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제주 서귀포시 말질로 187번지, 여기가 내 주소이자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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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 “해군기지 들어서는 건 기정사실이라는 말이 제일 화 나”

동생은 사살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화면에 동생이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붙들고 울었다. 어머니를 감싸 안고 그도 함께 울었다.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역사의 기념비적인 아들이 될 것입니다.” 1989년의 일이다. 문정현 신부의 동생 문규현 신부는 대학생 임수경씨와 함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중국을 거쳐 북한에 들어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둘은 일본, 서베를린, 동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일정을 마치고 평양에서 남한으로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의 문제가 남았을 때다. “군사분계선을 넘어라. 제3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정현 신부는 동생에게 말했다. 군사분계선을 넘다가 사살될 위험도 있었다. 그래도 넘어야 했다. 당시 문정현 신부는 전북 익산 창인동 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일하고 있었다. 신자들과 젊은 신부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너무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기는 몸으로 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평화를 옭아매는 족쇄들이 툭툭 끊어지게 된다. “당시 내 말을 듣고 문규현 신부도 울었다고 하더라. 참 힘들었고 나도 극복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몸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평화란 몸을 던져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말로 하는 평화는 관념이다. 몸을 던졌을 때야 평화는 희미한 실체를 드러낸다. “평화는 참 어렵다. 쉽지가 않다.”

8월 3일은 강정마을이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을 시작한 지 3000일 되는 날이다. 3000일을 보름 남짓 앞둔 7월 20일 제주 강정마을에서 문정현 신부를 만났다. 제주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30m쯤 떨어진 작은 천막. 천막 안 작은 테이블 앞에서 문 신부는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서각용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변을 좀 걷고 11시 미사를 준비하기 전까지 서각을 한다. 여기저기서 주워 온 나무로 마음에 와 닿는 성서 구절을 새긴다.” 해군기지는 올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제 제주해군기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됐을까. “내가 제일로 화가 나는 소리는 오다가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제주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건 기정사실이 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다.” 완공된다고 해도 거짓이 참이 되고, 사기가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은 감추어질 수 없다. 진실은 죽지 않는다. 진실은 언젠가는 되살아난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말들에 힘이 실리려면 우리들이 끝까지 그 거짓과 폭력을 견뎌야 한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문정현 신부가 지난 7월 20일 제주해군기지 공사현장 앞 천막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박송이 기자

문정현 신부가 지난 7월 20일 제주해군기지 공사현장 앞 천막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박송이 기자

“완공해도 거짓이 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3000일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미사도 중단할 수 없다. 오전 11시 미사는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된다. 보수 언론은 그를 강정마을의 ‘외부인사’로 소개한다. 마을주민들과 분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가 깨지고 고통이 서린 장소 어디든 그에게는 ‘안’이다. 대추리가 그랬고, 용산이 그랬고, 강정이 그랬다. “강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이다. 이 곳이야말로 고난의 자리이고 우리들의 말로 하면 십자가의 자리다.” 보수언론의 ‘외부인사’ 공세가 무색하게도 그는 사실 강정마을 주민이다. 해군기지 문제가 처음 불거진 2007년부터 강정에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강정과 군산을 왔다갔다 하며 그가 속한 ‘평화바람’ 식구들과 함께 장사를 했다. 갈치를 팔고 전복을 팔고 젓갈을 팔아서 돈을 벌어 해군기지 반대투쟁 자금에 보탰다. “그러다가 도저히 강정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 죽겠더라. 2011년 7월 3일 보따리 싸들고 아예 들어왔다. 주민등록지도 옮겼다. 제주 서귀포시 말질로 187번지. 여기가 내 주소이자 무덤이다.”

“시작부터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그는 해군기지 건설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거짓말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1900명 주민 중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87명을 모아서 주민의 의견으로 둔갑시켜버렸다. 나중에 재투표해 보니 94%가 반대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미 의견을 수렴했다면서 공사를 강행했다.” 국방부가 기지 건설을 강행하자 국회에 호소했다. 예산 편성을 막기 위해 마을 대표들과 국회를 돌아다니며 여야를 막론하고 설득했다. 국방부와 해군·경찰의 물리적인 압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소극적이었다. “정치권은 여야 비슷했다.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냥 지나가는 일이라는 식이었다. 국회는 예산을 넘치게 편성했고, 국방부는 공사 중단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일사천리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그 사이 주민들은 죽어갔다.” 거짓말은 지금도 반복된다. “해군이 가정통신문으로 주민들에게 절대로 주민들 동의 없이 군관사를 강정마을에 짓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군관사 72세대를 강정마을에 지어버렸다.” 해군은 지난 1월 30일 경찰력을 동원해 행정대집행을 강행한 후 군관사를 지어올렸다.

국방부가 밀어붙이고 정치권이 방조하는 동안 문정현 신부와 강정 주민들에게 쌓이는 건 소환장과 벌금이었다. “집에 가면 소환장이 쌓여 있다.” 마을 어귀에는 해군기지를 저지하는 싸움을 하다 처벌을 받은 이들의 이름이 걸려 있다. 체포 연행자 673명, 누적 구속자 38명이다. “공안정국은 유신 때보다 더 교묘해졌다. 권력과 자본이 합작을 해서 탄압을 한다. 업무방해, 손해배상 같은 민사소송이 많아졌다. 재산이 압류되면 도리가 없다. 사람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도 벌금형과 집행유예를 합쳐 유죄 확정된 판결만 세 건이다. 2012년 3월 구럼비가 폭파됐을 때다. 폭약이 육로로 이송될 거라 생각하고 구럼비로 가는 다리를 막았다. 그러나 폭약은 육로가 아니라 바다로 들어왔고 그는 교통방해, 업무방해, 공무집행방해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노역을 살려고 했다. 노역에 들어가기 전날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이 찾아왔다. “강우일 주교님이 찾아와서 내가 감옥에 들어가면 당신이 잠을 잘 수가 없다면서 벌금을 대신 내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말하니 노역을 살 수가 없었다.” 해군기지 반대운동 과정에서 주민들이 물어야 할 벌금은 4억여원에 달한다. “많은 주민들이 민사소송 중이다. 법원은 주민과 활동가들에게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내렸다. 해군기지 공사영역에 침범해서 공사를 방해했다며 건당 200만원씩 벌금을 물렸다. 나도 지금 소환장이 엄청나게 쌓였는데 언제든 실형을 받아 징역을 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징역살이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위법행위를 한 건 마을 주민이 아니라 해군이다.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이라는 게 없었다. 전두환 정권 때 만들어진 중앙토지수용위원회가 인정을 하면 국방부에서 공탁을 걸고 빼앗아갈 수 있다. 국방부가 해군기지는 공익을 위해서 수용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다 빼앗아간다.”

“온나라의 평화가 강정으로부터 시작”
해군의 물리적인 힘과 긴 시간의 투쟁 속에서 좌절하고 자포자기한 주민들이 늘었다. 주민들 간 갈등의 골도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11시 미사에는 활동가와 인근 주민들을 합쳐 20명의 사람들만이 모인다. “물 좋고 사람살기 좋기로 소문난 500년 역사인데 해군기지가 들어와서 두 쪽이 났다.” 힘이 빠지고 싸우는 과정에서 갈라서는 주민들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자신만은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이 운동권 활동가들이 아니진 않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분들, 고기 잡고 농사 지어서 가족들 부양해야 하는 분들이다. 이런 저런 위협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켜내야 하는 게 우리다. 나를 포함해 수사님, 신부님은 감옥 가는 것은 걱정 안한다. 주민들 대신해서 가면 된다.” 개발논리에 주민들이 넘어가기도 한다. “주민들의 생각은 수시로 변한다. 지난 1월 30일 군관사 짓겠다고 행정대집행을 해 좌절하는 가운데에서도 ‘제주의 아들’이라며 원희룡 도지사에게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이름의 공사 강행이 계속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반대하는 주민들 간에 분열이 생기기도 하는데, 안타깝지만 그게 인간사회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 해군기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 원죄는 해군기지라는 것만 늘 생각한다.”

해군기지는 그에게 ‘죽음의 문화’다. 얼마 전 그는 ‘죽음의 문화’에 맞선 ‘생명의 문화’를 만들 장소를 지었다.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다. “내가 재작년에 돈벼락을 맞아서 이 돈으로 지은 것이다.” 강정마을에는 천주교 공간이 없었다. 돈이 있다면 늘 공소(천주교에서 본당보다 작은 단위)를 짓고 싶었다. 돈벼락이란 다름 아닌 형사보상금.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는 3·1 민주구국선언이 있었다. “거기에 연루돼 구속된 11명 중에 내가 들어 있었다. 문익환 목사, 김대중 전 대통령, 문동환 목사, 안병무 박사 등 11명이 구속됐다. 나는 2년 반을 감옥에서 살다 나왔다.” 그는 당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긴급조치 9호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성이 확인되면서 2013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보상금으로 1억5000만원이 들어왔다. “그 돈이 나와서 여기에 땅을 샀다. 딱 땅 살 만큼의 돈이더라. 강우일 주교님께 이 사실을 알리니 ‘공소를 지읍시다’라고 하면서 종잣돈으로 5억원을 내놓으셨다. 작년 9월 말부터 공사가 시작됐고, 지금 완공이 됐다.”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는 생명평화를 주제로 한 모든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다. “해군기지가 들어가면서 여기는 긴장관계의 블랙홀이 됐다. 이것을 저지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종교인인 만큼 성서에 입각한 생명의 문화를 가지고 죽음의 문화와 대적할 수 있도록 하겠다. 해군기지가 완공되면 6000~7000의 군인들이 돌아다닐 것이다. 그 때 마을의 문화가 어떻게 될까. 해군기지 시설에 비하면 다윗과 골리앗 같은 외모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비좁도록 드나들며 생명문화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평화와 관련된 강연만 하거나 아카데믹한 일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바로 강정의 싸움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그에게 기본원칙이다. 근본적으로 해군기지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그가 미사 때마다 부르는 노래다. “나의 몸을 담고 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내려갈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게 우리의 신분이다. 자포자기하면 진실은 묻힐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우리가 그렇게 살면 그 분께서 가만 안 놔둘 것 같다. 이집트에서 수백명이 탈출해 어떻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나. 자포자기하지 않는 우리의 영혼을 그분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고, 나는 그 믿음으로 살 것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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