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년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 “권위주의 극복 못하는 영원한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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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일 박근혜 대통령은 테러방지법을 원안대로 관철시켰다. 국가정보원은 오랜 숙원을 이뤄냈다.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요청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몽니’가 한동안 골칫거리였지만 막판 직권상정 역할을 충실히 해줬다. 야당은 내부적으로 분당 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된 데다, 모처럼 얻은 필리버스터 정국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이제 국회는 직권상정의 요건인 ‘전시·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여부를 놓고 헌법재판소의 심리 대상이 되는, 말 그대로 국가의 3권이 심판대 위에서 싸우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그래도 국회를 옹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대 국회는 사실상 끝났고 모두 4월 총선의 격전지로 달려나갈 것이다. 헌재에서 싸우든 말든 당장 국회의원 자신의 당선이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박 대통령의 완승이다. 이번 테러방지법 국회 통과의 실무작업은 해당 부서인 국정원이 했겠지만, 앞장서 관철시킨 사람은 청와대 박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일 수 있다. 임기 4년차를 맞는 청와대가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 이 법안을 밀어붙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대목에서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라는 인물이 부각된다. 대통령비서실의 업무는 대통령 권력이 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한 치의 누수 없이 유지되도록 하는 일이다. 청와대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굴복시키고, 정의화 국회의장의 마음을 돌리게 해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킨 것도 모두 이 연장선이다. 앞으로 4·13 총선에서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비박·반박세력을 정리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미 야당에서 ‘테러방지법 제정은 장기집권 기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통령의 퇴임 후 스케줄 역시 이 실장이 고민해야 할 업무다. 따라서 취임 1년을 맞는 이 실장은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취임 1년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 “권위주의 극복 못하는 영원한 비서”

충남 홍성 출신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
이 실장의 출신은 인터넷 포털에 ‘서울’로 돼 있지만 실제는 충남 홍성이다. 충청포럼 회장으로 자살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성완종 리스트’에 이완구 총리보다 앞서 그의 이름이 명시돼 있는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홍성읍 옥암리 출신으로 1953년 홍성초등학교 49회로 입학해 3학년까지 다니다 서울로 전학, 1960년 서울 강남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친은 대학교 교수였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 그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한 중랑천에 잠기는 서울 노원구 판잣집에서 살면서 그는 입주과외로 경복고·서울대 외교학과를 마쳤다. 그는 고교 시절 영어회화 클럽에서 경기고 출신의 김근태를 만나 교류했다. 그 인연으로 1985년 정권 퇴진운동을 벌이다 구속된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간청해 3년 만에 석방시킨 비화를 가지고 있다.

그는 1974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1978년 주제네바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외교관을 시작했지만, 3년 만인 1981년 노태우 정무2장관 비서관으로 진로를 바꿨다. 모두 ‘선망하는’ 외교공무원 생활을 접고 행정비서로 전직한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다. 그는 노 장관 비서관을 시작으로 노태우 대통령 의전수석까지 계속 ‘노태우 비서’로 11년 6개월을 보냈다. 따라서 그를 키운 사람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사람의 비서를 10년 넘게 한다는 것은 그가 ‘천부적인 비서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노태우 사람이면서도 YS정부에서 안기부장 2특보를 시작으로 국내 정치를 총괄하는 2차장까지 지낼 수 있던 것은 바로 ‘경복고 인맥’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YS의 차남으로 ‘황태자’로 통하던 김현철씨의 경복고 인맥은 이때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는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시련기를 맞았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한 노동당 황장엽 비서 망명에서 시작해 흑금성 사건, 재미교포 사업가 윤홍준이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이 김대중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일련의 ‘북풍 공작’이 이어진 것이다. 이것은 국가 정보기관의 대선 개입 망령이 재연된 사건이다. 그는 “검찰 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기소되지 않은 이유는 선거 전부터 정치에 관여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실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에는 “1997년 당시 안기부 2차장으로서 ‘아말렉 작전’에 대해서만 검찰 수사를 통해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나머지 ‘오대산 공작’, ‘흑금성 사건’… 등 일련의 ‘북풍사건’에 관여했다는 의혹까지도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자신과는 무관하다며 불성실한 답변으로 일관했다”고 밝히고 있다.(국가정보원장 후보자(이병기)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국회 정보위원회, 2014.7.9)

그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정치특보로 활동하면서 민주당 경선에서 떨어진 이인제 의원을 영입하기 위해 ‘차떼기한 돈’ 5억원을 전달했다. 그는 이때 사무총장의 지시에 따라 단순히 전달 역할만 했다는 혐의로 비교적 가벼운 1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해 누차 “잘못했고 사죄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봄 박근혜 대통령과 이병기 비서실장 등이 청와대 녹지원을 걷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봄 박근혜 대통령과 이병기 비서실장 등이 청와대 녹지원을 걷고 있다. / 연합뉴스

외교관에서 ‘노태우 비서’로 변신
그는 2004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외교·안보 관련 자문을 하면서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서 본격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2013년 5월 일본대사, 2014년 7월 국가정보원장을 거쳐 2015년 3월 현직에 이르기까지 초고속 출세의 길을 달린 것이다.

보통 대통령비서실장은 초기에 각 부처를 장악해 대통령의 친정체계를 확립하고, 국정 조정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다가 퇴임 준비라는 업무곡선을 그린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관료 출신의 초대 허태열 실장이 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물러났다. 후임으로 김기춘 실장은 공안검사 출신답게 ‘공안정치’를 통해 국정의 컨트롤타워를 확실히 장악했다. 그러나 김 실장은 청와대 독주와 계속된 인사난맥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임명권자의 의지가 더 문제였다. 아마 박 대통령은 김 실장의 개인사정만 없었다면 계속 있어 주길 바랐을 것이다.

후임 이병기 비서실장의 발탁은 매우 적절했다. 이 실장은 박 대통령의 개인적 호감은 물론 정무적 감각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인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흔히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은 소리가 나게 일하는 스타일이고, 법조인 출신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하는 스타일, 교수 출신은 회의를 많이 하는 스타일, 외교관은 조용히 매끄럽게 마무리하는 스타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이어서인지 이런 매끈한 스타일을 선호한다.

그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됐을 때 여야는 물론이고 언론이 주문했던 것은 바로 ‘소통’이었다. 국민과의 소통은 물론 여당과의 소통도 시급했다. 이는 전임 김 실장의 ‘청와대 독주’에 대한 반감이었다. 당시 주문을 보면 ‘청와대와 국민·여당·야당과 소통’과 ‘청와대 위주의 국정 조율보다 당 중심의 정책 협의와 국정 조정 활성화’였다. 2015년 2월 27일 이 실장은 임명 직후 “대통령과 국민들께서 지금 저에게 기대하시는 주요 덕목이 소통이라는 것을 저는 잘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실장 체제가 1년이 지난 지금, 청와대의 소통은 그 전보다 원활해졌을까. 국민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여당인 새누리당과의 소통도 원활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의 대통령비서실장 1년 동안 계속된 김무성 대표와의 공개적 갈등은 물론 노골적인 유승민 원내대표 찍어내리기, 지난해 현기환 정무수석의 정 국회의장 ‘겁박’ 사건, 김종인 야당 대표의 생일 축하난 거부 등 청와대의 불통 정도는 오히려 심화됐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당 중심의 정책 협의와 국정 조정은 고사하고 청와대가 당의 고유업무인 공천에까지 공공연히 개입하고 있다.

그가 청와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급기야 지난해 7월 3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는 그의 ‘청와대 내 왕따설’이 불거져 나왔다. 한 야당 의원은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등 핵심비서관 3인방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 독대도 못하고 있다”고 공박받았다. 이에 그는 “언제든지 독대할 수 있고 무슨 보고라도 드릴 수 있다”고 왕따설을 부인했다.

소통 문제는 ‘대통령 고유 리더십 문제’라고 치더라도 국정 조정의 사령탑 역할은 잘하고 있을까. 청와대는 매일 수십·수백 가지의 국가정책이 논의되고 조정된다. 그 중 이 실장의 주특기라는 외교·안보 문제만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연거푸 외교의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외교 미숙함에 그의 역할 의문
최근 사안만 보더라도 지난해 12월 28일 국민 감정을 폭발시킨 한·일 간 종군위안부 타결 문제부터 그렇다. 주일대사를 지냈으면 이 문제가 한·일 간 어떤 역사적 갈등을 일으켰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국정원 경험에 비추어 한·일문제는 정무적 판단은 물론 민심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야 했다. 그런데 10억 엔에 ‘최종적이며 불가역적’ 합의를 털컥 해버린 것이다. 일본에서는 박근혜·아베(安倍晋三)의 전화 정상회담 내용을 공개하며 소녀상까지 철거하기로 했다고 했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외교는 우리의 통일정책과 안보, 그리고 통상문제까지 연결되는 복잡한 문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1월 21일 외교·안보부처 업무보고에서 ‘뜬금없이’ 교착상태에 있는 6자(한국·북한·미국·일본·중국·러시아) 회담 대신 북한을 뺀 5자회담 얘기를 꺼냈다. 이 제안에 대해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통일부 직원들이라면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고 혹평할 정도다. 충분한 검토 없이 발설한 사드(THAAD) 배치나, 갑작스런 개성공단 폐쇄는 ‘판단 미스’의 대표적 사례다.

이 실장은 자신의 역할을 못하는 것일까, 안 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일까. 사안마다 다르겠지만 이 실장은 아예 임명권자의 의지에 자신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인이 아무리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보통사람’ 이미지를 만들고 소통의 명수라 하더라도, 당장 눈앞의 임명권자가 권위적이면 비서도 그렇게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비서의 운명이다. 아예 본인 스스로 지금의 권위적 국정운영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만족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비서의 첫 번째 조건인 ‘임명권자의 의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그리고 ‘그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여기서 자신의 주관과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아마 이 실장은 박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청와대 비서실장 3년은 별로 오래하는 것도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정기간 2년을 제외한 대통령 재임 16년 동안 비서실장을 단 3명만 기용했다. 이후락 실장이 6년, 김정렬 실장이 9년, 마지막 김계원 실장은 불과 1년도 안 돼 10·26을 맞았다. 부친의 정치적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박 대통령으로서 비서실장을 자주 바꿀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실장은 나중에 현직을 명예롭게 평가받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의 ‘비서관(觀)’을 바꿔야 한다. 대통령비서실장이라는 임무는 지금까지 그가 맡았던, 여타 비서관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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