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펑… 사대부 기개 품은 국화의 도시 마침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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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의 시화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국화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포성을 울리는 투사(鬪士)가 존재할 때 송나라는 건강했고, 그 투사가 부재할 때 나라는 병들어 죽어갔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면 카이펑 곳곳에서 국화의 향연이 펼쳐진다. 카이펑의 시화가 바로 국화다. 사군자의 하나이자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국화, 이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표현한다. 오상고절이란, 차가운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를 의미한다. 고고한 선비와 충신을 국화에 빗대는 것도 바로 이런 절개 때문이다. 카이펑에서 국화 재배가 성행하면서 전통이 된 시기는 바로 송나라 때다. 송나라의 사대부는 정치와 관련된 논쟁에 그 어느 시대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자신의 소신을 고수했다.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송 태조 조광윤의 유훈이 바로 이러한 송나라의 기풍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로운 언론을 막지 말라”는 의미다. 소신껏 밝힌 의견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니, 송나라 사대부는 절대 권력자 앞이라도 할 말은 할 수 있었다. 황제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을 법한 인사권에도 송나라 사대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상을 내려야 할 만큼 큰 공을 세운 사람인데 만약 황제가 싫어하는 이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공을 세운 게 헛수고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송 태조 때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태조가 그 신하를 승진시키려 하지 않자 조보(趙普)가 그를 승진시켜주라고 요청한다. “짐이 승진시키지 않겠다는데 경이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라며 태조가 화를 내자, 조보는 이렇게 말한다.

철탑

철탑

황제 앞에서도 할 말은 했던 신하들
“형벌로 죄악을 다스리고 상으로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이치입니다. 하물며 형벌과 상은 천하의 것이지 폐하의 것이 아니거늘, 어찌 폐하의 기쁨과 노여움에 의해 독단하실 수 있사옵니까?”

태조의 노여움은 더해졌다.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보는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오래도록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보는 결국 태조로부터 승낙을 얻어냈다.

한편 능력도 없는 사람인데 황제가 매우 아끼는 이라면? 황제가 밀어준다면야 분에 넘치는 요직에 앉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송 인종 때의 장요좌(張堯佐)가 그런 경우다. 장요좌의 사촌동생이 장요봉(張堯封)인데, 장요봉의 딸이 바로 인종이 총애하는 귀비였다. 아버지 장요봉이 일찍 세상을 떴기 때문에 장귀비는 장요좌에게 의지했다. 인종은 장귀비를 위해서 장요좌를 요직에 발탁했다. 황제가 작정하고 인사권을 휘두르는데 어느 누가 감히 제동을 걸 수 있으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 바로 포증(包拯)이다. 장요좌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최고 재정장관에 해당하는 삼사사(三司使)가 되자, 포증은 그가 삼사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장요좌는 오히려 더 많은 직책을 맡게 된다. 포증은 장요좌에 대한 탄핵을 멈추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함께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결국 당시 어사였던 왕거정(王擧正)이 정변(廷辯), 즉 조정에서의 공개 토론을 요청한다. 황제와 신하들의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포증이 얼마나 열변을 토했는지, 인종의 얼굴에 그의 침이 튀었다고 한다. 인종은 침을 닦으며 자리를 떴다. 포증이 나라를 위하는 충신이고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종은 분명히 안다. 하지만 인종은 자신이 아끼는 장귀비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싶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족시키고 싶다. 이런 인종의 마음을 알아챈 장귀비가 장요좌와 논의했을 것이다. 결국 장요좌는 선휘사(宣徽使)와 경령궁사(景靈宮使) 직책을 스스로 내려놓았고, 인종은 이를 윤허했다. 포증이 장요좌를 탄핵할 때 사용한 표현의 수위는 놀랄 정도다.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 채 부끄러움을 모르니, 진실로 깨끗한 조정의 오물이고 대낮의 도깨비입니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실세 중의 실세를 상대로 ‘조정의 오물’ ‘대낮의 도깨비’라고 비판하는 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태조와 인종 때의 사례는 유능한 사람을 황제가 함부로 내치거나 무능한 사람을 황제가 사사로이 요직에 앉히려 할 때 그것을 저지하는 목소리가 엄연히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송나라 때의 유행어에 ‘포탄(包彈)’이라는 말이 있다. ‘포증의 탄핵’이라는 이 말은 거침없는 비판을 의미한다. 탐관오리와 질책당할 일이 있는 관리를 가리켜 “포탄이 있다(有包彈)”고 했으며, 청렴결백하고 질책당할 일이 없는 관리를 가리켜 “포탄이 없다(沒包彈)”고 했다. 거침없는 비판의 끝은 탐관오리를 넘어서 절대권력을 향한 것이리라. 명군이라 평가받는 태조와 인종도 ‘절대반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제 앞에서도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던 이들이야말로 절대반지를 깨뜨리는 탄알과 같은 포탄(砲彈)이었다.

번탑

번탑

태조와 인종 때 지은 번탑과 철탑
송나라 때의 카이펑 유적은 지하 10m 아래에 묻혀 있다. 지상에 남은 것이라곤 두 개의 탑뿐이다. 번탑과 철탑, 공교롭게도 각각 태조와 인종 때의 것이다. 번탑(繁塔)은 태조 개보(開寶) 7년(974)에 쌓기 시작해서 준공하기까지 20여년이 걸렸다. 본래 번탑은 80m가 넘는 6각 9층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32m에 불과하다. 원래 탑은 아래쪽 3층(25m)만 남았고, 청나라 때 그 위에 7층짜리 작은 탑(6.5m)을 더했다고 한다. 벼락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탑의 위쪽 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명나라 때 카이펑의 ‘왕기(王氣)’를 없애기 위해서 일부러 탑의 허리 부분을 잘라냈다고 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그랬다는 설도 있고, 그 뒤를 이은 주원장의 장손 주윤문(건문제)이 그랬다는 설도 있고, 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 주체(영락제)가 그랬다는 설도 있다. 주원장이든 주윤문이든 주체든, 번탑을 잘라냄으로써 제압하고자 했던 대상은 카이펑에 봉해졌던 주왕(周王) 주숙이다. 카이펑의 왕기를 없애기 위해 번탑을 잘라냈다는 이야기는, 주원장의 큰아들이 일찍 세상을 뜨면서 조성된 황위 계승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된 전설일 것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아들이 어린 손자의 자리를 위협할까 걱정했고, 어린 주윤문은 힘센 삼촌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걱정했고, 황위를 찬탈한 주체는 동생이 자신의 자리를 노릴까 걱정했으리라. 주숙은 주원장과 주윤문과 주체 때 모두 핍박을 받았다. 유배되기도 하고 감금되기도 하고 모반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숙은 천수를 누렸다. 번탑의 영험함 덕분이었을까.

“철탑이 높다한들 번탑의 허리밖에 되지 않네”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번탑의 허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철탑(8각 13층탑)의 높이는 약 55m다. 번탑의 허리가 잘린 상황에서는 철탑이 훨씬 높다. ‘천하제일탑’이라는 별칭도 철탑이 차지하고 있다. 인종 황우(皇祐) 원년(1049)에 착공된 철탑이 준공되기까지는 무려 30여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일찍이 이곳에 개보사(開寶寺)가 있었고, 탑의 이름도 원래는 개보사탑이었다. ‘철탑(鐵塔)’이라고 불린 건 원나라 때부터다. 전체가 갈색 유리벽돌로 덮여 있어서 마치 철로 주조한 듯한 모습이기에 철탑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철탑을 중심으로 조성된 철탑공원은 카이펑에서 열리는 국화 축제의 거점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철탑공원에서 남쪽으로 1.5㎞가량 떨어진 곳의 용정공원 역시 국화 축제의 거점이다. 용정공원에는 여러 역사가 담겨 있다. 당나라 때 절도사의 치소, 오대 때 후량·후진·후한·후주의 황궁, 북송의 황궁, 금나라 후기의 황궁, 원나라 말 홍건군의 용봉(龍鳳) 정권의 임시 군영, 명나라 때의 주왕부(周王府), 이것들 모두 일찍이 용정공원 터에 자리했다. 이후 청나라 강희 31년(1692)에 이곳에 만수정(萬壽亭)이 지어졌고, 국가 전례나 황제 탄신일에 관리들은 이곳에서 멀리 베이징의 황제를 향해 하례를 올렸다. 이 만수정을 용정(龍亭)이라고 했다. 옹정 12년(1734)에 하남총독이 용정을 궁전으로 개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용정 대전의 전신이다. 민국시기에 용정공원, 중산(中山)공원, 신민(新民)공원으로 차례차례 바뀌어 불리다가 1953년에 ‘용정공원’으로 명명되었다.

용정공원의 간악 유석

용정공원의 간악 유석

자신의 욕망을 위해 국고 탕진한 휘종
용정공원과 상국사(相國寺)에는 송나라의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간악(艮岳) 유석(遺石)이 있다. 간악은 송 휘종(徽宗) 조길(趙佶)이 조성한 황실 원림이다. 조길은 본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철종이 후계자 없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동생이었던 조길이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휘종은 예술에 탐닉했다. 그의 탐닉은 나라를 멸망의 나락으로 몰아갔다. 휘종은 예술품을 모으고 기암괴석과 기화요초를 수집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전국 각지의 나무와 암석을 카이펑으로 옮겨오기 위해 ‘화석강(花石綱)’이라는 운송 조직까지 만들었다. 황제의 욕망을 채우는 그 일은 바로 백성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백성의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기도 했다. 바로 이 일에 앞장섰던 이가 채경(蔡京)이다. 당시 송나라는 신법당과 구법당의 반목이 되풀이되고 있던 때였다. 채경은 일찍이 신종 때 신법파였지만, 어린 철종이 즉위하고 신법에 반대하는 고(高)태후가 섭정하자 신법 폐지에 앞장섰다. 이후 친정을 하게 된 철종이 부친의 뜻을 계승해 신법을 옹호하자, 채경은 신법의 부활에 전력을 다했다. 이렇게 채경은 노선을 바꿔가면서 승승장구했다. 처세술의 달인에 불과한 그에게 무슨 신념 같은 게 있었으랴. 서화에 조예가 깊었던 채경이 휘종을 만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휘종의 총애를 받게 된 그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채경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을 착취해 황제를 만족시켰다.

지배층의 수탈 때문에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던 백성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시초가 바로 방랍의 난(1120)이었다. 방랍이 난을 일으킨 지 열흘 만에 반란 세력은 10만으로 늘었다. 그제야 휘종의 수집작업이 중단되었다. 방랍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몰락은 돌이킬 수 없었다. 북쪽 유목세계의 판세가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기울어가던 당시, 휘종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송나라는 요나라를 협공하기로 금나라와 약속했지만 방랍의 난을 진압하느라 결국 금나라 홀로 요나라를 멸망시키게 된다. 이거야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송나라가 금나라에 배상을 해줘야 했지만 도리어 요나라의 잔존 세력과 손잡고 금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꾸미다가 발각되고 만다. 송나라의 배신에 분노한 금나라는 즉시 카이펑을 공격했다. 휘종은 아들 흠종(欽宗)에게 황위를 넘기고 강남으로 도망쳤다.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는 대신 송나라는 더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까지 할양하기로 했다. 이후 송나라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금나라는 다시 카이펑으로 쳐들어왔다. 휘종과 흠종은 물론이고 송나라 황족과 궁녀와 관료가 죄다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가 1127년, 북송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카이펑은 금나라 군대의 약탈과 학살과 강간의 참혹한 현장이 되고 말았다. 휘종이 수집한 예술품들도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북방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여기저기 노비로 팔려갔다. 금나라에서는 휘종을 혼덕공(昏德公)이라고 불렀다. 정신이 없고 덕이 없는 왕이라는 의미다. <상서(尙書)>에서는 폭군의 전형인 하나라 걸왕을 가리켜, 정신이 없고 덕이 없어(昏德) 백성을 진구렁과 숯불(塗炭)에 빠지게 했다고 말한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국고를 탕진하며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채운 휘종도 걸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북송의 멸망은 금나라 때문이 아니다. 금나라의 공격은 송나라가 자초한 일이었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욕심만 차린 황제와 신하의 합작품, 그것이 북송의 멸망이다. 그 욕심에 제동을 걸어줄 포탄(包彈)이 없었던 것, 이것이 그 비극의 궁극 원인이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포성을 울리는 투사(鬪士)가 존재할 때 송나라는 건강했고, 그 투사가 부재할 때 나라는 병들어 죽어갔다. 북송의 멸망을 애도하며 국화꽃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국화의 도시 카이펑을 떠날 시간이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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