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조국에서 하방된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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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지폐사건’ 연루 3·8선 넘다

3천만 동포에게 소(訴)함
1946년 5월 15일 공보국 특별발표로서 조선경찰 제1관구 경찰청장 장택상씨는 우리 두 사람을 300만원 이상의 지폐를 위조하야 ‘남조선 일대를 교란’한 사건에 관련되였다 발표하는 동시 우리 두 사람에게 ‘이미 체포장이 발포되여 있는 중’이라 발표하였고 동 발표는 다시 우리 ‘조선공산당’의 ‘간부’라고 지칭하였음으로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위하야 또한 해방조선의 책임을 맛터보는 조선경찰의 명예를 위하야 이 성명을 발표하는 바이다.

1. 우리는 이 사건이 전면적으로 허구임을 단연히 지적한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 두 사람이 이러한 범행에 관련하였다 하나 우리 두 사람은 전연 이러한 범행을 한 일이 없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 사건에 관련되였다 함은 이 시건이 전연 허위적 날조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둘째 범인이라 지칭된 박락종 이하 대부분의 동지는 그 평소의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하야 조선의 경제부흥을 위하야 헌신적 사업을 하였었다. 그럼으로 14인이 일당이 되여 이러한 추악한 범죄를 하였다 함이 둘째의 증거이며
셋째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위조지폐 300만원의 대부분을 위조하였다 하나 박락종씨가 조선정판사를 관리한 이래 지하실에는 일차도 인쇄기를 설치한 일이 업섯스며
넷째 동 발표는 조선은행권 평판을 조선은행으로부터 조선도서주식회사에 ‘이관중 행방불명’이 되였는데 ‘경찰에서는 분실되였든 평판 9개를 발견하였다’ 하였으나 이러한 평판은 조선정판사에서 발견된 일이 절무한 것.
이상이 증거로써 우리는 이 사건이 전연 허구인 것을 단언한다.

2. 그러면 이러한 허구의 사건이 웨 발표되였는가. 이것은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타락식히기 위하야 이런 정치적 모략 등의 책동에 의하야 발표되여진 것이다. 미소공위의 휴회를 계기하야 우익반동파는 백주에 테로단을 조직하야 공공연한 파괴를 감행하고 가두에서 공공연한 살인과 내란을 선동하고 언론자유를 악용하여 테로행동을 찬양선전하는 등 실로 무질서 혼란이 연발하여 서울의 물정은 참으로 소연한 바 있다. 이러한 반동파의 공세는 우리 해방의 최대의 은인의 하나인 쏘련방에 대한 반대와 조선공산당의 중상에 집중되고 있다. 이 허구 위조지폐 사건도 이 공격과 중상의 일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적 공격은 결코 우리당을 훼방치 못할 뿐 아니라 이 비열하고 타매할 반동파의 행동은 도리어 그들 자신의 묘혈을 판 데 불과할 것이니 이것은 불원한 시일 내에 이 사건이 허구인 것이 백일청천 하에 폭로될 수 있는 까닭이다.

3. 그러면 이 반동적 모략가들은 웨 이러한 비열한 위조지폐사건을 허구하야 우리를 공격하는가. 이것은 뚝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부 조직부장 이원재 등의 검거로써 참말 위조지폐사건이 발발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다. 이 참말 위조지폐사건은 우익 반동파에 한개의 추악한 범죄가 아닐 수 없으므로 이 범죄를 우리에게 전가하야 일석양조의 모략을 꾀함이 그 동기이다. 곳 우익반동파를 이 범죄에서 구출하고 우리들이 허구의 범죄 속에 모러너으랴는 음모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이 사실은 또한 불원한 시간 내로 동포 앞에 명백히 될 것이다.

4. 끗흐로 우리는 해방조선의 질서를 책임진 경찰이 참된 애국자와 정치적 모략배를 정확히 감별하여 일시적 지위와 일시적 명예로써 이러한 모략가들의 책동에 속지말고 새 나라의 명예와 건설과 발전을 위하야 정의와 진실에 입각하여 그 책임을 이행하기 바라는 성의에서다. 동포들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조선공산당이 이 반동파의 책동에 의하야 또한 우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인하야 동포들에게 비록 일시적이나마 터럭끗만한 미혹이라도 받지 아니하기 위하야 이 성명을 발표하는 바이다.

1946년 5월 16일
이관술
권오직


조선공산당이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지폐를 위조했다고 알려진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을 다룬 기사. <경향신문>

조선공산당이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지폐를 위조했다고 알려진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을 다룬 기사. <경향신문>

<해방일보> 1946년 5월 18일치 맨 앞머리에 실려 있는 성명서이다. 성명서만이 아니다.

‘공당원이 지폐위조에 관련되였는 것이 사실인가-기자단의 질문에 박헌영 동지 답변’ ‘지폐위조사건에 관한 아당모해의 진상규명코저 이주하동무 장경찰부장 방문’ ‘괴(怪)! 뚝섬위폐사건을 발표하지 않는 이유?-장경찰부장과 기자와의 문답’ ‘위조지폐사건 진상조사로 각사회단체 궐기’ ‘공동조사위원 제군에게 고함’

2쪽 1장짜리 타블로이드판 신문 앞뒤가 온통 ‘위폐사건’ 본바탕을 밝히고 미군정과 그 손발인 경찰당국이 쳐놓은 올가미질을 까밝히는 기사로 뒤발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해방일보>는 문을 닫는다. 1945년 9월 19일 비롯하여 1946년 5월 18일까지 150호째를 내었을 때였다. <해방일보>가 들어 있던 조선공산당 진터를 빼앗겼던 것이다. 조선정판사 사장 박락종(朴洛鍾)과 서무과장 송언필(宋彦弼), 인쇄주임 신광범(辛光範), 창고주임 박상근(朴相根), 평판과장 김창선(金昌善), 평판부과장 정명환(鄭明煥), 평판직공 김상선(金商善)·김우용(金遇傭)·홍계훈(洪啓壎)이 잡혀갔고, 앵두장수가 되었던 이관술이 붙잡힌 것은 7월 4일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캄캄한 땅밑으로 들어가게 된 권오직(權五稷)은 1906년 경북 안동(安東)에서 태어났다. 34살 때 감옥에서 죽은 세찬 주의자 권오설 아우이다.

경북 안동 출생, 권오직의 아우
주의자들 가운데는 형제·남매·내외·부자·모자가 많았다. 김사국(金思國)·김사민(金思民) 형제, 박일병(朴一秉)·박순병(朴蕣秉) 형제, 김형선(金炯善)·김형윤(金炯潤)·김명시(金命時) 삼남매, 조두원(趙斗元)·조원숙(趙元淑) 남매, 박헌영(朴憲泳)·주세죽(朱世竹) 내외, 김단야(金丹冶)·고명자(高明子) 속내외, 양명(梁明)·조원숙 내외, 이재유(李載裕)·박진홍(朴鎭洪) 내외, 김태준(金台俊)·박진홍 내외, 김복진(金復鎭)·허하백(許河伯) 내외, 임원근(林元根)·허정숙(許貞叔) 내외, 최익한(崔益翰)·최재소(崔在韶)·최학소(崔學韶) 삼부자, 홍명희(洪命熹)·홍기문(洪起文) 부자, 정칠성(鄭七星)·이동수(李東樹) 모자… 같은 이들이 그렇다.

1923년부터 사회운동을 비롯한 권오직은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갔다. 같은해 고공청이 밀어주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갔다. 1929년 5월 공산대학을 나와 모스크바에 있는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고공청을 다시 얽이잡으라는 국제공산청년동맹 분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온 것이 29년 10월이었다. 11월 조선공산당 조직 준비위원회 선전부를 맡았다. 1030년 2월 3·1운동 11주년을 맞아 광주학생운동으로 들끓는 반일감정을 한군데로 모아 터뜨리고자 반일격문을 전국 청년·농민·노동두럭에 퍼뜨리다가 왜경에게 붙잡혔다.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1940년 12월 징역 8년을 받아 12년간 징역살이를 하다가 8·15를 맞아 감옥을 나왔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정치국원,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해방일보> 사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2월 19일 반박헌영 그룹 54명이 모여 당내 파벌주의와 당사(黨史), 곧 조선공산주의운동 정통성문제를 따지고 들 때였다.

중국 대사 역임하다 협동농장으로

정판사위조지폐사건 공판 모습. 피고인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경향신문>

정판사위조지폐사건 공판 모습. 피고인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경향신문>

“요전에 경북에 갔을 때 도 간부들과 모든 문제를 토의했었다. 당시 지방동무들이 중앙동무들보다 각종 정보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닌 늣김이 있었다. 당의 노선대로 나가면 모-든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해외에 각종 문서가 도라다니는 것을 시정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무원칙한 투쟁은 할 수 없다. 정말 당을 위해서 일하자는 의미에서 이 회합이 승인했다. 열성자대회라는 것은 부당하다. 당 통일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

모임 이름을 ‘열성자대회’로 하자는 김철수(金金洙) 말을 누르고 ‘중앙 급 지방동지 연석간담회’로 못박은 권오직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반박헌영 그룹을 가라앉힌다.

“1932년에 나올 때 국제노선을 가지고 나왔다. 그때 많은 동무들은 부로카 혹은 투기사로 많이 전락되였었다. 중심야도로가 다 체포되였슬시 꾸준한 투쟁을 하든 동지들의 심경을 생각할 때 탁류 중의 맑은샘이라고 한 것이지 지금까지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그때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알어야 한다.(…) 내 생각하기는 8·15 후 장안파 기타 동무들이 영도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고 박헌영 동무는 그때 국내에 있었다고 생각하지 안코 국외에서 온다고 믿엇다. 박헌영 동무가 10여 년 투쟁을 했는데 이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 동무에게 계동서 일임하자 안했는가. 현재 누구를 내세우겠는가. 지금 적과 싸워나가야 할 때 당사를 운위할 시기가 아니다. 동무들이 다같이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지마는 나는 다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재건동지들을 내세우고 통일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재건동지들이 기술적(수공업적) 오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당사를 말하는 것은 통일과 강화를 꾀하면서 더욱이 혈투를 앞에 놓고 논의할 때가 아니다. 동무들의 불평을 엇더케하야 해결하여 갈 것인가 문제이다. 엇더한 점이 견해가 다르다는 것은 토의할 것이다.”

이른바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이라는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허둥지둥하던 권오직은 3·8선을 넘어간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1950년 2월부터 1952년 1월까지 헝가리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사로 있었다. 1952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대사로 갔으나 1953년 8월 불려들어와 대사 자리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자리를 빼앗겼다. 남로당 숙청 후림불에 걸려든 것이었는데, 반당·반국가 파괴분자라는 까닭으로 평북 삭주에 있는 협동농장으로 하방(下放)되었다고 한다.

그때에 서울에서 움직였던 정치목대잡이들은 3·8선이 그렇게 오래 가리라고 내다보지 못하였다. 미·소 양군은 곧 물러갈 것이고 곧 남북일통이 될 것으로 보았다. 남로당 고갱이들은 평양에 있는 김일성 장군을 그렇게 높게 보지 않았다. 가장 짱짱한 적은 미군과 친일파두럭인 한민당이므로 그들과 싸워 이겨 권세자루만 잡으면 된다고 믿었다. 그렇게만 되면 북조선은 스스로 따라들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조선의 사북은 서울이었다. 평양은 지방이었다. 그런데 분단이 굳어지면서 평양은 서울에 딸린 지방이 아니었다. 찢겨진 한쪽 나라 서울이었고 그 서울을 목대잡는 것은 김일성이었다. 미국 몸받은이들이 다스리는 남조선 반공이데올로기에 쫓긴 남로당사람들은 평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북로당 사람들이 지어놓은 새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게 된 남로당 사람들이 쫓겨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니, 세계사 흐름을 올바르게 읽어내지 못한 남로당의 슬픈 이야기이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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