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우 강제수용소, 끝나지 않은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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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의 흔적을 따라 걷는 마지막 일정. 다하우 강제수용소(Dachau concentration camp)로 가는 길입니다. 뮌헨 중앙역에서 전철 S2를 타고 뮌헨에서 약 16㎞ 떨어진 ‘다하우’라는 작은 시골마을을 찾아갑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여름 날씨 같지 않게 바람도 차갑습니다. 그곳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4만1500명에 달한다는 것을 상기해서 그런 것일까요. 마음마저 스산합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견학을 가는 청소년 20여명이 전철 한 칸을 그득 채웠습니다. 역사 동아리 모임인 듯합니다. 다하우로 가는 전철 안은 평일에도 견학을 가는 학생들로 북적입니다. 뮌헨 시내 김나지움(중·고등학교) 역사수업의 많은 시간이 그곳 현장에서 이뤄진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독일 전역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추모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다하우 역에 내려서 726번 버스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종점에서 내리면, 다하우 강제수용소가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닿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수용소를 개방한 다음에야 주민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고 합니다. 군수품 공장이 있던 대지에 세워진 수용소는 나치가 건설한 최초의 강제수용소이자 다른 강제수용소들의 원형이 됐습니다.

박물관과 다하우 수용소를 대표하는 조형물

박물관과 다하우 수용소를 대표하는 조형물

나치가 만든 최초의 강제수용소
2차 대전이 끝난 뒤 수용소는 철거됐지만,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끝나지 않은 역사를 반성하자는 의미에서 수용소는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됐습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함께 나치 강제수용소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곳은 히틀러 집권기인 1933년 3월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를 잡아두기 위해 세워졌고, 이후 유대인, 동성애자, 전쟁포로를 가두는 데 쓰였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기록을 보면, 반나치를 외치는 3000여명의 수도사, 목사, 의학 실험 대상자들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게오르크 엘저(Georg Elser), 신문 ‘올바른 길’을 발행하여 히틀러의 인종주의를 비판했던 프리츠 게를리히(Fritz Gerlich)와 같은 사람들이 이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안내센터에 가서 입장권을 구입하려 했으나, ‘이 곳은 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곳이므로 당연히 무료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가야겠다는 부담감이 밀려왔습니다. 이곳 박물관엔 당시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잔인하고 혹독했던 행위를 남긴 사진자료가 전시돼 있고, 당시의 기록필름을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도 있습니다. 그들이 머물렀던 막사 내부에는 들어가 보겠지만, 가스실과 사체 소각로 시설에는 차마 들어가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수용소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옵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를 주리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던 가로 1m, 세로 2m 높이의 철문은 이제 볼 수 없습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사진을 찍던 상징적인 곳이었는데, 2014년 11월 1일 밤에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다하우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도 2009년에 같은 문구가 새겨진 철문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신나치의 소행이었을까요? 며칠 뒤 폴란드 북부의 한 마을에서 철문을 찾았지만, 세 덩어리로 파손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다하우의 철문 도난 사건은 아직 미궁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모든 죄수들이 이 문을 지나 수용소에 들어갔다.-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진 쇠문은 2014년에 도난당했다.

모든 죄수들이 이 문을 지나 수용소에 들어갔다.-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진 쇠문은 2014년에 도난당했다.

정문을 통과하자, 광대한 연병장이 나옵니다. 그 순간, 탕. 탕. 탕. 탕!

제 귀엔 네 발의 총성이 들려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지 2주 만에 유대인 4명이 이곳에서 총살당합니다. 유대인 학살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15년 동안 4만1500명이 희생된 곳. 견학 온 학생들도 입구에 들어서자 말소리부터 줄입니다.

넓은 연병장, 중앙에 가서 서 봅니다. 30개국 이상, 20만명의 죄수들이 이곳에 수용돼 있었고, 그 중 40% 정도가 유대인이었다고 합니다. 매일 새벽, 이곳에 서서 1시간 동안 조회를 하는 동안, 쓰러지는 자는 바로 가스실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안내책자에서 읽은 문구가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잠시 몸이 휘청, 현기증이 이는 듯합니다.

(왼쪽부터) 1 막사 내 화장실 2 수용자들의 유품(옷)

(왼쪽부터) 1 막사 내 화장실 2 수용자들의 유품(옷)

도난당한 철문, 범인 아직도 몰라
정면에 보이는 곳이 사진과 수용자들의 유품, 영상자료를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입니다. 다하우 수용소가 운영된 12년의 기간을 기억하자는 의미의 상징적인 숫자 ‘1933~1945’가 담장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보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조각가 Nandor Glid가 만든 구조물입니다. 탈출을 시도하다 전기철조망에 걸려 신음하는 사람들의 형상처럼 보입니다. 전기철조망, 7개의 감시탑, 옥사 바로 옆에 세워진 즉결처형장을 보니 몸도 마음도 새까맣게 타버린 수용자들의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수용소는 32개의 막사로 구성된 구역과 화장터 구역으로 나뉩니다. 옥사의 안뜰은 죄수를 즉결처형하는 곳으로 사용됐다고 하니, 그들의 일상은 즉결처형의 공포가 늘 함께했을 테지요. 박물관 내부의 기록사진과 영상, 그리고 유품을 둘러본 후 수용자들이 머물던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촘촘하게 붙어 있는 3층 침대를 보자,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보았던 귀도가 머물던 방이 떠오릅니다. 강제노역에 지친 자들이 닭장 속 닭처럼 사육당하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화장실도 세면실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집니다.

각 막사마다 3층 침대에 수용자들이 닭장 속의 닭처럼 생활했다.

각 막사마다 3층 침대에 수용자들이 닭장 속의 닭처럼 생활했다.

32개의 막사가 있던 곳은 이제 터만 남았습니다. 1944년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이송돼 온 여성수감자들도 많았다고 하니, 그 사이를 거니는 동안 귀도의 아내 도라가 다가와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내 남편을 혹시 보지 못했니?” 잠시 쉬어가기로 합니다. 제2, 제3의 귀도들이 이곳에서 귀도처럼 죽어갔겠지요. 넓은 수용소 곳곳을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4만1500명의 신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와서 몸보다 마음을 앓습니다.

도난당한 출입문에 새겨져 있던 역설적인 문구 ‘노동이 자유를 주리라’. 수용자들은 가혹한 노역에 동원되는 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과 나치 반대자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병들어 노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잔인하게 살해됐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매우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독일 기업들은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강제노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었기에, 그들은 나치를 지지하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수용소 연병장

수용소 연병장

희생자 기억 프로젝트 ‘발 아래의 돌’
독일은 2000년 8월 설립한 ‘기억·책임·미래 재단(EVZ)’을 통해 2차 대전 시기 나치 수용소 등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던 약 4000만명의 피해자들 중 생존해 있는 170만명에게 배상을 했습니다. 세계 100여국에 흩어져 살아가는 이들에게 배상이 이뤄진 건 마땅하지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강제노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은 기업들이 늦게나마 반성의 의미에서 출자한 돈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의 역사 반성, 그 노력은 독일의 거리를 무심코 걷다가도 만날 수 있습니다. ‘게슈비스터 숄 플라츠’(Geschwister-Scholl-Platz), 반나치 저항운동 단체인 ‘백장미’의 중심 멤버였던 ‘숄 오누이’ 광장에서 시작한 홀로코스트 기행이 지금 이곳 다하우에 이르게 했으니까요. 타국에서 찾아온 이방인에게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며 말을 거는 홀로코스트의 흔적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발 아래의 돌’ 프로젝트 또한 시민들이 나서서 만든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나치에 끌려가 숨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가 살던 집 길가 보도블록에 금속판을 박는 프로젝트입니다. 정사각형 금속판에는 희생된 사람의 이름, 나이, 어디로 끌려가서 어떻게 희생됐는지, 그의 일생이 간략히 기록돼 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딱 한 번 ‘발 아래의 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그를 위해 잠시 기도를 올렸습니다. 당신도 독일 여행길에서 한 번쯤은 ‘발 아래의 돌’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시민들은 6000명의 희생자 이름을 그의 집 앞에 새기고 그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과거 현장의 사진(사진 위) 다하우의 과거(사진)와 현재(막사) (사진 아래)

박물관에 전시된 과거 현장의 사진(사진 위) 다하우의 과거(사진)와 현재(막사) (사진 아래)

지난주에 베를린을 걸으면서 만났던 유대인 박물관과 비석의 들판을 기억하나요? 2차 대전 책임을 기억하려는 기념관과 추모시설은 물론, 과거를 기념하는 방식은 독일 내에서 점점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백발의 유대인 생존자들, 신나치 세력의 협박을 이겨내며 시민들의 협조와 공감을 이끌어낸 시민운동가, 과거를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독일 정치가들, 그리고 청소년들이 모여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물론, 독일 전역에 이런 분위기만 있는 건 아닙니다. 1950년대에는 독일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경제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책임과 반성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변화가 시작된 건 유대인 학살에 앞장선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시작된 때부터였습니다. 이 재판이 독일 언론을 타면서 나치 과거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68혁명’입니다. 독일 청년들이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따져물으며 함께 반성하기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성과 책임 요구는 추상적인 논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독일 시민들까지 나치에 협력한 이유는 무엇이며, 독일인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수많은 토론과 논쟁이 지속되면서 시민들의 참여는 늘어났습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독일인의 90%가 책임지고 반성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숙한 고민과 토론을 거친 구체적인 합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 아쉬운 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잘못 자각하는 것은 독일국민의 의무”
“역사에는 결말이 없다”. 지난 5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곳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찾았을 때 남긴 말입니다. 그는 “우리 모두 책임이 있으며, 잘못을 자각하는 것은 독일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라고 강조했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반성과 용서’를 주제로 한 행사는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 유럽은 유럽연합(EU)을 구축해 연대하는 반면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여전히 역사문제 앞에서는 갈등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동북아는 왜 이토록 다른 결과를 맞이한 것일까요. 가해국가의 반성과 사과, 피해국가의 용서는 어디서 비롯되고 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반성하지 않는 가해국으로부터 어떻게 사과를 받아낼 것인가? 우리는 사과를 받는 것에만 집중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폴란드의 냉철한 지성인 카지미에르스 부이치스키 교수(67)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폴란드와 독일이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민간 교류 덕분이었다. 꾸준한 민간 교류를 통해서 양국의 공통이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의 과오를 한번에 바로잡고 사과 받으려는 조급함이 문제다. 시간을 두고 전체 역사를 복원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지만, 유럽 국가들의 화해가 실은 어색한 구석이 많습니다. 성선설에 입각한다 하더라도 용서와 화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성악설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한·일, 한·중, 중·일관계 속에서 반성, 사과, 화해는 말일 뿐이지 서로의 마음속에 와닿는 언어일 수 없는, 동북아의 불행한 현실이 떠오릅니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외칠 것인가, 힘 없는 감성의 사람들과 천천히 함께 갈 것인가? 물론 많은 사람들은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감성의 사람들만 있다면 문제 해결은 더욱 까마득할 것입니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독일인들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우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독일의 질문이 일본을 거쳐 어느새 내 앞에 와 있습니다. 여기는 다하우, 끝나지 않은 역사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박상미의 공감스토리텔링-홀로코스트, 흔적을 따라 걷다 <하>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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