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잠실종합운동장…독재 합리화와 동서화해 88서울올림픽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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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심을 끄는 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민들이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을 조사한 결과, 한국전쟁이 72.2%(복수응답)로 1위에 올랐다. 관심을 끈 것은 2위가 바로 서울올림픽 개최(64.1%)라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은 3위인 8·15 광복(62.7%)보다 높았다.(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과 한·일 월드컵 대회 개최는 나란히 62.6%를 얻어 공동 4위)

88서울올림픽을 중요 역사적 사건으로 꼽은 계층은 60대 이상, 여성에게서 높게 나타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금 60대들이 인생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30대 중·후반의 기억을 가장 인상 깊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보통 ‘왕년에’ ‘좋았던 시절’은 절정기인 30~40대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올림픽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전쟁이나, 광복, 노무현 대통령 사망과 같은 ‘불행’보다 축제나 ‘즐거움’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경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은 마스코트 호돌이와 함께 88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오래 남았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은 마스코트 호돌이와 함께 88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오래 남았다.

‘스포츠공화국’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
아무튼 1988년 서울올림픽이 광복 70년사에서 중요한 행사였음은 분명하다. 사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에서 치러진 서울올림픽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정통성 없는 신군부의 스포츠 정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 역시 1980년대 제5공화국 시대를 1980년 광주학살(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꼽고 있다. 강준만은 “서울올림픽은 88년 9월에 개최되었지만, 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된 건 7년 전인 1981년 9월이었다”면서 “아시안게임과 더불어 서울올림픽은 5공 정권이 휘두를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고 지적했다. 강준만은 또 “5공은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스포츠공화국’이었다”고 평가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실제 신군부는 스크린, 섹스, 스포츠 등 이른바 3S로 취약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컬러TV가 도입되고, 에로영화가 봇물 터지면서, 프로야구와 올림픽 등 스포츠 경기가 연이어 열렸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정치 이용은 나치의 히틀러가 베를린올림픽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서울올림픽의 시작은 전두환의 5공을 넘어 박정희 정권부터이다. 1976년 9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잠실지구에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운동장과 실내체육관 2개가 포함된 종합체육시설을 건설할 것을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지시한다. 당시 청와대는 “국민의 사기를 진작하고 체육 진흥의 본산으로 발전시켜 나가라는 박 대통령의 용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경향신문 1976년 9월 23일)

처음에는 아시안게임 유치를 목적으로 했지만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을 1979년 2월 대한체육회장으로 임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추진했다. 1979년 9월 19일 국민체육심의위원회가 서울올림픽 유치 결의를 하고, 9월 21일 정부가 이를 정식 승인했다. 그리고 10월 8일 서울시장이 올림픽 유치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곧 10·26이 터졌으니 엄밀히 보면 서울올림픽은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12년 만에 동서가 한자리에 모인 서울올림픽 개막식 / 경향신문 자료사진

12년 만에 동서가 한자리에 모인 서울올림픽 개막식 / 경향신문 자료사진

당시 청와대가 언론에 공개한 잠실종합운동장 계획은 그대로 이행됐다. 제1주경기장을 비롯해 야구장, 실내체육관 등이 일제히 공사에 들어가 가장 먼저 준공된 건물이 실내체육관으로 현재 학생체육관 건물이다. 1979년 4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박근혜양과 함께 실내체육관 준공 테이프를 커팅하고 체육관 정문 앞에 50년생 주목 한 그루를 심었다.(동아일보 1979년 4월 18일)

그러나 36년 전에 심었다는 50년생 주목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잠실 실내체육관(현 학생체육관) 관리소 관계자는 “대통령 기념식수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현재 관리하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기자가 “대통령의 기념식수는 특별히 관리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이 관계자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했다. 1979년 4월이면 10·26사태가 일어난 바로 그해이다. 아마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면서 관리하던 공무원도 이 나무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고, 나무는 말라죽었으리라. 그것이 권력의 허무함이기도 하다.

올림픽 유치계획은 10·26, 12·12라는 국가적 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추진됐다. 물론 전두환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모두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던 의도는 비슷했을 것이다. 이후 1980년 3월 7일 문교부(당시 스포츠는 문교부 소관)에서 올림픽 유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 12월 2일 서울시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로 신청했다. 1981년 IOC에 세부계획을 제출하고, 조사단의 서울 방문, 올림픽 유치활동 등을 거쳐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1988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된 것이다. 당시 경합 지역은 일본 나고야로 IOC 위원의 비밀투표 결과 52대 27로 개최권을 얻었다.

12년 만에 동서가 한자리에 모인 서울올림픽 폐막식은 국제적 화합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2년 만에 동서가 한자리에 모인 서울올림픽 폐막식은 국제적 화합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2년 만에 서방권·동구권 모두 참가
서울올림픽은 각종 시설과 준비 및 운영에 모두 2조3826억원을 투입했다. 이 중 대회 직접사업비는 1조1084억원이고 여건조성사업비는 1조2742억원이다. 이 비용에는 체육시설 투자, 올림픽대로 건설 및 한강종합개발, 김포공항 확장공사, 가로정비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포함돼 있다.

그렇게 해서 1984년 9월 29일 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이 열린 올림픽 주경기장이 건설됐다. 필드의 넓이 105×67m, 좌석수 6만9000여석, 수용인원 10만명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주경기장 스탠드 위에 완만한 곡선 지붕을 씌워 한국적 기와지붕의 미를 살렸다. 이 주경기장은 호돌이 마스코트와 함께 서울올림픽의 한국적 정서를 가장 잘 상징하는 조형물로 평가됐다.

요즘 올림픽 주경기장을 가보면 걸려 있는 커다란 오륜마크가 이곳이 올림픽이 열린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주경기장에 정면에는 FC서울 프로축구 경기를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아마추어 스포츠인 올림픽과 프로축구의 절묘한 ‘동거’인 셈이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 전 세계에서 159개국 1만3304명의 선수단(선수 8391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경기는 정식종목 23개와 시범종목 2개, 시범세부종목 1개, 전시종목 2개, 전시세부종목 1개(장애인 휠체어경기) 등의 경기가 치러졌다.

최종 경기 결과는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했고, 미국이 금메달 37개, 동독이 금메달 36개, 개최국인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순위 5위를 차지했다. 사실 태권도와 권투 등 일부 종목에서는 ‘홈그라운드’ 판정 시비가 있었지만 경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서울올림픽에서 33개의 세계신기록과 5개의 세계타이기록, 227개의 올림픽신기록과 42개의 올림픽타이기록이 수립됐다. 이는 과거 올림픽 기록에 비해 큰 성과이다.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는 88서울올림픽을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상징’ 혹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동원기제’로 활용했다. 스포츠를 정권의 미화 수단(미란다)과 합리화 수단(크레덴더)으로 활용한 것이다. 서울올림픽은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했지만 최대 수혜자는 신군부, 그 중 노태우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5공 시절 올림픽조직위원장을 통해 대권을 잡았고, 이후 유엔총회 본회의에 초대돼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지금도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앞 ‘올림픽 스타 거리’에는 거대한 옥돌에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이 1988년 9월 17일 12시11분 이곳에서 제24회 올림픽 대회의 개최를 선언한 때로부터…”라고 시작되는 기념비가 서 있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회관에 설치된 서울올림픽 기념관은 기념자료는 물론 영상자료도 볼 수 있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회관에 설치된 서울올림픽 기념관은 기념자료는 물론 영상자료도 볼 수 있다.

서울시 제2의 무역센터로 재개발 검토
많은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긍정적으로 평가될 대목도 많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서방권과 동구권이 각각 불참한 반쪽 올림픽이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에서 미국과 소련이 모두 참가하는 동서 해빙의 계기가 됐다. 그것도 냉전의 최첨단 분단국가에서 동서 해빙의 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부여해도 부족함이 없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당시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가 25개국이나 됐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 미수교국과 대부분 수교가 이뤄지는 등 외교적으로 성과를 거뒀다. 이것은 북방외교를 통한 남북 평화 정착과 남북 화해협력으로 이뤄졌다. 군사정권이던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가장 남북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물론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 상품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이는 한국 경제 도약과 의식의 세계화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린 잠실종합운동장은 지금 낡고 썰렁하다. 메인스타디움에서는 지난해 불과 4건에 14일만 경기가 벌어졌고, 2013년에는 9건에 25일만 열렸을 뿐이다. 월드컵경기장 등 더 좋은 체육시설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관리자는 “건물이 오래돼 관리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오히려 공연이나 행사 같은 체육 외 행사장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그나마 종합운동장 입구에 있는 야구장은 두산베어스와 LG트윈스 홈구장으로 활용되면서 경기장 1층 상가는 ‘치킨집’과 ‘족발집’ 등이 성업 중이다.

최근 서울시는 ‘잠실운동장 지구개발계획’을 세우고 이곳을 제2의 무역센터(코엑스)로 재개발하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미 서울시는 현대그룹에 매각한 한국전력 부지와 함께 이곳을 ‘국제교류복합지구’로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계획은 잠실야구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전시·문화·숙박기능 시설을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도 현재 삼성동 일대 코엑스가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제2의 코엑스 건립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 잠실에서 시작된 서울올림픽의 역사는 다시 뒤안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미 88서울올림픽 기념관은 송파구 올림픽회관 안에 있다. 이곳에서는 세계 올림픽 역사와 서울올림픽의 각종 기념품과 영상을 볼 수 있다. 올림픽에 관련된 문헌자료도 보관하고 있다. 하루에 300~400명, 방학 때는 500~600명이 이곳을 찾는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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