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현 의원…권력만 좇는 대의 없는 야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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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후유증을 남긴 4·13 총선 공천에서 가장 극적 인물을 꼽으라면 윤상현 의원이다. ‘싹쓸이 학살’ 국면의 유승민 의원도 극적이고, 낙천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을 선언한 정청래 의원도 극적 인물이지만, 이는 어느 정도 예상됐다는 점에서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윤상현이 매우 극적인 것은 칼자루를 쥔 위치에서 전화 한 통으로 급반전, 오히려 칼에 맞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에서 “김무성 죽여버려 이 XX. (비박계) 다 죽여. 그래서 전화했어. … 내가 당 공천에서 그런 XX부터 솎아내라고, 솎아내서 공천에서 떨어뜨리려 한 거야”라고 말했다. 그는 흥분하고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해명했지만, 이 전화 내용이 폭로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번 공천학살의 ‘기획자’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칼자루 쥔 위치에서 낙천의 칼 맞아
많은 정치인들은 “낙선보다 낙천이 더 충격이 크다”고 말한다. 낙선은 상대와 원 없이 싸우다 지는 것이지만, 낙천은 내부 ‘결정’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낙천자의 경우 공천 탈락 사유를 보통 ‘오류’ ‘오해’ ‘음해’ 등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더욱 억울하게 느껴진다. 이번처럼 칼자루까지 쥔 위치에서 거꾸로 낙천의 칼을 맞은 것은 그에게 매우 ‘통한’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가 이 시련을 무소속 출마로 돌파할지, 아니면 인고의 시간을 가질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사태가 20년 가까운 그의 정치가도에 가장 큰 시련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정치판에서 탄탄대로의 출세가도를 매우 빨리 달려왔다. 아니 그는 길지 않은 삶 자체가 ‘출세를 향한 야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윤상현 의원…권력만 좇는 대의 없는 야심가

그는 196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자살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에 이어 충청포럼 회장에 추대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윤 의원의 집안은 친일성향이었다. 윤 의원의 작은할아버지 윤종화(1908년생)는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윤종화는 1942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 이듬해 조선인 최초로 경성부 종로경찰서 서장에 임명됐다. 그는 1944년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경찰부장까지 승진해 황해도 경찰부 경찰부장으로 해방 때까지 근무했다.

그의 부친 윤광순씨(1934년생)는 공군사관학교(6기)를 졸업하고 1981년 공군 중령으로 예편했다. 공군 예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후 중소 전자업체인 대영전자 영업·총무부장 등을 지낸 것으로 보아 대기업 스카우트 등의 화려한 예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윤상현은 잘생기고 또 똑똑했다. 서울 영등포고등학교를 다니며 과외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현직 대통령의 딸이다. 민주당 후보로 종로구청장에 출마했던 양경숙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딸 전효선씨와 여고(창덕여고) 동기동창이다.

양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당시 우리 학교에는 이순자씨가 직접 중심이 되어 과외팀을 꾸리고 전두환씨가 살고 있는 연희동 집에서 과외를 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었다”면서 “그 과외팀에는 군장성·고위관료·법조계·교수·사업가들의 자녀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양씨는 또 “그 과외팀엔 우리 학교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던 같은 동기 친구인 정도경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중에 전두환씨의 큰아들인 전재국과 결혼했다”면서 “전효선이도 그 과외팀에서 같이 공부하던 남자친구 윤상현과 나중에 결혼을 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 딸과 청와대에서 결혼식 올려
전두환·이순자씨는 외동딸과 같이 과외를 했으며,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 대학원 입학을 앞둔 ‘똑똑하고 잘생긴’ 윤상현을 사윗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윤상현·전효선 두 사람은 1985년 6월 16일 청와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이 열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당시 현역 대통령의 사위가 된 윤상현은 최고의 화제 인물이 됐다.

이후 윤상현의 집안은 번창했다. 그의 부친은 중소 전자업체 부장에서 전격 한국투자신탁 부사장으로 영전됐다. 전두환 대통령과 사돈을 맺기 바로 8개월 전이다. 그리고 사돈관계를 맺은 지 8개월 만에 사장에 올랐다. 당시 투자신탁은 신종 투자전문기관으로 금융업에서도 매우 전문적 영역에 속했다. 그런 회사에 금융과 무관한 공군 출신이 부사장, 사장으로 발탁된 것은 ‘대통령의 사돈’ 관계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윤상현은 이때 권력과의 혼인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실감하지 않았을까. 이후 그의 부친은 전두환 전 대통령 처남 이창석씨와 주유소 사업을 벌였다가 전두환 비자금 은닉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의 사위가 된 윤상현은 부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988년 첫딸을 낳았다. 이 시기, 서울에서는 그의 장인과 노태우 대통령의 치열한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는 “노태우의 집요한 공세에 사위 윤상현이 흥분해 ‘우지기관총(청와대 경호실에서 쓰는 이스라엘제 경호용 기관단총)으로 무장해 싸우자’고 설치다가 나에게 핀잔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번 전화 막말 파문에서 드러났듯이 윤상현은 젊어서부터 ‘욱’ 하는 다혈적인 기질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장인은 1988년 10월 24일 대국민 사과를 하고 백담사 은둔에 들어갔다.

박사 학위를 딴 윤상현은 1998년 서울대 초빙교수로 혼자 귀국했다. 그는 2002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졌지만, 이미 그전부터 한나라당 주변에서 정치입문을 엿봤다. 이즈음 기자는 강남에 있는 한 룸살롱에서 윤상현과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기자들은 ‘전두환의 사위’인 그와 관심 있게 대화를 나눴다. 그와의 술자리에서 남는 기억은 ‘이 사람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야망가’라는 인상이었다. 보통 TV드라마에서는 젊은 사업가의 야망에 대한 얘기가 많다. 윤상현은 정치판에서 바로 그 주인공 격이었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인천 남구을에서 출마했지만 수백 표 차이로 낙선했다. 당시 그의 낙선 이유 중에 중요한 것은 ‘전두환의 사위’와 ‘세금체납 사실’이었다. 하기야 노무현 대통령 시절 ‘전두환의 사위’라는 신분은 선거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2005년 이혼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그는 이명박이 아닌 박근혜를 선택했고, 이 인연이 지금 ‘실세 윤상현’이 되는 계기가 됐다. 집념이 강한 윤상현은 2008년 18대 총선에 재도전, 대망의 금배지를 달았다. 금배지를 단 이후 초선의원으로서는 파격적으로 대변인에 발탁됐다. 그는 새누리당 대변인이면서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교·안보적 식견으로 당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남북정상회담 등을 매섭게 비판했다.

지난해 10월 노인의 날 기념식에서 윤상현 대통령 정무특보와 김무성 대표가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문재인 대표가 바라보고 있다.

지난해 10월 노인의 날 기념식에서 윤상현 대통령 정무특보와 김무성 대표가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문재인 대표가 바라보고 있다.

재혼으로 권력자 사위에서 재벌 사위로
개인적 행운까지 뒤따랐다. 2010년 그는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장녀 신경아 대선그룹 상무와 재혼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사위에서 재벌가의 사위로 변신한 것이다. 덕분에 그는 재산공개에서 부인 몫 수백억 원이 늘었다. 권력과 돈을 한 손에 쥔 그의 재혼식은 성대했으며, 박근혜 대표도 참석했다.

2012년 재선에 성공한 윤상현은 박근혜 후보 경선 공보단장, 대통령 후보가 확정되자 수행단장을 맡으면서 확실한 ‘친박’으로 자리를 잡았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날개를 단 정치인이 됐다.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를 지냈고, 재선으로는 파격적으로 사무총장을 맡았다.

대통령을 사석에서 ‘누님’이라고 부르며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했을 때 “저 여기 있습니다”라며 악수를 하기 위해 밀치고 들어올 정도로 각별한 인연을 과시했다. 당시 정진석 국회 사무총장은 “윤 의원이 영접 프로토콜(의전)을 무시했다”면서 “다음부터는 함부로 들이대지 말고 국회 의전을 존중해 달라”는 경고까지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지적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는 ‘권력(정치·재벌)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야 성공한다’는 체험적 법칙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체험적 경험 덕분에 그는 확실한 실세로 자리잡았다. 대통령 특사와 대통령 정무특보까지 맡았다. 입법부 국회의원이 대통령 특보를 맡는 것은 사실 3권분립 정신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의 그에 대한 ‘애정’의 증거였다. 심지어 ‘차기는 윤상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세였다. 김진명의 소설 사드(THADD)에는 임기말 레임덕을 걱정한 박 대통령이 ‘세대교체 카드’로 그를 차기 대권주자로 지목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실세답게 강한 추진력도 평가받았다.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에 앞장섰고, 김무성 대선 불가론도 제기했다. 싹쓸이 공천학살로 나타난 이번 ‘대구 물갈이론’도 그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 최고 권력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선 거칠 것이 없었다. 강성이라는 비판도 두렵지 않았다. 이는 최고 권력자의 뜻이라면 당 대표에게 XX라고 하고, 죽여버리라고 막말을 할 수 있는 배경이다. 게다가 그는 ‘우지기관총을 들고 싸우자’고 할 정도로 매우 다혈질이다. 참지 못하고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에서 충돌조절장애로 본다.

윤상현의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이다. 매사에 열정을 다하는 그에게 걸맞은 좌우명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나 자신이 부단히 단련하며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는 곧 하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과정에서 보람과 성취의 감동을 느끼며 살아온 나의 삶의 자세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고백했다.(윤상현, <희망으로 가는 푸른 새벽길>, 2005)

그러나 치열하고 열정적인 그의 삶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무엇을 위한 치열함이고 열정이냐’는 것이다. 국민이 두루 잘살기 위한 치열함인가, 대한민국 민주주의 제도화를 위한 노력인가, 아니면 자신의 전공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열정이냐는 것이다. 그는 정치에서 치열한 과정만 나열했지 무엇을 위한 정치냐는 ‘대의’(大義)가 애매모호하다.

윤상현은 “정치는 끊임없이 성취해 가는 길”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도 그의 정치관이 드러난다. 무엇을 위해서라는 대목이 없는 것이다. 이 정의는 단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개인적 출세를 위해 ‘물불 안 가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그에게 매우 우호적인 소설을 쓴 김진명조차 권력·재벌과의 혼인을 통해 ‘기회주의자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인식돼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권력자를 통한, 권력자를 위한, 권력의 정치가 가지는 한계를 최고 권력자의 사위 시절 절감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무엇)를 위해서 정치를 할 것인가’라는 이타적 대의, 즉 정치를 하는 명분부터 세우는 것이 아닐까.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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