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에 흐르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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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은 정확히 말하여 ‘응답하라 2016’이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음악이다. 그 시대의 노래들이 쉬지 않고 흐른다. 1월 첫 주 음원 차트 1위는 ‘세월이 가면’이었다.

모든 문화적 결실은 당대의 감수성이 흡착하여 빚어진 결과다. 그러니까 표층이 아니라 심층을 봐야 한다. 달리 말하여 감정 리얼리즘 혹은 정서적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이다. 네덜란드의 미디어 학자 이엔 앙의 개념이다.

이엔 앙은 28살 때 연구논문을 쓰면서 모든 학술논문 저자들이 그렇듯이 논문 주제의 과중한 압력을 피하기 위해 산책도 하고 수다도 떨고 그리고 텔레비전을 많이 봤다. 그때 그녀는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삶이 모든 장면마다 토출되는 <댈러스(Dallas)>를 봤다.

<댈러스>는 1978년 4월부터 1991년까지 13년간 방영된 드라마로, 미국 남부의 석유재벌 가문에 뒤엉켜붙은 사랑과 음모와 복수를 그린 작품이다. 미국 가족주의의 온화한 기운이 농장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홈드라마 <월튼네 사람들>로 큰 성공을 거둔 명프로듀서 리 리치가 정반대의 미국, 즉 대저택과 허영심, 화려한 요리와 색정, 최고급 자동차와 탐욕이 진흙처럼 엉겨붙게 만든 작품이다. 텍사스의 석유재벌 래리 해그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탐욕, 불륜, 갈등.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 YTN 화면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 YTN 화면

유럽의 각국은 물론 호주, 이스라엘, 터키, 인도네시아,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이전에 이미 드라마로 이 세계를 ‘세계화’했던 것이다. 이엔 앙은 네덜란드에서 <댈러스>를 봤다.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전 인구의 52%가 시청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녀의 의문은 왜 ‘내가 저 천박한 남근주의 드라마에 몰입되어 있나, 왜 저 ‘바보상자’ 속의 바보 같은 여자들의 운명에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나, 돈 많은 남자들에게 이용당하고 버림 받는 여자들이 질질 짜는 눈물에 쏙 빠지고 말았는가’였다.

그리고 이엔 앙은 간파했다. 아, 텔레비전의 표면에 흐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된 거구나. 그래서 책을 썼다. <댈러스 보기(Watching Dallas)>. 여기서 유명한 ‘정서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탄생한다. 시청자가 별 내용도 없는 드라마에 몰입한다는 것은 진짜 별 거 아닌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정서, 특히 배신과 슬픔 같은 격렬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감정에 정서적 일치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애틋한 노래, 이적의 ‘걱정말아요 그대’
예컨대 <삼시세끼-어촌편>. 요즘 먹방이 대세라고 하는데, 차승원과 유해진이 남도의 작은 섬 만재도에서 삼시 세끼를 해먹는 이 프로그램도 겉으로는 먹방이다. 그러나 일정 온도 이상으로 물이 끓어오르면 틀림없이 그 안에는 별도의 감정이 배어 있게 마련이다.

차승원과 유해진이 만재도에서 티격태격하면서 삼시 세끼를 해먹는 과정은 적어도 남성 시청자들에게는 빛바랜 유년의 추억으로 여행하는 길이다. 한탄강변에 텐트를 치고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던 추억, 하염없이 산길을 걷는 기억들 말이다. 그런 시간은 오래전에 흘러갔고, 요즘 아이들은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차줌마’니 ‘바깥어른’이니 하는 자막과 함께 그런 상실된 기억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먹방이되 먹방이 아닌 것이다. ‘브로맨스’라고 말해도 조금은 부족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삶의 한순간으로 이어지는 감정이다.

그래서 문화는, 특히 장르 기반의 문화는 그 표층이 아니라 심층을 들여다봐야 한다. 장안의 화제작 <응답하라 1988>은 더 말해 무엇하랴. 과연 덕선이는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인터넷은 ‘어남류 vs. 어남택’ 논쟁이다. 심지어 도롱뇽?이라는 극소수 의견도 있다.

가수 전인권의 2014년 8월 ‘2막 1장’ 앨범 발매용 공연 모습. / 연합뉴스

가수 전인권의 2014년 8월 ‘2막 1장’ 앨범 발매용 공연 모습. / 연합뉴스

이 드라마는 단순한 복고 취향의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오늘의 상처 난 삶에 바르는 연고다. 희망 없는 삶, 파탄난 삶, 모든 약속어음이 부도가 나버린 삶. 누구라도 지금 이 순간, 잠시 소원했던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반갑다기보다는 움찔할 것이다. 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낯선 전화는 그런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청년세대의 생활지표를 조사한 어느 조사를 보니 ‘급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항목에 대부분 부정적인 답을 썼다.

그런 상황에서 ‘응답하라 1988’을 보는 것이다. 아마도 꽤 많은 청년들은 덕선이가 엄마 심부름으로 언니 보라가 공부하는 고시원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심장이 울컥했을 것이다. 실제로 비좁은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이 장면을 본 청년들이 눈물을 가눌 수 없었다고 인터넷에 쓰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서로 도와주기라도 하지 않았는가. 돕는다고 해서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함께 놀아주고 대화하고 가만히 곁에 앉아 있어주는 것, 그것조차 지금은 점점 사라지는 풍경이 되고 있으니 <응답하라 1988>은 정확히 말하여 <응답하라 2016>이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음악이다. 그 시대의 노래들이 쉬지 않고 흐른다. 1월 첫 주 음원 차트 1위는 ‘세월이 가면’이었다. 덕선이가 언니의 비좁은 고시원에 들어서다 말고 울음을 터트리며 보라를 끌어안을 때 흐르던 바로 그 음악이다. 그밖에도 수많은 곡들이 음원 차트를 휩쓸었는데, 특이한 것은 20여년 전의 곡들을 오늘의 가수들이 애틋하게 리메이크했다는 점이다. 오혁의 ‘소녀’(이문세), 노을의 ‘함께’(김건모, 박정현), 걸스데이 소진의 ‘매일 그대와’(들국화), 김필의 ‘청춘’(김창완) 등이 두 세대를 아우른다.

그 중에서도 내 귀에 가장 많이 들리고 또 가장 애틋하게 들려온 노래는 이적이 부른 ‘걱정말아요 그대’다. 1990년대 전후의 노래는 아니고 전인권이 2004년 11월에 발표한 4집 앨범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의 타이틀 곡이다.

전인권은 무서운 사람이다. 그는 “내 삶의 어두운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무섭다. 겉모습이 무섭다는 게 아니다. 자기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실로 무서운 강자다. 거의 모든 악기를 최고 수준에서 연주하는 한상원과 함께한 1998년의 앨범에 수록된 노래 ‘떠나기 전에’를 들어보라. 거기서 전인권은 노래한다. “갈 길은 멀고 말은 자꾸 많아지고 / 내 어둠의 비밀 언제나 나는 알고 있었지.”

자기 삶의 어두운 비밀을 아는 전인권
말의 진실된 의미에서 전인권은 가객이다. 황석영의 단편 ‘가객’에 꼭 그런 자가 나온다. 단편의 주인공 이름은 수추(壽醜). 그가 노래를 부르면 길 가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앉고 짐승마저 기웃거린다고 황석영은 묘사했다. “그의 노래는 아늑하고 힘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정과 말할 수 없는 용기를 돋아나게 했다”고도 썼다. 그러나 추한 얼굴 때문에 동네에 스며들어 살지는 못한다. 고약한 녀석들은 노랫값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

마을사람들이 수추의 노래를 너무 좋아하게 되자 권력자는 그를 체포해 버린다. 수추는 노래를 부르겠노라 말한다. 권력자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맘껏 부르라고 한다. 그러나 수추는 자기 노래를 원하는 사람들 곁을 떠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권력자는 그를 가둬버렸고 굶겼는데, 그래도 계속 노래를 부르자 혀를 잘라 감나무에 매달아버렸다.
그랬는데도 노래는 흘러나왔다. 황석영은 쓴다. “수추는 목구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안으로 꽉 잠긴 노랫소리가 또 저자 바닥에 깊이깊이 스며들었고, 사람들은 몰래몰래 그것을 따라 불러 꿈만이 떠도는 밤에도 잠꼬대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결국 권력자는 수추의 목을 베어버린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한때 전인권의 노래는 수추에 이를 만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전인권이 그저 ‘추억의 가수’인가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격랑의 변방으로 눈을 돌리면 그곳에 전인권이 늘 서 있다. 그는 언제나 당대의 가객이었다. 방송에서 간청하면 나가서 부르기도 하는데, 대개는 그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꼭 가야만 되는 곳에 가서 노래를 부른다. ‘자기 삶의 어둠, 그 비밀을 아는 자’다. 그러니 이렇게 노래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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