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세종로 정부서울청사-남대문 시장…경제주권을 잃은 무능한 관료, 금 모아 국난을 극복한 민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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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경제를 뒤흔든 유럽발 경제위기의 진앙지는 그리스다. 그리스는 2010년과 2012년 두 번이나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지원을 받고 긴축재정과 자산 매각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못했다. IMF 구제 프로그램이 종료됐지만 그리스는 부채를 상환하지 못했다. 혹독한 IMF의 요구조건에 맞서겠다며 정권을 잡은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젊음과 국민투표 61%의 긴축 반대 여론을 무기로 유럽연합(EU)과 3차 벼랑 끝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EU는 냉정하게 긴축재정과 국유자산 매각이 없으면 그리스에 추가 재정지원 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는 3차 금융지원을 얻어냈지만 실질적으로 연금삭감, 실업 등 혹독한 경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스 국민의 입장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고, 결국 야심찬 치프라스 총리도 물러나고 말았다.

1997년 재벌그룹 12개 줄줄이 도산
그리스 사태의 진전을 바라보며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느낀 사람이 많았다. 우리도 국가부도 탓에 혹독한 IMF 구제금융(1997년 12월 3일~ 2001년 8월 23일) 기간을 거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전에도 세 번이나 IMF 구제금융을 받은 적이 있지만 국민이 모를 정도로 후유증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1997년 12월은 달랐다. 1997년 12월 IMF 체제는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 당한 을사늑약에 빗대어 경제주권을 빼앗긴 ‘경제국치’ 혹은 ‘환란’(換亂)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 당시 언론은 1면에 “‘경제 신탁통치’ 12월 3일을 잊지 맙시다”라고 제목을 썼다.(경향신문 12월 4일자)

1997년 12월 3일 경제주권을 빼앗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한 현장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당시의 치욕을 교훈 삼으려는 어떠한 기록도, 노력도 안 보인다.

1997년 12월 3일 경제주권을 빼앗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한 현장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당시의 치욕을 교훈 삼으려는 어떠한 기록도, 노력도 안 보인다.

대통령 선거 직전이던 당시 IMF 미셸 캉드쉬 총재는 각 당 대통령 후보에게 IMF와의 협의내용 이행을 다짐하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 측은 “주권국가의 자존심을 짓밟는 처사”라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결국 서명했다. 이인제 후보는 직접 서명을 않고 전화로 당대표의 직인을 찍어주는 것에 동의하는 방법으로 각서에 서명했다.

일단 김영삼 대통령(YS)의 문민정부 시기로 되돌아가 보자. YS의 박재윤 경제수석은 ‘신경제’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문민정부는 재정·세제·금융·행정규제·의식 등 경제분야 5가지를 모두 뜯어 고치겠다는 의욕으로 넘쳤다. 금융실명제(1993년 8월 12일)를 실시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지만 관료와 재벌의 저항은 집요했다. YS정부는 신경제정책이 표류하자, 이번에는 ‘국제·세계화’를 들고 나왔다. 1995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하지만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경상수지는 1994년 45억 달러 적자에서 1996년에는 무려 237억 달러 적자로 커졌다. 경제성장률도 1995년 8.9%에서 1997년 5.5%로 가라앉았다. 5%대 성장률은 지금으로 보면 높지만, 당시로는 최악의 성장률이었다. OECD 가입으로 수입자유화율은 99.9%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속한 개방에 비해 국내 기업과 제도는 개혁되지 않았다. 외채는 아예 정확한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 IMF 이후 정확한 한국의 채무상태를 알기 위해 세계은행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총 대외지불부담은 1997년 말 현재 153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한겨레신문 1997년 12월 31일)

급기야 재벌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1997년 1월 한보그룹의 부도에 이어 3월 20일 삼미그룹, 7월 15일 수만개 하청업체가 딸려 있던 기아그룹도 각각 부도가 났다. 한 해 무려 12개 재벌이 무너졌다. 재벌그룹의 부도가 이럴진대, 중소기업 부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1993년부터 1997년 6월 사이 무려 5만3000여개 중소기업이 도산했다.

그런데도 대부분 언론은 ‘우리 경제는 펀더멘털이 좋아 경제위기는 없다’고 보도했다.

1997년 12월 3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임창렬 재경부 장관과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1997년 12월 3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임창렬 재경부 장관과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1997년 11월 14일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청와대에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고 보고했다. YS는 11월 19일 강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을 경질하고, 임창렬 재정경제부 장관을 경제부총리로 임명해 마지막 반전을 시도하지만 결국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1997년 12월 3일 캉드쉬 IMF 총재가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임창렬 재경부 장관과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바로 IMF체제의 시작이다. 하지만 서명식에 참석한 우리 경제관료들은 비통함보다 일부는 웃고 있었다.

실업자 200만명 양산, 자살자 급증
서울 정동길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보전돼 있다. 이 중명전에서 이완용 등 을사5적이 일본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나라의 외교권을 넘겨주는 을사늑약에 찬성했다. 이에 장지연은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었으니,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라고 통곡하며 관료들을 비난했다.(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심지어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이한응, 민영환, 조병세 등이 자결하고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 등은 의병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92년이 지난 1997년 12월 우리는 경제주권을 IMF에 넘겨줬다. 92년 전 선배 관료들은 국제정세를 몰랐거나 대비를 소홀히 했다면 후배들은 나라의 경제를, 특히 외환관리를 잘못한 것이다. 92년의 시차만 있을 뿐 나라의 지도자와 관료가 무능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환란을 당했던 YS는 여당에서조차 뭇매를 맞는 수모를 당하다 9%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쓸쓸하게 청와대를 떠났다.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도 사법처리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경제주권을 넘겨준 현장인 정부서울청사는 과거의 치욕을 ‘모른 척’ 꿋꿋하게 서 있다. 이곳에 있던 총리실을 비롯해 과천청사의 경제부처도 2012년 세종시로 이전했다. 경제주권을 상실했던 IMF의 현장인 정부서울청사 12층에서는 매주 총리 주재 국무회의가 열렸다. 국무회의실에는 역대 총리의 초상화만 고급스런 액자에 끼워져 걸려 있다. 최소한 국무회의실 역대 총리 초상화 아래 ‘이곳이 우리 공무원들의 잘못으로 경제주권을 IMF에 넘겨준 치욕의 자리입니다. 우리 모두 역사의 죄인 심경으로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합시다’라는 경구 하나 정도는 남겨 놓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아니었을까.

1998년 1월 시민들이 금 모으기 행사에 동참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1998년 1월 시민들이 금 모으기 행사에 동참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이 IMF체제에서 서민의 삶은 참혹했다. 실업자가 200만명에 이르렀고, 부모가 버린 자녀들도 3000명을 넘어섰다. 수업료를 내지 못한 초등학생이 6배나 급증했다. 부도난 중소기업 사장은 빚쟁이를 피해 고시원과 절로 도주했다. 가정은 해체되고 자살자는 급증했다. IMF는 우리 국민들에게 ‘가정의 해체와 파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기억된다.

을사늑약에 분노해 의병을 일으킨 주체가 민중(서민)이듯이 지도자와 관료의 무능과 재벌의 탐욕으로 빼앗긴 경제주권을 다시 찾는 데 불씨를 지핀 이는 바로 서민이었다. 1998년 1월 9일 서울 주택은행 남대문지점에서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이 그것이다.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집안 장롱에 있던 금을 모아 팔아 달러를 들여오자는 운동을 벌인 것이다. 여기서 시작된 금 모으기 열풍은 전국으로 번졌다. 일제강점기인 1907년 벌어졌던 국채보상운동에 빗대어 ‘제2의 국채보상운동’으로 여겨졌다.

금 모으기 운동 열풍 전국으로 번져
이 금 모으기 운동의 시작이 ‘김대중 대통령의 아이디어’라는 주장이 있다.(김택근, 김대중 평전, 2012) 하지만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새마을부녀회가 ‘장롱 속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건, 공인 50년, 중앙일보 2013.7.8)

물론 금 모으기 행사는 국가재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였다. 국제적 금값 하락 기조에 국부를 헐값에 해외에 유출했기 때문이다. 또 금 모으기 행사는 정치적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었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백은진은 “재경부의 경우에는 금 판매대금의 유입으로 인한 외환보유액 획득이라는 가시적 경제성과와 정치적 책임론을 무마하고 국민의 신임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면서 “하지만 한국은행은 환차손 발생과 통화관리의 어려움을 예상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분석했다.

어떻든 정치적·재정적 이해득실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금 모으기 행사는 국민이 단결해 국난을 극복하는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에 알린 것이 사실이다. 당시 세계는 우리의 금 모으기 운동에 주목했고, 이번 그리스 사태에서도 과거 한국의 금 모으기 사례가 다시 언급되기도 했다. 2001년 8월 23일 우리가 IMF로부터 받은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조기에 상환하고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난 요인 중에 바로 이 서민들이 나섰던 금 모으기 운동도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인 실제적 주인공은 바로 남대문시장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IMF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겪고 있다.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인 실제적 주인공은 바로 남대문시장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IMF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겪고 있다.

금 모으기 운동이 처음 벌어진 주택은행 남대문 지점은 지금 국민은행 숭례문 지점으로 바뀌어 있다. 주택은행이 국민은행에 합병된 것도 IMF 때문일 것이다. 이곳 역시 17년 전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진 현장이라는 표시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은행 관계자는 “이곳이 IMF 때 금 모으기 행사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도 모르고, 주택은행 사사(社史)에도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금 모으기 운동의 첫 번째 ‘주역’은 이 주택은행이라기보다 이 주변 남대문시장 상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며 모았던 금반지 한 개, 금목걸이 한 개를 기꺼이 달러로 바꾸라고 내놓았다. 그 순진한 애국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남대문시장을 지키며 관광객을 대상으로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위기 때마다 나라를 지킨 것은 민중(민초)들이다. 하지만 나라를 구한 민초들은 대접은커녕 언제나 제일 먼저 고통을 받고 있다.

IMF의 가장 잔혹하고도 집요한 유산은 바로 고용의 유연성, 쉽게 말하면 비정규직 문제이다. 많은 경제·사회·노동 전문가들은 IMF의 유산으로 구조조정을 쉽게 한 신자유주의 도입을 꼽는다.(정덕구 외환위기 징비록, 2008)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 근로자 비율은 22.4%로, OECD 평균 11.8%보다 두 배나 높다. 이는 OECD 28개 회원국 중 4위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이전비율도 22.4%에 불과, OECD 평균 53.8%의 절반도 안 된다.

그런데도 최근 정부·여당은 노동개혁, 특히 고용의 유연성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침체된 경제위기의 주범이 장기근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바로 18년 전 IMF 사태를 야기한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보좌관이다. 청와대 경제수석 보좌관의 책임은 막중하다. 그가 IMF 이후 공직에서 좌천됐다가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국민경제의 ‘죄인’이 다시 경제정책의 최고 책임자가 되는 현실, 역사를 기억하지 않은 우리 민초들의 서러운 죗값인가.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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