고 나서 시시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침부터 술집에 가서 술 먹을 수 없잖아?”라고 반문하며 “나보고 왜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은 낚시하는 사람에게 ‘왜 낚시하세요’라는 질문과 똑같은 거야”라고 말했다.

그에게 천재들에게서 가끔 발견되는 우월주의, 심지어 파시스트적 느낌도 든다. 워낙 본인이 잘났으니까. ‘예수에게 샅바질’을 하는 것이나 ‘맞아 죽기 각오하고 친일선언’을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런 지적에 그는 “옳다, 그럴 수 있지”라고 동의했다. 모든 것이 시시해진 지금 마지막 버킷리스트로 봉사 같은 것은 어떤가 하고 물었다.

그는 “당신 성공했으니 사회에 뭘 환원했느냐는 말이 나올 것으로 생각해 28년 전에 해결해 버렸다”면서 “나는 고아를 입양해 키웠지, 부모의 연을 맺어주는 것만큼 솔직한 사회환원이 있을까”라고 응수했다. 무려 28년 후의 질문을 예상해 미리 조치를 취해 놓은 그의 ‘천재성’에 기자는 혀를 내둘렀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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