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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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누군가를 악마화하여 미워하고 ‘익명’의 존재를 채근하며 효율과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란,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함으로써 더 견고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류장에서 할머니 한 분이 탔다. 짐을 들고 지팡이에 의지하느라 달팽이 속도로 올라타는데 기다리던 버스 기사가 꽥 소리를 질렀다. “빨리 타요! 승객들 기다리잖아요!” 재촉을 들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할머니는 서너 개의 버스 계단조차 힘겨워했고 기사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빨리 타라니까요! 짜증나니까!”

그래 봤자 고작 1~2분인데 너무한다 싶어 입구 쪽을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버스비가 문제였다. 교통카드를 가지지 않은 할머니가 5000원짜리를 냈는데 기사가 또 소리를 질렀다. ”5000원짜리를 내면 어떡해요! 에이씨! 돈 없으면 내려요!”

난감해 하며 다시 잔돈을 찾는 사이, 버스가 출발해버려서 할머니는 중심을 잃고 지팡이를 놓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제야 할머니도 화가 났는지 “어째 돈을 마다한다요. 가만 있어 봐요. 나도 카드 있응께!” 말하며 주섬주섬 카드를 찾았는데 불행히도 교통카드 기능이 없는 카드였다. 기사는 차를 세우며 “에이씨! 돈 없으면 내려요! 당장!” 소리를 질렀고 할머니는 위기에 빠졌다. 다시 내린다고 해도 힘겹게 올라왔던 것만큼 달팽이 같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승객은 누구도 빨리 가자 재촉하지 않지만 기사 혼자 화를 내며 할머니를 막 대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때, 불편한 마음으로 그 소동을 내내 지켜봤을 어떤 여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 여성은 앞으로 성큼 걸어가 “이걸로 낼게요!” 카드를 찍고 카드단말기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할머니를 자리에 안전하게 앉힌 후 한마디 쏘아붙였다. “승객을 그렇게 막 대하시면 안 되죠”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여성은 그 한마디만 하고 다시 자리로 걸어갔다. 다만, 버스 하차문 앞으로 가서 문 위에 붙은 버스회사와 기사 정보가 적힌 안내문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한 번만 더 승객에게 부당하게 화를 내시면 버스회사에 신고할 겁니다’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그 안내문 옆에는 ‘버스 기사 폭행, 범죄와 같습니다’라는 안내판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아무튼 버스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며칠 전에 탄 버스에서는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어떤 여성이 버스를 탔는데 5000원짜리 지폐만 있었나보다. “저… 5000원짜리밖에 없는데 이거 내도 돼요?” 그 여성은 기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기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외상으로 타고 다음에 내가 운전하는 버스에 또 타게 되면 갚아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이 대화를 듣는 내 마음이 다 따뜻해졌다.

어떤 기준에서 본다면, 버스비를 안 받은 기사보다는 운행시간을 따박따박 지키며, 모든 승객에게서 버스비를 제대로 받아낸 기사가 더 일을 잘하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기사가 온정을 베풀어 그 할머니를 마냥 기다려주었다면 승객 중 누군가는 짜증을 냈을 것이고, 운행시간을 지키지 못한 책임은 고스란히 기사의 몫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자란 돈을 사비로 메워야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어떤 규칙과 질서는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너그러워져도 좋을 우리의 ‘인간됨’을 ‘일못’으로 둔갑시킨다.

택시 앞자리나 버스 하차문 위에는 버스회사 정보와 함께 기사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사진을 제대로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얼마나 보며 살고 있을까? 지난 11월 14일, 시위 진압용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농민, 백남기씨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난 세월이 오롯이 새겨 있는 주름,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이웃이었을 미소를 들여다보며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악마화하여 미워하고 ‘익명’의 존재를 채근하며 효율과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란,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함으로써 더 견고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굴 볼 시간이 어디 있어! 타인의 사정이나 시간 따윈 다 불필요한 감상이야! 저 종북 좌파는 (캡사이신 물대포를) 맞아도 싸! 이렇게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애써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마주하기로 한다. 당신의 얼굴을, 우리의 현실을. 일을 못해도 좋으니 ‘인간’을 잃지 말자고 부질없이 바라본다.

<오수경 일 못하는 사람들 유니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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