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전염병 ‘하청’ 창궐하는 당진·서산·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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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산업재해 현황판에 8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정규직 환자들이다. 힘 있는 정규직 사무실에 ‘비정규직 산업재해 현황판’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충남 당진의 고즈넉한 들녘에 밤새 내린 눈이 설경을 빚어 놓았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서해대교가 보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철강공장을 지난다. 동부제철, 동국제강, 현대제철로 이어지는 송악철강단지다.

서산 대산석유화학단지 삼성토탈구조. | 박점규

서산 대산석유화학단지 삼성토탈구조. | 박점규

동부제철 맞은편 2층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조사무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투표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 10월 31일 하청업체 사용자들과 임금 및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노조 설립 2년 만에 찾아온 평화다. 2012년 10월 15일 30명에서 출발한 노조가 880명으로 늘었다. 보름 전에도 청소업체 50대 아주머니들이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 만들기 전에는 일이 힘들고 월급이 적으니까 이직률이 엄청 높았어요. 현장에서는 노동조합이 살아남겠느냐는 의문이 많았는데, 요즘은 노조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조민구 지회장의 머리에 흰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갈 길이 멀다. 현대제철 당진공장에만 150개 업체 9000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일한다. 고작 10%가 노조로 뭉쳤다. 내년에는 2000명이 목표다. 노조 역량도 강화하고, 사무실도 공장 안에 만들고, 정규직 소송도 준비해야 한다. 할 일이 태산이다.

현대제철 당진공장 사내하청 9000명
여의도 면적의 3배인 현대제철. 공장 안 도로 가운데 석탄을 실어 나르는 열차가 다닌다.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고로가 있는 일관제철소는 포스코와 현대제철뿐이다. 지난해 9월 3고로가 가동됐다. 현대제철은 현대하이스코에 이어 동부특수강도 인수한다. ‘쇳물에서 자동차까지’라는 정주영 전 회장의 유언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 재벌은 통제 불가능한 공룡이 되고 있다.

현대제철 정규직 박기선 비정규직사업부장은 1995년 이곳 한보철강에 입사했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로 강제휴직을 당했다가 3년 뒤 복직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18명이 숱한 어려움을 견디며 금속노조 한보철강지회를 지켜냈고, 2004년 현대제철로 바뀌었다. 조합원은 3827명으로 늘었고, 10년 전 2000만원이던 연봉은 3배가 됐다. “그때는 힘들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살아남아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재미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투쟁해 보지 않고 배고파 보지 않은 대다수 조합원들은 그 시절을 모르죠.” 노조는 교육위원회를 만들어 신입 조합원들에게 역사를 교육하고 있고 반응도 좋다.

점심시간, 특식으로 나온 해물탕을 기다리는 식당 줄이 길다. 작업복 왼편에 현대스틸이라고 새겨진 직영도, 하청업체가 적힌 노동자도, 공장을 짓는 노동자도 같은 밥을 먹는 식구(食口)지만 처지는 천지 차이다. 고용형태 공시에 따르면 현대제철 정규직은 1만명, 사내하청은 1만2000명이다. 생산직만 따지면 사내하청 비율이 70%에 이른다. C지구 공장을 짓는 건설플랜트 노동자가 한때 1만명이나 됐다. 박기선 부장은 공장 안에 비정규직 노조사무실을 마련해주고 싶지만 반발이 있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회사를 상대로 정규직만 싸우는 건 점점 힘들어져요. 비정규직과 같이 싸워야 확실한 타격을 준다는 걸 우리도 인식하고 있죠. 의식을 바꿔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노조 산업재해 현황판에 8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정규직 환자들이다. 2013년 한 해에만 당진공장에서 10명의 하청노동자가 죽어 노동계로부터 ‘최악의 살인 기업’으로 뽑혔다. 얼마 전 노동부 조사 결과 당진공장이 2011~2013년 모두 20건의 산업재해를 은폐해 1위를 차지했다. 부친의 유언으로 만든 제철소, 비정규직 무덤 위로 쇳물이 흐른다. 힘 있는 정규직 사무실에 ‘비정규직 산업재해 현황판’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당진 화력발전소 풍경. | 박점규

당진 화력발전소 풍경. | 박점규

굵어진 눈을 헤치고 석문방조제를 지나 당진 화력발전소에 도착했다. 발전노조 김영일 당진화력지부장은 12년 전 발전, 가스, 철도 민영화에 맞서 38일간의 역사적인 파업을 했다. 쌍용차를 진압한 이명박 정권이 복수노조를 무기로 노조를 깨부수던 시절, 제조업은 금속, 공공은 발전노조가 타깃이었다. 한국동서발전은 직원들을 겉과 속이 빨갛다는 뜻의 토마토, 사과, 배로 구분했다. 순위까지 매겨 128명을 타향으로 보냈는데 기업노조에 가입하면 빼줬다. 1300명에 달하던 조합원이 300명으로 줄었다. 지난 10월 26일 서울중앙지법은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해 회사가 노조에 4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당진화력 ‘토마토’ 직원들의 귀양살이
2011년 강원도 동해로 강제발령을 받아 3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올해 당진으로 돌아온 그는 노조 지부장을 맡아 직원들을 만났다. 여러 명이 발전노조로 되돌아왔지만 승진, 전출, 해고의 협박 앞에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판결이 나고 국정감사 대상이 되면서 과거에 비해 누그러들었지만 차별과 탄압은 여전하다. 얼마 전 신입사원 중 ‘송곳’ 만화를 보고 노동조합에 온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얍삽하게 살지 않았고 힘들었지만 정의롭게 살았다고 얘기해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민주노조를 지켜나가고 있어요.”

에버랜드 땅보다 넓은 당진 발전소를 둘러본다. 1~8호기가 가동되고 있고, 9~10호기를 짓고 있다. 화력발전소를 돌릴 석탄을 쌓아 놓은 저탄장을 지난다. 배에서 석탄을 내려 옮기는 컨베이어벨트가 공중에 떠 있다. 150억을 들여 만들었다는 전력홍보관, 신입직원이 한국동서발전과 당진화력을 소개하고 발전 원리를 알려준다. 용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다. 자기 회사도 아닌데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홍보하고, 방문객을 모시고 남의 회사 굴뚝에 오른다.
건설노동자들이 석탄가루가 날아다니지 않는 400억짜리 옥내용 저탄장과 보일러, 굴뚝을 만들고 있다. 지난 11월 11일 전국플랜트노조 충남지부가 전문 건설업체의 직장폐쇄에 반발하며 당진화력 앞에서 집회를 하다 29명이 연행되고 한 명이 구속됐다. 현대제철소를 만들고 화력발전소를 세우는 사람들이 처한 오늘이다.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사무실. | 박점규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사무실. | 박점규

서산시 대산석유화학단지. 화학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솟구친다. 롯데케미칼과 LG화학 입구. 2007년 민주노총 구재보 조직국장과 김희재씨가 매일 새벽 5시 30분 이곳에 와서 방송차를 세워놓고 노동조합을 알렸다. 두 달 만에 화학공장을 짓고 있던 400여명의 플랜트 노동자들이 모였다. 전국플랜트노조 충남지부를 결성하고 주5일 근무와 표준임금을 요구하며 싸웠다. 3년 전부터는 2000명씩 모이기 시작했고, 7년 만에 조합원 수가 1만명으로 늘었다. 공단 위쪽으로 올라가자 이재용이 삼성테크윈, 종합화학, 탈레스와 함께 한화에 내다 판 삼성토탈이 보인다. 정규직 1500명, 사내하청 800명이 일한다. 매각 발표 직후 한 온라인 직거래 사이트에는 삼성 배지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올라왔다. 노조 없이 살아온 삼성맨들이 이재용의 경영 승계를 위해 배지보다 쉽게 팔려나간다. “피땀으로 일군 회사 매각이 웬 말이냐?” 회사 대문에 걸린 현수막에서 결기가 아닌 측은함이 느껴진다. 삼성토탈 노동자들이 11월 28일 노조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회사는 위로금을 검토하고 있단다. 고용을 5년 보장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5년 뒤에는? 삼성맨들이 정말 싸울 수 있을까?

100% 비정규직 공장 서산 동희오토
서산산업단지로 향한다. 국내 판매대수 1위를 달리는 기아차 모닝공장 동희오토를 축으로 자동차단지가 조성돼 있다. 기아차에게 모닝과 레이의 생산을 위탁받아 납품하는 유일한 완성차 외주 하청공장이다. 18개 사내하청 소속 1200명 전원이 하청노동자다. 태어나서는 안 될 100% 비정규직 공장이다. 민주노총 구재보 국장은 며칠 전 부품사 비정규직 노동자의 전화를 받았다. 주 3일은 아침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3일은 밤 11시까지 3개월째 일하고 있다. 발이 퉁퉁 부어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짝짝이 신발을 신고 일하고 있다. ‘100% 하청공장’이라는 악성 전염병이 서산 자동차단지를 창궐하고 있는데도 관심을 갖는 정치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눈발이 더욱 굵어졌다. 한 시간 남짓 눈길을 위태롭게 달려 도착한 태안화력발전소. 부당해고를 철회하라는 천막 너머로 굴뚝 연기가 치솟는다.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지도부 구속과 사퇴, 휴게시간 30분을 자율휴식으로 바꾼 노사합의안 부결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태안화력 9·10호기 발전소를 짓는 원청회사는 SK건설, 하청은 성창E&C다. 지난 11월 성창은 직장폐쇄를 하고 조합원 7명 해고, 8명 정직을 때렸다. 노조가 현장 복귀를 결정했지만 직장폐쇄를 풀지 않고 각서를 쓴 조합원들만 일을 시킨다. 이철 비대위원장이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하루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좁은 천막으로 들어온다. 심각한 표정들이다. “주차·월차 포함해서 일당 18만원 포괄임금제로 하자는 구만유. 계산해보니까 먼저 번보다 후퇴했어유.” “계약서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만두라고 하고 있어요. 지금 60~70명 들어가 있는데 끽 소리도 못하고 썼다고 하더라고요.” “원청인 SK가 진행하고 있대요. 울산 플랜트노조 깬 것도 SK고, SK와 성창이 지금부터 인력관리를 하겠다는 것이죠. 여기서 밀리면 내년에 임단협은 어려워져요.” “험란하네.” “더러워서 발전소 일 하지 말고 가버려야지.” “법적 대응은 하더라도 해고 동지들이 현장 동지들 어떻게 됐든 만나는 수밖에 없어요. 2~3개월 걸려 들어가더라도.”

한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던 조합원이 일어선다. “어떡해유. 고생스러워서. 내일 또 와 볼게유.” “옆 천막에서 술 한 잔 먹고 가요.” 거친 사내들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진다.

서산에 사는 김준수씨(44)는 홍성 직업훈련원을 나와 1988년부터 일한 베테랑 배관공이다. 현대오일뱅크, 삼성토탈, 엘지석유화학, 현대제철, 당진화력….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공장이 없다. 지금은 태안화력 복합발전소의 파이프를 연결한다. 배관공은 공장의 혈관을 잇는 작업이다. 무거운 쇠를 갈고 정교하게 조립한다.

“8시간이 안 됐을 때는 유화단지에서 사람 엄청 죽었어유. 일에 쫓기고 경쟁 붙고 장시간 일하고. 연 5000~6000명 투입되는 현장에서 보통 대여섯 명이 죽었어유. 노동조합이 생긴 뒤로 한 공사에 5000명이 들어갔는데 한 명도 안 죽었죠.” 세 아이의 아빠는 아이들 학교도 가고 등산도 다닌다. 그래야 일도 더 잘할 수 있다. 8시간 노동, 표준임금제는 위태로운 생명을 구하고, 가정의 화목도 살려냈다. 그런데 회사는 옛날로 돌아가자고 한다. 공장을 짓는 사람들의 한숨이 천막에 드리운다. 그가 뼈마디 굵은 손가락을 움켜쥔다.

짙은 어둠이 삼킨 태안 산길, 폭설을 헤치고 서산으로 돌아간다. 잔업을 마친 동희오토 하청노동자들과 감자탕을 먹는다. 2010년 10월 2일. 5년의 투쟁 끝에 복직에 합의하고 이듬해부터 공장으로 돌아갔다. 지난해 여름 중국 동포에서 귀화한 황재민씨가 새벽 0시40분, 야간 중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쓰러져 뇌출혈로 반신마비가 됐다. 토요일까지 주야 10시간씩 모닝을 만들었는데 기아차도, 동희오토도, 하청업체 대신기업도, 한국노총 기업노조도 외면했다. 돌이 갓 지난 아이를 업고 아내 김려화씨가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금속노조 동희오토지회가 나섰다. 소식을 들은 기아차 화성공장 비정규직들도 함께했다. 서울 현대·기아차 본사에도 집회신고를 냈다. 사태가 커지자 하청업체 사장단이 교섭에 나왔고, 12월 4일 생계지원과 산재소송에 협조하는 내용으로 합의했다. “중국 동포인 김려화씨 동생이 한국에 14년 살았는데, 괜찮은 한국 사람들을 처음 본다고 하는 거예요.” 최진일 사무장이 해맑게 웃는다. 식당을 나와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밝게 드리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cco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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