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김중배 “박근혜 정권은 ‘만성 쿠데타’를 하고 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다른 직종보다 상명하복이 분명한 기자 세계에서 선배, 그것도 대선배를 ‘취재대상’으로 삼는 것은 대단한 ‘불경’이다. 몇몇 언론전문지를 통해 후배가 선배를, 또 선배가 후배를 대상으로 해 쓴 글이 실리기는 했다. 하지만 일반 매체에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대선배를 탐구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렵다. 기자는 대선배로부터 직언(直言)을 듣는다는 생각으로 만났다.

언론인 김중배 선배는 1957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해 평생 용기 있게 글을 쓰는 ‘직필’(直筆)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정년퇴직을 목전에 둔 기자가 20대 시절 ‘김중배 칼럼’을 읽으며 쓰린 속을 달랬던 기억이 새롭다. 김 선배는 직필을 하면서도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 성찰하는 부끄러움을 아는 기자로 살았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영향력 있는 언론인’, ‘가장 존경하는 기자’의 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꼽혔다.

오랫동안 ‘가장 존경하는 기자’로 꼽혀
김 선배는 “인물탐구는 자기가 그냥 쓰면 되는 것인데, 허허 뭘 만나 인터뷰는…”이라며 자리에 앉았다. 김 선배는 올해 여든셋이다. 그래도 이곳저곳 다니면서 하는 일이 많다. “건강하시냐”는 의례적 질문에 너무 진지한 답변이 돌아온다.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에 의하면 건강은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건강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많이 아프다, 정신이 아프고, 특히 사회적으로 아프다. 허~허~. 그런 WHO 기준에서 보면 나는 건강하지 않다. 인사치레로 묻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돌아다니고 소주 한 잔 마시고, 그리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면 건강한 것으로 간주하더라. 허~허~허.”

역시 김 선배의 ‘단수’는 기자보다 몇 차원 높다. 김 선배와 술에 얽힌 ‘낭만’은 ‘술이 곧 미디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언론계에서 신화적이다. 그는 과거보다 술을 많이 줄였지만, 요즘에도 후배들이 건네는 소주 몇 잔은 사양하지 않는다. 지난 연말, 기자는 한 송년모임에서 김 선배를 뵈었다. 그때도 점퍼 차림에 후배들과 어울려 소주에 족발을 맛있게 드셨다. 그리고 후배들에 대한 당부 말로 열정(패션)이라는 말을 했다.

올해 여든셋의 김중배 선생은 지금도 각종 시민사회·언론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올해 여든셋의 김중배 선생은 지금도 각종 시민사회·언론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후배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주마가편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잔인하잖아. 나는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패션(열정)의 어원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에 오를 때까지, 그 고통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다음, 부활했잖아. 이만큼 고통을 겪었으면, 열정을 불살랐으면 (부활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지 않겠나, 뭐 그런 기대에서 말한 것이지.”

기자는 한 15년 전인가 프레스센터 앞에서 “앞으로 언론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최우선 과제”라는 김 선배의 연설을 들은 기억이 있다. 김 선배는 “그 말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그만두고 사직하고 나올 때 고별사에서 한 말”이라며 “어쩌면 정치권력보다 더 영구함을 가진 자본권력에 대한 경고였다”고 말했다. 김 선배는 1990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임명되고 1년여를 하다 자본의 편집권 침해에 항거해 사표를 제출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3년 김 선배는 <한겨레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 복귀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1년에는 <문화방송> 사장을 지냈다. 이때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에서 해직기자라는 용어가 다시 나타나더니, 박근혜 정권에서는 법원의 복직 판결도 거부하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언론환경이 다시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해야 하는 시절로 회귀해버린 것이다.

김 선배는 자신은 경제에 문외한이라는 점을 전제하면서 “정경유착과 시장만능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이 사회, 이 국가의 어떤 이념보다 상위개념이 되어버렸다”면서 “IMF 사태 때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처방을 실험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DJ(김대중 대통령) 이후 공고화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세계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있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신자유주의로 매진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자본의 편집권 침해에 항거해 사표 제출
권력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공영언론이나 자본권력에 직접 매어 있는 언론사 사주는 그렇다 하더라도, 요즘에는 기자마저 시시비비를 가려 진실을 찾기보다 기계적 중립 뒤에 숨어 안주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그러다 보니 세월호 참사 때에는 기자들에게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허허, 요즘은 기계적 중립도 무너졌어. 종편은 물론 KBS나 MBC가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고 보나. 안 지킨다. 근자의 행태를 보면 대통령이 노동관계법 가두서명을 하니 20만명이 서명했다고 난리를 치며 보도하더라. 그런데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시민 600만명이 자발적으로 서명했다. 그런데 보도하지 않았다. 보라, 언론의 기계적 중립도 무너졌다.”

김 선배는 이 대목에서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까스로 만들어진 세월호 특위도 시행령으로 무력화하고, 온갖 조사활동을 방해하고, 이건 헌법 위반이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원칙과 신뢰, 법치를 말했지만 이젠 안 한다. 차마 못하겠지. 노동관계법 가두서명 그것도 헌정질서 파괴다. 그렇지 않나? 이것은 일종의 쿠데타 행위다. 쿠데타는 꼭 총만 들어서 하는 게 아니다.”

만성 쿠데타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전교조 법외노조화에서 시작해 통합진보당 해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관계법 가두서명까지 보면 이것은 헌법정신 무력화, 역사 쿠데타, 노동 쿠데타다. 5·16이나 12·12처럼 꼭 총칼을 들어 급작스럽게 해야 쿠데타가 아니다. 마치 연탄가스 중독과 같은 쿠데타, 만성 쿠데타다.”

아버지 시대와 지금의 쿠데다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현업 종사자들의 멘탈리티도 달라졌다. 그때는 유신압제가 있었지만 기자들은 ‘보도해야 하는데 못했다. 언젠가는 보도해야 한다’는 자책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그것에 공감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지만 극소수였다. 그런데 지금 대량전달매체의 내부 종사자들은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들어보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기자들이 자기 합리화를 넘어 자기확신하는 분위기도 있다.
“글을 보면 글에 나타나는 뉘앙스나 느낌이 있다. 그런데 ‘확신’을 갖고 쓰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띈다. 더러 후배들에게 (글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다, 그럼 ‘그 친구 확신을 갖고 쓴다’고 하더라.”

그런 사람만 꼭 집어 청와대로 불러 쓰니 그런 것 아닐까요.
“허허허. 이것 심상치 않다. 대통령이 자기가 해결해야 할 것을 거리로 나와 서명한다? 이는 홍위병적·문화혁명적 발상이다. 중국 문화혁명과 굉장히 닮은 데가 있다. 나는 이 추이를 유심히 보고 있다. 마오의 문화대혁명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그 짓을 하고 있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전화가 왔다. 후배가 자신의 단체 고문직을 맡아 달라는 전화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 얘기가 나왔으니, 이명박 정권에서는 과학(토목)이 정략화되더니 박근혜 정부에선 자식 잃은 모정인 세월호마저 정략화되고 말았다. 김 선배는 이 원인을 신자유주의의 폐해에서 찾는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300여명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아이들이 배에서 죽어가는 순간을 계속 목격한 전무후무한 체험을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소득만 차별화하는 것 아니라 슬픔, 고통, 죽음까지 차별화한다.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김 선배는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농민 백남기씨 사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김 선배는 1987년 남영동 치안분실에서 서울대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죽자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는 명칼럼을 썼다.(<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2014년 12월 2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에 김중배 선생 (왼쪽에서 네 번째)이 시민·사회단체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2014년 12월 2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에 김중배 선생 (왼쪽에서 네 번째)이 시민·사회단체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어려운 시기, 기자들은 잘하고 있나”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백남기씨가 쓰러진 시청 앞 민중총궐기 현장에 황망하면서도 노기에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사경을 헤매는데 (대통령은 물론 가해자마저) 한 번도 가보지 않지 않느냐. 기본적인 인간의 삶과 죽음, 아픔까지 차별화하는 시대”라고 한탄했다. 노동개혁이라는 것도 (실은 노동개악이지만) 그 발상의 밑바탕에는 차별이라는 말 대신에 ‘저성과자’라는 표현으로 차별을 일반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여당이 치밀하게 만성적 쿠데타를 하는데, 이를 막아야 할 야당은 분열되고 있다. 현 정치상황에 대한 견해가 궁금했다.

“박영선 의원은 MBC에서 같이 있었고, 경제 쪽으로 일을 잘했던 기자인데, 그가 ‘야당이 중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압도적이다’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더불어민주당이 그렇게 좌파정당인가. 더불어민주당이 그렇게 진보인가. 낡은 진보라고 하는데, 더민주가 진보를 해보기나 했나? 상당수 정치학자는 진보정당이 없는 지금 보수양당제가 문제라고 하지 않나. (안철수의) 중도정당이 필요한 것이냐?”

김 선배는 지난번 통합진보당 해산을 막기 위한 원탁회의를 제안하는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노력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물론 언론도 합세해 만든 종북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야당도 통일문제를 말하지 않고, 진보정의당은 아예 ‘진보’자를 떼어버렸다. 이제 진보의 한 축인 통일이라는 화두는 ‘통일대박’이라는 구호로 보수세력의 정략적 담론이 되어버렸다.

“헌법재판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방청을 했다.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마지막 변론 때 독일에서 50년 전에 나왔던 방어적 민주주의 어쩌구 하는데 참…. 그런데 헌재 재판관들의 8대 1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까지 생각을 못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사회는 훨씬 다른 길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이 대목에서 뭐라 확신에 찬 말을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생각보다 지금 사회가 훨씬 보수·반동화됐기 때문일까. 그는 1958~59년 이승만 정권의 진보당 해산과 죽산 조봉암 사형을 일선에서 취재했다. <한국일보> 법조기자로 죽산 사형을 특종보도한 그는 장기영 사장으로부터 특종상까지 받았다.(그는 특종상 상금으로 동료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신 ‘병아리 기자’ 시절의 철없음을 반성하기도 했다.)

김 선배는 지금도 활발히 언론·시민운동에 참가하고 있다. 언론광장 대표,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이고, 참여연대·민주행동·4·16연대·6월 민주포럼·자유언론실천재단 고문을 맡고 있다. <뉴스타파>의 준이사회 성격인 99%위원회 위원장으로 일주일에 한 번 회의에 참여하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운영하는 참언론아카데미 원장을 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에도 후배들이 고문을 맡아 달라고 찾아와 거의 떼를 쓴다. 그러자 “고문도 무슨 전문직이냐”며 “활동이라기보다 그냥 그러고 다니는 것이지”라면서 허허 웃는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 기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아닌 조언을 구했다.

“각자도생하라고 말하기도 무책임하고, 싸우라고 말하기도 뭐하고…. 지금은 인류문명의 대전환기라고 생각해. 특히 미디어와 테크놀러지의 만남을 잘 보면서 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봤으면 해. 간곡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한병철 교수가 쓴 <에로스의 종말>을 보면 지금 타자(他者)에 대한 에로스가 소멸하고 있어. 거창하지 않더라도 이럴 때 미디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동물을 보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료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그것이 소통·언어의 시원이지.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기, 우리(기자)는 타자에 대한 에로스, 동료의 위험을 얼마나 알리고 있는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로 시작한 김 선배와의 인터뷰는 허름한 통술집에서 소주와 돼지목살로 이어졌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원희복의 인물탐구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