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시대 음악가 카를 오르프 ‘반성의 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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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오르프는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양식에 독일 민족정신의 근원, 그 가치, 그 미학을 담아냈다. 대표작 <카르미나 부라나>는 독일적인, 지극히 독일적인 음악으로 독일 민족정신의 낭만주의와 영웅주의를 대규모 합창단과 거대한 관현악단에 담아낸 곡이다.

군산에 갔었다. 군산에 갈 때마다, 서울이나 일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도착하면 늘 저녁 풍경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금강 하구의 퇴적 토사 위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1990년 금강하굿둑이 준공되었고 그 이후 군산 신항만, 새만금방조제, LNG발전소, 군장대교 등의 공사에 따라 금강 하구의 강물과 바닷물은 완전히 차단되어 연안어업은 실종되었고, 퇴적된 토사가 군산의 항만 기능까지 위축시켰다. 그 위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채만식 문학관을 찾아갔다. 채만식은 빛나는 작품을 남긴 작가로서의 측면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와 그 이후의 역사 청산이라는 이중 과제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다. 그는 1940년 7월에 발표한 <나의 ‘꽃과 병정’>을 시작으로 해방 전까지 14편의 친일 성향 글을 남겼다. 해방 이후 채만식은 <민족의 죄인>을 썼다.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는 글인데, 변명이나 이해를 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처절하고 뼈저린 글이다. 해방 이후에는 진실로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는 글이나 발언 이외에는 그 어떤 도드라진 사회 활동이나 작가단체 활동을 완전히 사양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 무렵 친일을 했던, 더욱이 적극적으로 했던 일부 작가들은 그 후로도 문단 권력을 쥐고 흔들지 않았던가.

2차대전을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에서 거세게 일어난 영화 운동 ‘네오 레알리스모’를 주도했던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전쟁이 끝난 후 곧장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전쟁 직후 독일의 수도이자 히틀러의 도시였던 베를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1948년에 발표한 영화 <독일 0년>이 그 작품이다.

전북 군산시에 위치한 채만식 문학관. | 정윤수

전북 군산시에 위치한 채만식 문학관. | 정윤수

대비되는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반성
영화는 충격적이다. ‘네오 레알리스모’를 주도한 감독답게 로셀리니의 카메라는 처참하게 파괴된 베를린을 매우 건조하게 담아낸다. 마치 다큐멘터리 화면 같다. 그리고 12살 소년 에드문트와 그의 가족, 친구, 교사들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영화 속 어른들은 전쟁에 대하여 한 줌의 죄의식도 없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게임’에서 패배한 굴욕감에 사무쳐 있다. 파괴된 도시만큼이나 베를린 사람들 마음이 다 찢어지고 파괴된 것이다. 그런 살벌한 기운 속에서 소년은 포격으로 인하여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최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차대전 패전 70주년을 앞두고 또다시 과거 전쟁 때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과오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다. 지난 5월 2일, 주례 팟캐스트를 통해 메르켈은 “누구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다. 우리 독일인들은 나치 시대에 행해진 일들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주의 깊고 민감하게 대응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메르켈 총리의 충정을 깊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수십년에 걸쳐 독일 정치인들이 2차대전을 끝없이 복기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는 일을 지극히 높게 평가한다. 또 하나의 전범국가 일본이 교묘한 언사로 ‘통석의 념’이나 표하는 것에 비하면 진실로 뜨겁고 놀라운 일이며, 그것도 일시적이지 않고 수십년에 걸친 지속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오히려 배울 점도 있다. 특히 친일 잔재 청산은커녕 오히려 친일의 과오가 현대사의 그늘로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독일 총리의 거듭된 사과는 일본 정부에 대한 각성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제대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일그러진 거울을 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역대의 독일 지도자들이 거듭 2차대전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은 그들의 사회 내면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어떤 그릇된 충동이나 몰역사적인 행동을 제어하려는 의식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매우 격렬하고도 기이한 상황이 복잡하게 발생했을 때 혹시 독일 사람 중 일부는 과거의 망령을 되풀이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이를 쉼없이 제어하고 억누르기 위하여 그들은 끝없이 반성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1956년 카를 오르프(오른쪽)의 모습. | 위키백과

1956년 카를 오르프(오른쪽)의 모습. | 위키백과

노벨상 받은 귄터 그라스에 대한 논란
지난 4월 13일(현지시간),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 또한 평생을 이 과중한 짐을 지고 살았다. 그는 199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6년에 자서전을 펴냈는데, 이 자서전에서 그라스는 자신이 17살 때 히틀러의 나치 무장 친위대에 징집당해 복무했다고 고백했다. 곧 독일 사회는 그라스의 고백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왜 노벨상을 받은 다음에야 고백했느냐는 신경질적인 비판과 어릴 적의 과오를 평생 동안 뛰어난 작품과 급진적인 사회활동으로 씻어왔으므로 그의 고백은 결코 알리바이가 아니라는 지지가 엇갈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17살 때 친위대에 징집당하여 활동한 것을 쏙 뽑아내서 찬반을 벌이는 게 아니라 그 이후 그가 지속적으로 전개한 작가로서의 다양한 활동이 과연 어린 시절의 징집 과오를 만회할 만큼 진솔하고 뛰어난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문제점을 거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라스는 평생에 걸쳐 높은 수준의 작품과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통해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를 옹호했다.

이런 생각을 지난주 중에 강의를 하면서 줄곧 생각했다. 히틀러 시대의 음악가 카를 오르프에 대한 강의였는데, 오르프의 음악과 생애를 평가하자면 위와 같은 사실들을 복합적으로 검토해야만 그 마음속의 파란들을 만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오르프는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양식에 독일 민족정신의 근원, 그 가치, 그 미학을 담아냈다. 대표작 <카르미나 부라나>는 독일적인, 지극히 독일적인 음악으로 독일 민족정신의 낭만주의와 영웅주의를 대규모 합창단과 거대한 관현악단에 담아낸 곡이다. 오르프의 작품들은 거대한 정치적·군사적·문화적 스케일로 유럽을 압도하고자 했던 히틀러 나치의 독일 민족주의 미학과 부합하는 곡으로 승인되었다. 실제로 오르프는 히틀러 체제 하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카라얀이나 뵘 같은 히틀러를 열렬히 추종했던 지휘자들은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흡사 전쟁 광시곡처럼 연주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백장미 사건’이 터졌다. 1943년 2월 17일, 뮌헨대 학생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가 대학 광장에 반나치 유인물을 뿌렸고, 2월 22일 거의 순식간에 처형되고 말았다. 당시 뮌헨대 총장 쿠르트 후버 교수도 처형됐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쓴 이미륵은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투옥된 후버 교수를 면회하고 먹을 것을 넣어주고 슬픔에 빠진 가족을 위로했다.

오르프는 어떠했는가. 바이에른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오르프는 그러나 백장미 사건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그리고 그 나름의 독일 민족주의 소신에 따라, 가까이 교류했던 뮌헨대 후버 총장의 고통을 외면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 재판정에서 오르프는 자기가 백장미 그룹의 숨어 있는 조력자였고 후버 교수를 위해 나름대로 활동했다고 발언했으나 이는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

전쟁이 끝난 후 오르프는 자기 나름대로 고통의 시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은거하듯이 살아갔다.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오르프는 주제의식이 선명한 작품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오직 어린이 음악교육을 위한 독특한 교습법을 완성하는 데 몰두했다. 아이들의 언어와 신체 동작을 음악에 결합시키고 리듬을 바탕으로 한 즉흥적 놀이로 음악을 익혀나가는 오르프 교습법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채만식과 오르프. 그래도 그들은 그들의 역량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주 작은 공간만 확보하고는 남은 생애를 그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살았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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