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순간에 작곡한 슬픈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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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의 곡 중에 ‘청춘’이 있다. 이 곡을 어떻게 작곡했던가. 실연이라도 한 것일까, 음독의 불길한 욕망에 사로잡힐 만한 충격의 상처를 입기라도 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가수 김창완은 드라마에도 곧잘 출연한다. 대체로 선한 역을 맡지만 더러 악역도 맡는다. 그 악역을 맡을 때, 나는 김창완의 어떤 이면을 느낀다. 때로는 섬뜩하다. 아침에 라디오 방송에서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따사롭게 들려주던 아저씨가 깊은 밤에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그렇다고 그 무슨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이런 게 아니라 흉중의 계략을 숨긴 채 아랫입술을 누르면서 일부러 어눌한 듯 말하는 순간, 그때 보이는 김창완의 눈매는 연기가 아니라 그의 또 다른 본질처럼 느껴진다.

아, 물론 이것은 사적인 인격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내게 어떤 근거가 있어 인격적 판단을 한단 말인가. 우리 모두가 보았던 김창완, 우리 모두가 들었던 김창완, 바로 그 공공의 예술가 김창완에게 드리워진 복합적인 그늘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가 되었든 음악이 되었든 그림이 되었든, 우리는 예술을 감상할 때 그것을 작가 개인의 생애사와 직결하여 더듬어보는 버릇이 있다.

김창완밴드가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새 정규앨범 3집 <용서>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 참석해 무대를 펼치고 있다. 세 번째 정규앨범 <용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과 공감하는 위로의 메시지를 담았다. / 이선명 인턴기자

김창완밴드가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새 정규앨범 3집 <용서>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 참석해 무대를 펼치고 있다. 세 번째 정규앨범 <용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과 공감하는 위로의 메시지를 담았다. / 이선명 인턴기자

베토벤의 중기 피아노 소나타에서 난청을 앓거나 연애에 실패하는 참담함을 떠올린다든지, 클림트의 화려한 우울이 묻어나는 황금빛 그림에서 그의 여성 편력을 짐작한다든지, 이중섭의 은지화에서 기계적으로 가족에 대한 애착만 골라내서 들여다 본다든지 한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작품을 보면 나른한 감상주의에 빠지고 만다. 예술가란 그저 실연을 하거나 생활난에 허덕이거나 그런 결핍을 연인과의 ‘비정상적’인 연애를 통해 그 무슨 구원을 받고자 했다는 식의 남루한 이야기만 번지게 된다.

시인 김사인이 팟캐스트 ‘詩詩한 다방’의 올해 첫 방송에서 김소월의 작품들을 두루 읊고 또 설명하면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쯤의 시인이라기보다는 조선의 한문 시가가 여전히 유력했던 때에 쓴, 상당히 실험적이고 급진적으로 처절한 시라고 설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컨대 시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1925년 12월,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다. 교과서 식으로 하면 ‘갈래는 서정시요 7·5조의 3음보’라고 하는 것은 이 시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지금으로 보면 영탄조의 서정시이지만 당대의 문학적 상황에서 보면 획기적인 실험과 비명이 뒤섞인 시다. 상당한 공부와 사유와 번득이는 감각이 빚어낸 결실이다.

물론 어떤 사건이나 인연이 일상의 다른 이유들보다 훨씬 강한 창작의 동기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외적 충격만으로 예술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평정한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득의작이 나올 수 있거니와, 어떤 상처나 결핍에 의해 주조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벼려지는 과정이나 시집이나 악보나 그림이라는 물질로 고착되어 당대의 시공간으로 운반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그 시대가 그 작품을 여러 겹의 시선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MBC 드라마 <떨리는 가슴>에 배우 최강희와 연기한 가수 김창완. / MBC 제공

MBC 드라마 <떨리는 가슴>에 배우 최강희와 연기한 가수 김창완. / MBC 제공

악역으로 출연한 김창완의 섬뜩한 눈빛
롤랑 바르트 같은 후기구조주의자의 ‘저자의 죽음’이나 신영복 선생의 유명한 독서지론, 즉 ‘저자는 죽고 독자들은 언제나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유명한 비유를 빌려 말하건대, 예술가 개인의 생애를 일단 ( )안에 넣어두고, 작품을 대하되, 더러 작품 외적인 호기심이 생기거나 작품 내적인 해석의 궁금증이 풀리지 않을 때, 그 ( )를 열고 작가의 생애를 참고 삼아 더듬어보는 것이 이롭다. 김소월은 가세가 기울고 사업에도 실패하고 친척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술에 의지하다가 서른세 살 나던 1934년 12월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으로 음독 자살하였는데, 냉정하게 말하여 이 비참한 요절을 지렛대 삼아 20대 초반의 시 ‘초혼’을 뒤집어 읽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만 참고가 될 뿐이다. 일본 유학파인 시인의 숙련된 공부와 천재적 감각이 당대의 삶 일반에 드리워진 비극적 정조를 묘파해낸 것이지, 미리 10여년 후의 자기 죽음을 소급하여 ‘예감’했다는 식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강은교 시인은 또 어떠한가. 1968년에 등단한 시인의 시들을 한 단어로 집약하면 ‘허무’가 된다. 거기에 덧말을 붙여 ‘허무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허무’라고 하면 시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안개처럼 드리워지는 삶의 무게이건만, 덧말을 붙여 ‘허무주의’라고 하면 시인이 그런 압력의 본질, 그 근원, 그 뿌리를 매만지고자 애착했음을 뜻한다. 여러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서 강은교 시인은 허무의 풍경, 허무주의의 힘을 묘사해 왔다.

그런데 시인이 스스로 몇 차례 썼으므로 감히 참조하건대, 일차적으로 그 상흔의 대부분은 본인의 쓰라린 경험들이었다. 27살 때 임신한 채로 뇌출혈로 쓰러져서 큰 수술을 하였고, 겨우 몸과 마음을 수습하였다가 다시 출혈이 있어 임신 7개월 반 만에 제왕절개를 하게 되고, 그리하여 태어난 쌍둥이 아이 중 하나는 이 세상의 빛을 고작 7개월밖에 보지 못하고 미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늘 생일 맞은 사람도 금세 슬픔 감정
그 후 시인은 달라졌다기보다는 깊어졌다. 원래 허무의 시인이었고, 큰일을 치르고 난 후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조건에서 오히려 병실의 장치들을 또렷하게 보기 시작했다. 훗날 시인은 산문 ‘투병기’에 “나에게도 사물의 양면이 중요해졌다. 살아있음이 지니는 기쁨과 슬픔, 그 양면성, 가장 허위로운 것 속의 진실, 목숨의 불확실, 가랑잎 같음, 순종…. 우리가 알고 있다면 진실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또 얼마나 모르고 있는 것인가”라고 썼다. 겉멋 들린 포즈의 허무가 아니라 진실로 삶과 죽음의 파르르 떨리는 순간들을 겪고 난 시인의 기록이다. 동시에 그런 일들로 인하여 도저히 다른 이는 쓰지 못할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도 했다.

그렇기는 해도, 강은교 시인이 바늘끝만한 사물이나 그 미세한 감각 속으로 파고들어가 이 현대적 삶의 복잡성과 비의를 보여줄 때, 그 시편들은 개인의 상처로부터 박리되어 동시대의 불안과 공포로, 사랑으로 번져간다. 그래서 놀랍고 또 무서운 시가 된다. 시인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서 이렇게 쓴다. “주전자를 가스불에 올려놓는다. 가스불을 켠다. 점화하는 순간, 파아란 불꽃이 주전자의 밑둥을 향하여 올라온다. 맹렬한 기세로 올라온다. 내가 꼭지를 틀자마자 저렇게 맹렬히 불붙다니… 기다리고 있었구나, 무엇인가 점화해주기를.”

아, 가수 김창완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다. 형제들과 함께 <산울림>으로 불렀던 노래들을 우리 모두 기억한다.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만 ‘테니스공’ 같은 탄성과 감각을 지닌 노래들이었고 실험작들이었다. 특히 <산울림 3집>은 옛날 LP 음반 식으로 표현하여 A면에 수록된 사이키델릭한 ‘내마음(내 마음은 황무지)’이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B면의 ‘그대는 이미 나’는 무려 18분38초에 달하는 대곡이다. 아시아 음악계를 주름잡는다는, 그래서 휘하의 모든 가수들과 작곡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이수만이나 박진영이나 양현석 같은 제작자들도 젊은 날 김창완의 실험과 대곡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김창완의 곡 중에 ‘청춘’이 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이렇게 시작하는 슬픈 곡이다. 오늘 생일을 맞은 사람도 이 곡을 들으면 금세 슬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 곡을 어떻게 작곡했던가. 실연이라도 한 것일까, 음독의 불길한 욕망에 사로잡힐 만한 충격의 상처를 입기라도 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김창완은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랑하는 결혼을 하고, 신혼살림을 꾸리고, 첫애가 태어나고, 그렇게 하여 집에서 돌잔치를 하게 되었는데, 부모님과 형제들이 다들 모여서 행복하게 웃으며 아이의 첫돌을 축하하던 그 아름다운 저녁에 김창완은 문득 기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작은 방에 가서 기타를 들고 거의 순간적으로 이 곡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슬픈 노래를 작곡하다니! “나를 두고 간님은 용서하겠지만 /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 정 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 정답던 옛 동산 찾는가.”

과연 천재적인 예술가는 일상의 빈 틈을 파고들어 한순간에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해 버린다. 내가 드라마에 출연한 악역 김창완의 눈빛에서 평소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그의 예술적 이면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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