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끝까지 듣지 못한 ‘세월호 추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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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직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제주도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추모하는 연주회를 했다. 그 영상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성악가 147명이 추모곡 ‘내 영혼 바람되어’를 부른 영상도, 먹먹하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인터넷의 지도 서비스로 살펴보니 어지간하면 금세 도착할 듯싶었다. 늘 길 위에서 살았고, 나름 길 찾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터였으므로, 해 저물기 전에는 찾지 않을까 싶었는데, 진짜 해가 떨어질 무렵에야 찾았다.

성수대교참사희생자위령탑!

이 장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위치상으로는 ‘성수대교 북단’이다. 그런데 이 성수대교 북단은 곧바로 질주하게 되는 고산자로와 비스듬히 끼어 들어와 질주하게 되는 동부간선도로,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북강변도로와 서울숲을 스치면서 용비교로 넘어가는 도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다.

이 장소가 추모의 장소로 정해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비록 접근하기 어렵다 해도 그날의 비극으로 인하여 영영 유예된 시간을 살게 된 유족들의 뜻이 있었을 것이며, 다른 장소가 이 비극의 공간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검토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양재동 시민의숲 한편에 세워진 ‘삼풍백화점참사위령탑’ 뒤로 휘날리는 태극기가 새삼 국가의 존재 이유를 생각케 한다. / 정윤수

서울 양재동 시민의숲 한편에 세워진 ‘삼풍백화점참사위령탑’ 뒤로 휘날리는 태극기가 새삼 국가의 존재 이유를 생각케 한다. / 정윤수

기본적으로 장소와 기억은 일치해야 한다. 그래서 ‘기억의 장소’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개인이든 집합이든 추상세계의 기억은 물리적인 공간, 즉 장소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첫사랑의 기억? 어렴풋하다. 그런데 함께 걷던 길이나 어두컴컴한 영화관 같은 장소을 떠올리면 기억이 동반하여 떠오른다. 집합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동창회에 갔을 때 사람들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 중 누군가가 특정한 장소를 언급할수록 그들 모두의 집합기억이 동시에 떠오른다.

연습하는 단원들도 울고 또 울었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지고, 장소가 달라지면 기억도 변이된다. 그런 이유로, 일반 사람들이 찾아와서 추모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이 성수대교 북단의 복잡한 램프들 사이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세워졌을 것이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찾아와서 추모하기에는 어렵다 할지라도 유가족 입장에서는 성수대교가 아닌 다른 장소가 위령의 장소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시 공무원으로 성수대교 참사 및 그 이후의 복구과정을 맡았던 조성린은 블로그에서 ‘성수대교 복구공사를 하기 위해 잔해가 있는 부분에 가서 하얀 꽃을 뿌릴 때는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고 쓰고 있다. 문제는 준공식을 하는데, 고귀한 생명이 한국형 발전주의와 관료주의로 다리가 붕괴된, 그런 참사의 복구와 준공식인데 여전히 관료적 행사가 압도했다는 것이다. 조성린에 따르면 “준공식 전날 밤에도 행사장에 의자를 놓아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 밤중에 의자를 놓았다 거두었다 하다가 다시 의자를 놓고 집엘 가니 한밤중이고. 세계적으로 관심이 있는 곳이니 귀빈들이 대거 참석하였는데 앉는 자리를 놓고 서로 시비를 하고. 테이프 절단을 하는 데도 서로 참여하겠다고 난리를 떨어 혼났다”고 한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 하나의 위령탑을 찾아간다. 양재동 시민의숲이다.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이 ‘시민의숲’은 중간에 작은 도로가 하나 나 있어서 두 구역으로 분리된다. 좀 더 규모가 큰 북쪽으로 육중한 규모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다. 남쪽으로 작은 도로를 건너면, 북쪽 구역보다는 규모가 작은데 세 개의 위령탑이 서 있다. 가장 먼저 유격백마부대충혼탑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평북 정주군과 박천군 일대에서 치안활동을 벌이던 청년들과 오산학교 학생들 2600여명으로 이뤄진, 군번도 계급도 없이 무려 552명이 전사한 비정규군이다. 그 뒤로 1988년 김현희에 의하여 피폭된 대한항공 858기 희생자 위령탑이 서 있다. 1990년 4월 조성된 곳으로, 기단 지하에 희생자의 유물 69점이 안장되고 탑 뒷면에 희생자 11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 희생자 유가족회가 걸어둔 플랜카드. / 정윤수

성수대교 붕괴사고 희생자 유가족회가 걸어둔 플랜카드. / 정윤수

“팽목항은 문학에서도 그라운드 제로”
그 ‘기억의 장소’들을 지나가면 삼풍백화점참사위령탑이 보인다. 1995년 6월 29일의 비극으로 무려 502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고 937명이 부상당한 국가적 재난이다. 원래 유가족 측은 서초동 참사 부지에 위령탑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고 1년여 만에 미원건설에 매각되어 사유지가 됨으로써 서울시와 서초구는 다른 장소를 물색하여 이에 조성된 것이다.

각각의 충혼탑과 위령탑이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애틋한 것이라서 건조하게 말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왜 이 기념관과 충혼탑과 위령탑이 저마다의 장소들을 떠나서 이 ‘시민의숲’ 안에 배치되어 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그 조형감각 역시 전형적인 국가주의 양상인데, 단순히 외형상 국가주의 양상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각각이 민족이나 국가와 연관된 사건이요 비극이지만, 그 세부 사실에 있어 민족의 의미, 국가의 역할 또는 그 책임은 전혀 다른 것이기에 단지 외부 조형적 의미의 추모와 기도와 위령의 형식만으로 이 기념관과 조형물들이 저마다의 기억을 저마다의 내용에 맞게 저마다의 격렬한 감정을 품고 서 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장소를 떠난 기억이 오래된 조형 양식으로 재구성되면서 각각의 역사적 사실과 진실, 그 의미와 책임보다는 ‘추모’ 그 자체의 형식으로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이 충혼과 위령의 유가족과 관계자들로서는 바로 이 형식적 장소에서라도 그들 마음속의 슬픔과 애통함을 위로할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시민의숲’을 산책하는 시민들이나 자동차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 형식적 조형물들은 각각이 하고 싶은 마음속의 진짜 이야기를 다 들려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시민의숲이 끝나는 지점 위로, 양재천 위로, 거대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실은, 이제 그 비극이 2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몇 마디를 쓰려고 한 까닭이다. 안산이나 진도를 다시 가보기 전에 현실로서나 의미로서나 국가에 엄정한 귀책사유가 있는 성수대교 참사와 삼풍백화점 참사의 ‘기억방식’을 찾아본 이유 말이다.

나는 국가적 재난과 연관된 추모곡들을 찾아 들었다. 저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참사들과 관련된 ‘추모곡’들은 전형적이었다. 그 재난의 본질과 그 비극의 격렬한 핵심에 다가가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곡들이었다.

세월호 이후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독촉한다고 만들어지는 일이 아니다. 요즘 같아서는 나서서 하겠다고 하면 당국의 사찰을 받는 지경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다음의 사례는 귀하다. 비극 직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제주도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추모하는 연주회를 했다. 그 영상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성악가 147명이 추모곡 ‘내 영혼 바람되어’를 부른 영상도, 먹먹하다. 임형주의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박정은의 ‘엄마 미안해’, 김창완의 ‘노란 리본’ 같은 노래들도 무거운 마음으로,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겨우겨우 플레이 버튼을 누르게 된다. 어떤 노래들은 차마 끝까지 다 듣지도 못하게 된다. 김창완이 1986년에 발표한 노래 ‘안녕’도, 누군가의 애틋한 마음에 의하여 세월호 추모 영상에 쓰였는데, 진실로 끝까지 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2015년 4월 21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서는 이건용의 칸타타 ‘정의가 너희를 위로하리라’가 불리어졌다. 단원들은 4개월 동안 이 노래를 연습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엄마,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엄마 자신을 위해서 우세요/ 아빠,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저 비정하고 잔인한 날들과/ 비굴한 거리를 위해서 우세요/ 알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는/ 엄마 아빠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세요/ 증오와 광기와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세요/ 우리는 살아 있어요.”

참사의 기억, 그리고 장소. 이런 일들이 관습적인 방식으로 귀결되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의 연장이요 참담한 사건의 연속이다. 장소를 기억함으로써 기억을 장소화해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문학을 일별해 보면 팽목항이 문학에 대해서도 그라운드 제로라는 사실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세월호를 다룰 때, 언어는 시가 되지 못하고 소설은 차라리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면서 “국가나 법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로 재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SNS를 통해, 전반적으로 김형중의 고뇌에 찬 제안에 동의하면서도 “새로운 언어나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세월호’와 ‘세월호 이후’가 왜 문제적 상황이고, 그 문제적 상황은 어떤 상상력과 실천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를 끝없이 묻는 태도”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이여!, 이제부터는 하루하루가 그라운드 제로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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