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앞장 볼세비키 혁명가 권오설 (하)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930년 서대문형무소 독방서 숨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이슬처럼 사라졌던 장소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 오늘날 많은 국민이 헌화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이슬처럼 사라졌던 장소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 오늘날 많은 국민이 헌화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서울운동장으로모히자
6월 1일!! 이날은 우리민족이 통일하야 왜적에 육박하든 날이다. 어떤계급 어떤당파를 물론하고 이날을 기념하야 모혀라!! 뭉처라!! 우리의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반동분자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 음모를 분쇄하자!!
노동자여!! 농민이여!! 시민이여!!
오라!! 서울운동장으로!! 들으라!! 우리 자주독립의길을!!
6·10투쟁기념시민대회

<해방일보> 1946년 6월 9일치 ‘사고’이다.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내놓은 사탕발림이 ‘문화통치’라는 야바위짓이었다. 조선인민이 바라는 것을 어느만큼 들어주는 듯한 탈박을 썼지만 그 속내는 식민지 꼭뒤누름을 더욱 다지르는 것이었다. 이런 셈평에서 일어난 것이 6·10운동이었다. 긴한목마다 박혀 있는 주의자들이 채잡는 가운데 여러 전문학교와 고보생들 미좇아 가며 노동자·농민·도시빈민 같은 아랫도리사람들이 외쳐대는 독립만세 소리에 경성시내 안이 온통 물끓듯 하였으니, 3·1운동 때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상해에 있던 김단야와 만나
주의자들은 3·1운동보다 6·10운동에 높은 값을 매긴다. 둘 다 허방친 운동이었으나 그 속내가 팔팔결로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선민족 대표라는 33인이 보여준 물렁물렁한 짓거리들에 꿈이 깨져서가 아니라, 인민대중의 끓어오르는 민족해방 마음을 얽이잡아 이끌어나갈 ‘전위당’이 없어 3·1운동이 허방쳤다고 보는 것이다. 광무황제 인산날 일어난 것이 3·1운동인데 이번에는 융희황제가 훙(薨)하였다. 일제의 끔찍한 억누름에 모였다 흩어졌다 한다지만 그들에게는 ‘당’이 있고 강철 같은 당헌·당규에 목숨을 맡긴 ‘당원동지들’이 있었다. 3·1운동을 채잡았던 종교두럭과 부르조아 및 소부르조아 인텔리 출신 민족주의자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때에 민족부르조아지들이 목을 매었던 것이 북미합중국 대통령 윌슨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쳐든 민족자결론이었는데, 허방 짚은 것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 강도나라들이 세계를 새롭게 찢어발기기 위한 쑹쑹이모임이 ‘파리강화회의’이고 제국주의 강도나라들이 그 가진 바 힘에 따라 작고 힘없는 나라들을 식민지로 나눠먹자는 다짐이 ‘민족자결론’이라는 것을 모르는 민족부르조아지였다.

하늘이 주신 이 좋은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부르짖은 사람은 상해로 달아나 있던 김단야와 김찬이었다.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 권오설이 김단야와 만난 것은 1926년 5월 1일, 압록강 건너 안동(安東)이었다.

“계급해방보다는 민족해방을 앞세워야 하오. 조선에 있는 우리 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기도 하니 말이외다. 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 투쟁에서 전위로 나서는 것은 그러므로 현계단에 있어 옳은 노선이 됩니다. 계급해방보다는 민족해방이 더 인민들한테 환대받는다 이런 말씀이지요. 전술적인 과정에서도 우리 당은 민족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 당에서 이번 인민봉기를 조직해서 그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이른바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호기가 될 것이오.”

김단야가 하는 말이었으니, 인산행렬이 지나가는 경성 울안과 온 조선 골골샅샅마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건네주는 것이 북경에서 박아왔다는 독립선언문과 다섯 가지 격문이었다. 김단야한테 글찍은 종이와 함께 운동밑천 1000엔을 받아 경성으로 돌아온 권오설은 고공청 맹원인 박래원(朴來遠)에게 인쇄를 맡겼다. 천도교 신파 목대잡이였던 춘암(春庵) 박인호(朴寅浩, 1855~1940) 조카였던 박래원이 한 말이다.

“삐라 인쇄 관계로 특별히 권동지와 밀접하였든 만큼 감회가 깊읍니다. 그때 인쇄방법은 내가 책임을 지고 양재식 민창식 등 출판노조 동지들과 같이 의논해서 일을 했는데 경계가 심해서 인쇄소에 마낄 수 없고 해서 본정(本町)에 있는 앵정(櫻町)출판기계상회에서 손기계 대소형 두 대를 사고 활자는 신문사 같은 각 출판관계 동지들한테 부탁해서 수집해 갖이고 했읍니다.”

<조선인민보> 1946년 6월 9~10일치에 실린 좌담회에 나온다. ‘찬란한 6·10만세 당시의 투쟁보’ ‘기억도 새로운 투사면면’ 좌담에 나온 사람은 홍덕유, 박래원, 양재식(楊在植), 이천진(李天眞), 조두원(趙斗元). 신문사에서는 편집주간 고재두(高在斗), 주필 임화(林和)와 기자 4명이 나왔다. 양재식이 말한다.

박래원 동지와 연락 삐라 인쇄

경북 안동에 있는 권오설 추모비와 안내문.

경북 안동에 있는 권오설 추모비와 안내문.

“그때 권오설 동지는 공청 책임자로 신의주사건에 관련이 있어서 해외로 망명하였다고 하고 숨어 있었는데 1926년 4월 5일 이왕(李王)의 서거를 계기로 여기 앉은 박래원 동지 외 몇 분과 연락하야 ‘이 시기에 절대로 이러서야 되것다. 일반민중에 반제혁명 의식을 고취하는 절호의 기회이니 이때 궐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하며 권동지가 주장하야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든 것입니다. 저는 그때 공청에 있었는데 민창식 동지 외 3인이 권과 연락하야 결의하고 비밀리에 격문 삐라 같은 것을 인쇄하기로 되었었읍니다. 실제 일을 한 것은 박래원 동지와 나와 민창식 기타 6,7인이 되였으며 얼른 안국정(安國町) 35번지에 옮겨서 일을 시작하였는데 주야로 박어야 약 2000매밖에 박지 못하는 손틀로 30만 장을 박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7만 매를 박는 과정에 소리가 나서 우리들은 광목을 사다 다다미질을 하기도 하고 고담(古談)을 소리 높이 읽기도 하며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느라고 애를 썼지만 급기야 그 안집에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함을 박는 것이라고 말하고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쇄물 운반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때 마침 송호(宋虎)의 재등(齋藤)총독 암살미수사건이 있어서 경찰의 신경이 날카로운 때라 갖다 둘 데가 마땅치 않었습니다. 생각다 못해서 차라리 그놈들이 제일 주목하는 천도교 지하실이 등하불명(燈下不明) 격으로 안전하다고 공론이 되어서 그곳으로 갔다 두기로 하고 사과궤짝에 넣고 못질을 해서 단단히 싸가지고 거리에 나가서 지게꾼을 한사람씩 사서 7만 매를 다 운반하여 손재기(孫在基)씨의 조력을 얻어 아까 말한 상해에서 온 삐라와 함께 10여만 장을 지하실에 넣어 두었든 것입니다. 그후에 또다시 민창식씨의 사랑방에서 수만 매를 더 박었는데 한 달 이상을 불면불휴(不眠不休)하였기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일단 중지하였읍니다. 다음에는 증거물을 없새는 방법이였는데 인쇄기 두 대는 그 마루 밑을 파고 뭏어놓고 활자는 녹여서 없새버렸는데 손씨 집에서 잘못하여 그만 그 삐라가 발각이 나서 먼저 박래원씨가 피검되고 나도 6월 5일 11시에 역시 잡혔든 것입니다.”
본사 “그때 그 삐라 내용은 어떠했든가요?”
양 “‘조선독립만세’ ‘조선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토지는 농민에게’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혁명가를 석방하라’ 등등이였지요.”
격문에는 공산주의사상이 없었고 조선공산당이라는 말도 없었다. 김단야가 준 것에만 이데올로기적인 냄새를 조금 풍길 뿐이었다. 조선에서 박아낸 격문에는 다만 조선독립과 반일구호로만 채워져 있었다.
“식민지 민족은 누구나 무산자다.”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요, 정치해방이 곧 경제해방이다.”
“우리 인민의 통곡과 복상(服喪)은 이척(李?)의 죽음이 아니고 경술년 이래 사무친 그 슬픔이다.”
‘불꽃사’ ‘대한독립당’ 따위 꾸며낸 두럭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리방으로 긁은’ 어느 격문에는 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김성수(金性洙) 같은 친일파들 이름이 박혀 있었다. 친일파들을 억판(곤궁)에 빠뜨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들 이름으로 된 격문이다.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여! 죽음을 걸고 싸우자.”
경성 서대문경찰서 경부 길야등장(吉野藤藏) 수기이다.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의 검거와 전모’.

상복 입고 피신하려는 찰라 붙잡혀
5. 거두(巨頭) 권오설의 체포
박래원을 체포하는 동시에 나는 6일 저물녘으로부터 박의 신문을 시작했다. 손재기 등의 공술로서 인쇄한 것을 부인하고 굳은 약속한 민창식의 이름을 내어 걸고,
“두 사람이 인쇄한 것이지 다른 놈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원고는?” “그것은 상해의 김찬이 집필한 것이다. 김모(평북 출신)가 비용 백원과 같이 가지고 온 때문에 하룻밤 자고, 이미 퇴선(退鮮)하였다”고 하였다.
“이놈, 거짓말 마라. 민창식은 인쇄는 3,4인이 하였고, 비용은 6백원 정도라고 한다. 제1 김찬의 문장이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또 김모가 왔다는 것은 민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김모라는 자는 아무데도 숙박한 행적이 없지 않은가?”
이때 박래원은 머리를 수그리고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나는 철야하면서 추구한즉 박의 번민은 점점 심하여지는 태도였다. 그리하여 7일 오전 10시에 겨우 입을 열었다.
“동지와 굳은 약속을 깨뜨리는 것은 죽기보다 괴롭다. 아니다. 죽기를 결심하였다. 실은 원고의 집필자는 권오설이요, 6백원도 권에게서 받았다.”
“무엇! 권오설! 그러면 권은 어디 있는가?”
“장사정(長沙町:목욕탕) 곁의 잡화상 집에 있다.” 이때 미소하였다. 오늘까지 이와 같은 낯을 보인 적이 없었다. 즉시 유(劉) 형사부장을 자동차로 보내었다. 그 중도 국장취체의 예행연습으로 통행금지를 겨우 허(許)하여 가지고 간일발(間一髮)의 곳에서, 만일에 일초라도 지체되었더라면 실패하였을 것이다. 잡화점 앞에 내리는 형사 일대, 바로 이때 잡화점으로 상복(喪服)에 백립(白笠)으로 낯을 가리고 나오는 것이다. 유형사부장은 소리쳤다. 돌아서는 남자.
“여, 유상, 오래간만이요, 어디로…”
어디까지나 태연한 태도를 취하는 권은 손을 내밀어 유부장에게 악수하였다. 입장이 딱한 유형사부장은 할 수 없이, “사실은 권상에게 일이 있어서.” 이 말에 대해여 추호도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다. 이에서 방안을 살펴본즉 고려공산당 간부 박민영(朴珉英)도 있었으므로 함께 동행하였다. 증거될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권오설 손에 쥐고 있는 책보자기를 헤쳐본즉 안동현 영운송점(安東縣 永運送店)의 발송의 하물인환증이 나타났다.
“이것은 무엇이요?”
“가재도구요.”
권오설은 신변이 위험함을 느끼고 상복을 하고 피신하려고 떠나는 길이었다. 개가를 부르는 형사의 일대는 권, 박을 데리고 귀서(歸署)하였다.

권오설이 징역 5년을 받은 것은 1928년 2월이었다. 왜경들 마음에 찰 때까지 빨래처럼 꼭꼭 비틀어 쥐어짜는 이른바 ‘예심’ 2년 동안 끔찍한 밥받이와 족대기질을 겪은 권오설이 숨진 것은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였다. 족대기질 뒷덧으로 얻은 폐렴 탓이었으니, 1930년 4월 17일이었다. 향수 34.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사 아리랑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