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의도 대하빌딩 옛 평민당사…꺼져가던 지방자치에 불 지핀 단식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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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가 2년 넘게 남았지만 여론조사기관은 차기 대권주자 선호도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를 보면 대체로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가 1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김문수 전 경기지사, 남경필 현 경기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등이 10위권 안에 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배경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 서울시장이나 경기지사 등 광역자치단체장, 특히 수도권 광역자치단체장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른다. 광역자치단체장은 직접 행정경험을 쌓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중요인물로 꼽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광역자치단체장은 웬만한 초·재선 국회의원 경력으로는 되지 않는다. 기초자치단체장인 안상수 현 창원시장은 4선 의원에 집권당 대표를 지낸 경력의 인물이다.

지방자치 실시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한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사가 있던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 이 주변은 새누리당사가 있는 등 여전히 정치 1번지로 평가되고 있다.

지방자치 실시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한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사가 있던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 이 주변은 새누리당사가 있는 등 여전히 정치 1번지로 평가되고 있다.

지방의회 일시에 해산시킨 5·16 쿠데타
그동안 정치인이 되는 방법은 유력 정치인에게 아부하거나,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지역구 공천을 받거나,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얻는 방법이 유일했다. 이는 여야 마찬가지였다. 이와 무관하게 혜성같이 나타나는 정치인이 있었지만, 이들도 곧 권력자 혹은 3김씨의 영향력 아래 흡수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기초자치단체 의원에서 시작해 광역 의원-기초단체장-광역단체장으로 이어지는 ‘정치 엘리트 충원’의 새로운 루트가 생겨났다. 본인만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민들은 과거 권위적으로 군림하는 공무원들의 등쌀에 시달리는 시대에서 이제 ‘행정서비스’를 향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동사무소는 서비스 기관으로 바뀌었고, 군청이나 시청에 가도 거드름을 피우며 시민에게 군림하는 공무원은 찾기 어렵다. 이것은 바로 지방자치의 결과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와 한몸으로 발전했다. 일부 연구가들은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시작을 일제강점기까지 소급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7월 도에는 평의회, 부와 면에는 협의회를 구성했고, 1930년 12월에는 부와 읍 협의회에 의결권을 부여하고 관선 면 협의회를 민선으로 바꾸는 등 지방자치가 시행됐다는 것이다.(김종서, 현행 지방자치관계법의 비판적 검토, 1992년)

이런 배경에서 1948년 제정된 우리나라 제헌헌법에 지방자치가 명문화된 것은 당연했다. 이듬해인 1949년 7월 지방자치법까지 제정·공포됐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지방자치제를 정치 불안정을 이유로 실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1952년 4월 25일 한국전쟁 중에 돌연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매우 정략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이승만 재집권에 반대하는 국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지방의회를 구성한 것이다.

1990년 10월 15일 단식 8일째인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의료진에 의해 평민당사를 나와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김 총재는 병원에서 단식을 계속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0년 10월 15일 단식 8일째인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의료진에 의해 평민당사를 나와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김 총재는 병원에서 단식을 계속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52년 4월 25일 제1회 시·읍·면 의회 선거가 치러지고, 5월 5일 시·읍·면 의회가 구성되는 등 매우 선진적(세부적)으로 지방의회를 구성한 셈이다. 그리고 5월 10일 전투 중인 서울·경기·강원을 제외하고 도의원 선거를 치러 5월 29일 도의회를 구성했다. 전쟁 중 태어난 읍·면·도 의원은 이승만 재집권에 동원됐다.

“발췌개헌안이 통과된 지 한 달 후인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승만은 대통령 후보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민중자결단, 지방의회 의원 등에 의한 민의 동원으로 350만명이 이승만의 재출마를 탄원하는 관제 민의를 동원했다. 대단한 사전선거운동이었다.”(서중석, 한국현대사, 2005년)

이렇듯 우리의 지방자치는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본래 의미보다 독재자의 장기집권에 동원되는 용도로 출발했다. 지방의원의 도움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이승만은 곧 지방자치에 회의를 느낀다. 주민이 선출한 지방의회가 자신이 임명한 단체장을 불신임하고, 지방의원들의 청탁과 이권개입이 빈발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는 4·19혁명 이후 도입됐다. 1960년 11월 1일 전면적으로 지방자치법이 개정되고, 12월 12일 제3대 도의원 및 도지사(서울시장), 시장, 읍·면장 선거가 실시됐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명실상부한 최초의 지방분권화로 꼽고 있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나자마자 쿠데타 세력은 지방의회를 일시에 모두 해산시켰다. 그리고 임시조치법으로 자치단체장은 임명제로 바뀌고, 지방의회는 해산됐다. 지방자치를 폐지한 것이다.

1962년 제정된 헌법은 ‘지방의회 구성 시기는 법률로 정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지방자치법을 정하지 않았다. 헌법에만 있고, 사실상 지방자치를 폐기한 것이다. 1972년 유신헌법은 아예 ‘지방의회 구성을 조국의 통일 때까지 유예한다’고 규정했다. 전두환 정권의 1980년 헌법에는 ‘지방자치단체 재정자립도를 감안해 순차적으로 하되 그 구성시기는 법률로 정한다’고 명시했다. 이 역시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지 않아 지방자치는 실시되지 않았다.

1995년 명실상부한 첫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 성북구에 걸린 포스터와 현수막.

1995년 명실상부한 첫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 성북구에 걸린 포스터와 현수막.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DJ의 단식
지방자치가 사라진 30여년간 우리나라는 중앙집권적 관치시대가 계속됐다. 정치권은 물론 행정가들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도체제를 ‘지고의 선’으로 여겼고, 지방분권은 혼돈의 원인으로 인식됐다. 지방자치는 지방행정을 전공하거나 지방자치를 경험했던 60~70대 노인들이나 알았지, 대부분 국민은 지방자치가 뭔지도 몰랐다.

본격적인 지방자치는 1987년 ‘6·10항쟁’으로 이뤄진 직선제 개헌에서 토대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1987년 헌법에 지방의회의 구성에 관한 유예 규정이 철폐된 것이다. 이것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를 비롯한 김영삼, 김대중 등 여야 후보는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를 공약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지방의회만 구성하고 자치단체장 선출을 미루기로 결정했다.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된 야3당은 1989년 12월 31일 지방의회 및 단체장 선거법안을 통과시켰다. 국민들은 이제 지방자치가 실시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1990년 1월 22일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지방자치 실시는 또 미뤄졌다. 218석의 거대 여당이 된 노태우 정부는 법에 명시된 지방자치 연기를 선언했다. 이에 맞서는 유일 야당 평민당은 70석에 불과했다.

평민당사가 입주해 있던 대하빌딩 9층에는 현재 공교롭게도 경상남도 서울사무소가 입주해 있다.

평민당사가 입주해 있던 대하빌딩 9층에는 현재 공교롭게도 경상남도 서울사무소가 입주해 있다.

바로 이 순간, 10월 8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지자제 전면실시’ ‘내각제 포기’ 등의 4개 항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DJ는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에 있는 평민당사 9층 총재실에 자리를 깔고 단식에 돌입했다. DJ가 단식을 강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평민당 소속 의원들의 동조 단식도 이어졌고 정국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단식 중 당시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이 병실을 찾아왔다. 그때 DJ는 “나와 김 대표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는데 민주화라는 것이 무엇이오. 바로 의회정치와 지자제가 핵심 아닙니까. 여당으로 가서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찌 이를 외면하려 하시오”라고 말했다.(김대중 자서전, 2010년)

단식 8일째인 15일 DJ는 “더 이상 밀폐된 공간에서 단식할 경우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의료진의 경고를 받아들여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DJ는 세브란스병원에서 단식을 계속해 13일 만인 20일 단식을 끝냈다. DJ의 단식이 단초가 돼 정치권은 “1991년 6월 30일 이내 기초 및 광역 지방의회를 구성하고, 1992년 6월 30일 이내 기초 및 광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실시한다”고 합의했다.

DJ의 단식은 꺼져가는 지방자치를 되살리는 불씨가 됐다. DJ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스스로 별명을 ‘미스터 지방자치’라고 할 정도로 지방자치에 대해 애착을 가졌다. DJ는 1971년 7대 대통령선거 후보 때부터 “집권 1년 내에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DJ는 “제1차로 시·도 및 시·군 의회의 구성, 제2차로 자치단체장의 선출, 단 서울특별시, 부산직할시 및 각 도의 수장은 임명제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중앙과 지방 간의 조화와 안정을 유지하겠다”는 합리적 실천방안을 제시했다.(이상환, 지방자치법 이렇게 만들어졌다, 1995년)

한때 정치권 명당, 지금은 정치인 없어
1995년 6월 27일 드디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됐다. 지방자치 실종 34년 만의 일이다. 선거 결과 서울시장에서 야당이 승리하는 등 여소야대가 반복됐다.(평민당은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노무현·이기택 등과 통합민주당으로 당명이 바뀌었고, 김종필(JP)은 1995년 2월 다시 충청권 의원과 탈당,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야당길을 걸었다)

일단 도입된 지방자치제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수도(행정)를 지방으로 이전하는 등 강력한 지방분권 정책을 시행했고, 2004년 7월 주민투표, 그리고 2007년 7월 지방자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까지 도입했다. 제도적 측면에서 우리의 지방자치 제도는 선진국 수준이다. 그러나 제도와 병행돼야 할 예산은 뒤따르지 못해 중앙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다. ‘반쪽 자치’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에 예속된 자치, 지방 토호의 자치가 아닌 명실상부한 풀뿌리 주민 자치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많다.

25년 전 꺼져가는 지방자치의 불씨를 살린 여의도 대하빌딩 주변은 그대로다. 하지만 대하빌딩 9층 옛 평민당 총재실은 그 흔적조차 없다. 이 빌딩 소유주인 김영도 하남산업 회장은 DJ에게 당사를 제공하고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다. 과거 돈이 없던 시절 당 운영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전국구 의원 자리를 주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지금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YS가 어렵게 통일민주당을 이끌 당시 중림동 당사를 마련해 주고 주요 당직을 얻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 일대는 정치 1번지이다. 현재 새누리당이 있는 한양빌딩과 바로 길 하나 사이이고, 바로 인근에 정의당사도 있다. 사실 이곳 대하빌딩은 정치권에서 ‘명당’으로 꼽힌다. 1995년 첫 지방자치 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을 만들어낸 곳도 이 빌딩이고, 1997년 DJ는 바로 이 빌딩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또 2007년 이명박 후보의 외각조직도 이곳에 입주해 있었고,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이 빌딩 2층과 7층을 사용해 대권을 잡았다.

하지만 ‘용의 기운’이 쇠퇴한 것인가. 이 빌딩 관리인은 “과거 정치인 사무실로 인기가 있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면서 “하지만 지금 건물에 입주한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공교롭게 대하빌딩 9층에는 지금 ‘경상남도 서울본부’가 입주해 있다. 이곳은 경상남도(도지사 홍준표)의 서울사무실로, 경남도청 공무원들이 상주해 국회 및 정부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경남도 서울본부 구경호 주무관은 “올 1월 이곳에 사무실을 정했다”면서 “이곳이 과거 평민당사가 있었던 곳인지는 잘 몰랐다”고 말했다.

과거 평민당사 시절 이곳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넘치는 호남사람들이 득실거렸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지금 이곳 9층은 시끄러운 ‘경상도 사투리’가 넘치는 곳이 됐다. 기막힌 역사의 반전이다. 게다가 홍준표 경남지사는 올해 초 중·고등학생들에 대해 무상급식을 중단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 지역에서는 홍 지사를 해임하려는 주민소환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래저래 여의도 대하빌딩은 ‘지방자치제도’, 그리고 ‘단식’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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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 나아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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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 나아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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