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 군정을 종식시키고 문민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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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2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적막한 새벽을 깨웠다. 상도동 마을 주민들이 김영삼 대통령(YS) 당선을 축하하러 온 것이다. YS는 주민들에게 휩싸여 집 아래 마을 놀이터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 김영삼 만세’라는 급히 만든 피켓을 든 주민들과 격의없는 축하잔치를 벌였다.

당시 그 현장에 있던 기자는 ‘현직이 아닌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지만 저렇게 경찰이 경호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지금, 마을 잔치가 벌어졌던 상도동 그 놀이터에는 경찰 캠프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상도동 골목 처음과 끝에도 경찰 초소가 있다. 이곳을 경비하던 경찰은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며 제지한다. 아마 집에 있는 YS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요즘 도로명 주소로 매봉로 2가길 11. 흰색 바탕의 문패에는 한자 이름 ‘김영삼’이 선명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는 가택연금과 단식 등을 통해 문민시대를 연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현재 김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는 가택연금과 단식 등을 통해 문민시대를 연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현재 김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다.

동교동과 함께 우리나라 야당사에 한 축
이곳은 한국정치사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다. 우리 현대사에서 YS의 ‘상도동’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동교동’과 함께 단순한 지명이 아닌, 하나의 정치세력의 중심지라는 고유명사로 정착됐다. 무엇보다 ‘군정을 종식시키고 문민화의 시대’를 연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군인이 정치를 농락한 우리의 후진적 현대사를 마감하고 문민시대를 열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곳의 정치·역사적 평가는 충분하다.

과거에는 상도동 YS 사저 주변은 단층건물이어서 2층인 상도동 집이 특히 높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주변 단독주택은 모두 4~5층 빌라로 재개발됐지만 YS 사저만 그대로여서 오히려 왜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좁은 앞마당의 향나무만 담장을 넘어 훌쩍 컸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이곳에서는 격정의 현대사를 살았던 거산(巨山·YS의 호)이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이 9월 18일 창당 60주년 선포식 때 YS를 초청하는 등 상도동계까지 ‘야당 60년사 족보’에 아우르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 YS는 1955년 신익희·조병옥 등 야당 세력이 만든 민주당 창당발기인 33인에 포함될 정도로 야당생활을 오래 한 정치인이다. 특히 1970~80년대 유신과 군사독재 정권 때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빼놓을 수 없는 야당 지도자다. YS의 정치적 후배인 상도동계가 만든 김영삼민주센터도 ‘한국야당사 60년 구술 프로젝트’를 주요 사업으로 꼽고 있다. YS의 상도동계가 ‘한국야당사 60’년을 기획하고 있다는 얘기는 자신의 뿌리와 줄기가 야당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다.

사실 상도동은 DJ의 동교동과 함께 우리나라 야당의 한 줄기이며, 민주화 운동 추동세력의 본산으로 꼽혔다. 굳이 구별한다면 YS는 민주당 구파이고 DJ는 민주당 신파로, 출신 계보가 조금 달랐다는 점뿐이다. YS는 1954년 5월 제3대 국회에 여당인 자유당으로 국회의원이 됐지만, 1년도 안 된 1955년 4월 이승만의 3선 개헌(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탈당, 야당인 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야당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58년 4대 총선에서 야당으로 출마했으나 자유당의 극심한 부정선거로 낙선했다. 4·19 학생혁명으로 치러진 5대 총선에서 YS는 민주당으로 당선해 여당이 됐지만 민주당 구파로 탈당, 신민당에 합류했다.

따라서 YS의 여당생활은 불과 4개월에 불과했다. 동료 DJ가 민주당 신파로 대변인 등 여당 주요 당직을 맡은 것과 대비된다. 그리고 5·16 쿠데타를 통해 두 사람은 다시 야당의 신분이 됐다. 민주당-민중당 등 분열된 야당을 거쳐 1967년 통합 야당 신민당에서 다시 만났다. YS는 1968년 ‘향토예비군 폐지’를 주장해 공화당으로부터 좌파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진보적 정치인이었다.

1983년 5월 경찰이 상도동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를 차단한 상태에서(사진 위) YS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사진 아래) 이 23일간의 단식투쟁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신당 창당 등을 거쳐 결국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3년 5월 경찰이 상도동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를 차단한 상태에서(사진 위) YS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사진 아래) 이 23일간의 단식투쟁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신당 창당 등을 거쳐 결국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YS는 1969년 11월 8일 지지부진한 야당에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1971년 야당 대통령선거 경선에 나섰다. YS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에 못 미쳐 2차 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YS는 묵묵히 DJ 선거를 도왔고, 유신 반대 투쟁을 함께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외유와 정치활동이 중지됐을 때도 두 사람은 민주화의 동지로 일관되게 투쟁했다. DJ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미국의 도움으로 석방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YS는 가택연금으로 바로 이 상도동에서 갇혀 지냈다. 행동의 제약은 아마 YS가 더 심했을 것이다.

민추협 만들어 정통야당 복원시켜
YS는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중항쟁 4주년을 맞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민주화 5개 항을 내건 상도동 단식은 5월 25일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져 6월 9일까지 계속됐다. YS는 의사의 권유로 단식을 끝내며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이다”라고 일갈했다.

결국 그는 상도동 단식을 통해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다. 그리고 민주산악회를 조직, 세력을 늘리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만들어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 정통 야당을 복원시킨 YS는 1987년 6·10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사실 이 시기 상도동은 거의 유일한 민주화 투쟁의 거점이었다. DJ는 미국 망명 중이었기 때문이다.

상도동 사저 인근에 김영삼기념도서관이 9월 10일 준공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 중이다. 도서관은 내부 자료가 갖춰지는 올 연말 개관할 예정이다.

상도동 사저 인근에 김영삼기념도서관이 9월 10일 준공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 중이다. 도서관은 내부 자료가 갖춰지는 올 연말 개관할 예정이다.

어떻든 YS는 군정을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상도동 세력이 만든 ‘김영삼민주센터’도 YS의 업적에 대해 ‘문민시대 개막’을 단연 첫 번째로 꼽고 있다. 이 센터는 문민정부의 업적으로 ‘군사정권을 실질적으로 종식하고, 금융 및 부동산실명제 실시, 공직자 재산공개제도 도입, 지방자치제 전면 시행, 군사독재 시대의 역사적 청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추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경수로 지원’ 등을 나열하고 있다. 사실 나열된 것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YS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호적이기보다 야박하기까지 하다. 그 부정적 평가 요인은 3당 합당과 IMF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정치컨설팅회사 ‘폴컴’ 대표 윤경주는 이를 ‘3당 합당 콤플렉스’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킨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한 것이 민주세력임을 자부하는 그에게 집권 내내 콤플렉스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김호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이라는 책에서 ‘1990년 3당 합당 등의 승부사적 기질은 외아들 특유의 소영웅주의적 충동성’에서 나왔다고 평가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정치의 왜곡은 3당 합당보다 1987년 양김의 분열에서 시작됐다. 1987년 대선에서 YS는 DJ의 양보를 기대했다. 1972년 자신이 패배를 인정하고 그를 도왔던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기대했고, 여론조사에서도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DJ는 어설픈 ‘4자 필승론’으로 독자 출마했다. 물론 노태우의 분열공작도 작용했다. 결국 YS는 DJ보다 23만표를 더 얻었지만 정권을 신군부세력에 헌납하고 말았다.

YS는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과 1992년 대선 승리를 거쳐 1995년 11월 16일 ‘역사바로 세우기’를 앞세워 5·18특별법을 제정하며 신군부세력과 결별할 때까지 5년을 제외하면 민주화 세력의 길을 걸었다. YS는 DJ와 달리 끝까지 박정희 정권과 화해하지 않고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YS의 ‘정치적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 김현철씨가 지난 대선에서 사실상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45년 정치역정에 YS가 반민주세력과 동거해 여당생활을 한 것은 5~6년 정도에 불과하다.

김영삼기념도서관 안내판

김영삼기념도서관 안내판

사처 근처에 ‘김영삼기념도서관’ 들어서
이는 사실 DJ와 엇비슷하다. DJ도 1996년 중순부터 쿠데타 세력인 김종필(JP)과 정책공조를 하다 1997년 대선에서 DJP연합으로 정권을 잡았다. ‘반민주 세력과의 동침’인 DJP연대는 2001년 9월까지 계속됐다. DJ도 마찬가지 였는데 유독 YS에게만 3당 합당의 ‘굴레’를 씌워 비난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이것은 YS의 상도동 후배들이 선배의 민주화 정신을 잃은 변신과 변절 때문일 것이다.

이제 YS는 정치학자·역사학자들의 평가 대상, 즉 역사적 평결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2010년 설립한 김영삼민주센터 김수한 이사장(전 국회의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줄기찬 민주화운동 과정과 문민정부의 역사적 업적과 자료 일체를 수집, 정리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밝혔다. 사료와 증언을 모아 YS의 역사적 평가에 본격 대비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들은 상도동 사저에서 조금 떨어진 상도동 로터리에 지하 4층, 지상 8층의 ‘김영삼기념도서관’도 건립하고 있다. 공연장과 전시관, 연구공간, 집무실 등이 들어서는 이 도서관은 오는 9월 10일 준공한다. 김영삼민주센터 김정렬 사무국장은 “건물은 거의 됐는데 도서관 3개층에 전시물, 즉 아카이브를 채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서 “기록을 모아 올해 안에 명실상부한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념도서관 운영은 대학에 의뢰하는 것으로 내부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미 정치학자들은 양김 시대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87년 체제’ 논쟁이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87년 체제를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 극복이라는 측면만 바라본다. 87년 체제의 본질적 문제인 민주세력의 분열은 외면하는 분위기다. 87년 단일화 실패는 노태우의 ‘분할 전략’도 한 원인이었지만 누가 뭐라든 YS와 DJ의 ‘권력욕’ 때문이다. 당시 두 사람의 분열은 안 된다며 삭발까지 한 박찬종 등 몇몇 정치인을 ‘이단아’로 취급했다.

그 결과는 정권을 신군부의 연장세력에게 ‘헌납’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7년 단일화 실패는 정치권은 물론 학생운동권, 노동계, 재야 민주세력까지 철저하게 양분시켰다. 이렇게 대권욕에 의해 정치적 이합집산이 이뤄지다 보니 원칙이나 신념, 명분 등의 고유가치는 사라지고 ‘정치는 생물’이라는 정체 모를 논리로 변절과 야합이 합리화됐다.

1987년 체제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고스란히 진행형이다. 노동·통일운동가 출신 김문수와 역시 학생 통일운동가 김부겸이 당을 달리해 한 지역구에서 싸워야 하는 현실이 이를 웅변한다. 손학규는 YS에게 갔다가 다시 DJ에게로 오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YS의 측근 김덕룡은 지난 대선에서 야당후보를 지지했다. 사실 지금 여야 대표인 김무성과 문재인을 정치로 끌어들인 선배를 따지면 모두 YS다. 결국 87년 체제의 극복은 원칙과 노선, 태생에 따른 정당의 역사성 회복이 아닐까. 그것은 이곳 상도동을 동교동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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