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 떠나는 자와 소외된 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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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보름달이 밝은 가을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밤이다. 기아의 직영, 하청, 부품사 노동자 모두가 행복한 가을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청명한 하늘을 휘감은 산들바람이 분다. 수원을 빠져나온 버스가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시골길을 달린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을 향한 43번 도로. 관광버스는 노동자를 싣고 이 길을 쉴 새 없이 왕복한다. 기양관광 기사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본다. 20년 동안 기아 노동자를 태운 그의 청춘이 화성공장의 역사와 함께 운전대에 배어 있다.

지난해 3월 4일, 주야 맞교대에서 주간 2교대로 바뀐 기아차 근무시간. 1조는 오전 7시 출근해 오후 3시40분 퇴근하고, 2조는 새벽 1시40분에 끝난다. 그는 새벽 4시30분 집을 나와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지난주 야간근무 때는 낮 12시 출근해 다음날 새벽 4시에 귀가했다. “단가도 깎이고 성과급도 없어졌어요. 점점 안 좋아지니까 많이 힘들죠.” 그가 실어나르는 기아 노동자는 밤샘근무가 사라졌는데, 그와 동료들은 14시간 밤샘노동을 하고 있다.

퇴근하는 기아차 노동자들. | 박점규

퇴근하는 기아차 노동자들. | 박점규

주간 2교대, 여가 늘었지만 연대는 줄어
화성공장 2라인에서 K3를 만드는 천인철 대의원은 예전에 못했던 운동을 하고 있다. 1조 근무할 때는 퇴근 후 동네 테니스장을 가고, 2조 때는 아침 10시에 운동하고 출근한다. 야간근무를 할 때는 몸이 예민해져서 짜증을 많이 냈는데, 지금은 화를 덜 낸다며 아내도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도 늘었다.

공장 옆 스포츠센터는 조합원들로 북적인다. 스킨스쿠버, 낚시, 골프를 즐기는 조합원들도 많이 늘었다. 사내 동호회도 활발해졌다. 개천절이 낀 10월 3일 연휴, 많은 동료들이 아이들과 캠핑을 떠났다. 1조는 2일 오후에 출발해 6일 오전에 돌아오면 되니까 4박5일 여행이 가능하다. 제주도로 떠난 사람들도 많다. 징검다리 한글날, 금요일 휴가를 내면 5박6일이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조합원도 있다. 단체협약에 주간연속 2교대 포인트 50만원을 운동, 여가활동, 도서구입, 여행비로 쓸 수 있다. 포인트를 2년 모으고 돈을 조금 보태면 된다.

2006년 12월 1일 기억이 떠올랐다. 노무현 정부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시킨 비정규직법안 무효를 외치며 2000여명의 노동자들이 국회에서 격렬히 싸웠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맞으며 맨앞에서 싸운 노동자가 기아차 화성공장의 젊은 조합원들이었다. ‘선봉대’를 꾸려 공장 안에서는 비정규직과 연대하고, 경기지역에서 어렵게 싸우는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활발한 연대활동을 벌였다. 천인철 대의원도 선봉대 출신이다.

월급도 오르고 시간도 많아졌지만 연대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집회 참여율이 좋아졌다거나 연대활동이 활발해진 것같지는 않아요. 여행을 많이 가게 되면서 더 어려워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오전 11시 3공장 식당. 노동자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점심시간이 40분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여유가 없어졌어요. 밥 먹고 화장실 갔다 커피 마시고 담배 한 대 피면 라인에 들어가야 해요.” 식사를 마친 오종민 조합원이 종종걸음으로 라인으로 향한다. 조합원들을 만나 이야기할 시간도, 선전전을 할 시간도 없다. 화이날 113라인 탁구대에 먼지가 쌓여 있다. 공장 곳곳에서 배드민턴과 탁구를 치던 풍경이 사라졌다. 수원에서 출퇴근하는 그는 야간 잔업을 하고 집에 들어가 자리에 누우면 새벽 3시가 넘는다. 쉽게 잠들지 못한다. 2016년부터 야간 1시간 잔업이 사라지는데, 노조는 회사에 조기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도장공장 맞은편 이동우 비정규직 해고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낡은 천막이 서 있다. 2007년 8월 비정규직 400여명이 도장공장을 점거하고 일주일째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정규직노조 지회장에게 항의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쟤네들이 비정규직 맞아요? 하청업체 정규직이잖아요. 우리 공장 점거했는데 가만히 있을 겁니까?”

지난 9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기아차 비정규직 468명 모두가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비정규직도, 하청업체 정규직도 아니고 기아차 직원이라는 것이다. 당시 농성장 창문을 부수던 정규직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박점규의 노동여지도]가을여행 떠나는 자와 소외된 자, 화성

사내하청 불법 판결, 그러나 조용한 공장
바다를 보며 걷는다. 해안도로를 따라 쉴 새 없이 오가는 부품 차량 너머로 너른 갯벌이다. 현대차 울산공장 다음으로 큰 공장에 정규직 1만명, 비정규직 3000명이 일하고 있다. 조립 3공장 입구, 지게차가 차량에서 부품 박스를 내리자 노동자들이 좌우로 분류한다. 모두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다. 하청업체 이름이 신성물류, 제이에스, 성원을 거쳐 목림으로 네 번 바뀌었다. 부초처럼 떠다니는 하청 인생을 닮았다.

어머니뻘 되는 조합원들이 김수억 전 비정규직지회장을 아들처럼 반긴다. 1989년 갯벌을 막아 지은 화성공장이 가동되자, 회사는 조개를 캐거나 농사를 짓던 주변 농어민들을 사내하청업체로 일하게 했다. 임인숙씨는 노진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1997년 기아차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17년을 일했다. 60세 정년까지 4년 남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지인순씨가 옛 이야기를 꺼낸다. “처음 왔을 때 일당이 5만원도 안 됐어요. 바닷가 나가면 5만원은 돈도 아니라고 했는데, 노조 만들고 싸워서 많이 좋아졌지.” “우리가 뭘 알았나, 저런 이가 있어서 싸웠지.” 임인숙씨가 김수억 전 지회장을 보며 갑자기 눈물을 쏟아낸다. 김 전 지회장은 2003년 4월 신성물류에 들어와 두 번 구속으로 3년을 감옥에서, 두 번 수배로 2년을 공장에서 보냈다. 지난 4월 1일 복직했지만, 회사가 원직으로 발령을 내지 않아 아직 동료들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김수억 전 지회장이 세 어머니 모두 2007년 8월 점거파업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조합원들이라며 자랑한다. 10년의 싸움. 젊은 노동자들이 앞장서고, 늙은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희생은 컸지만 성과도 적지 않았다. 비정규직 조합원이 1800명으로 늘었고, 연봉도 5000만원이 넘는다. 기아차도 하청회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이 저절로 나온 게 아니다.

김진현 조합원이 이 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했던 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전해준다. 어머니는 2012년 정년퇴직하고 근처 장안공단의 타카타라는 벨트회사에 들어가 최저임금을 받으며 청소를 하고 있다. 10월 11일이 작은 아들 결혼식인데도 휴가를 쓸 수 없어 새벽에 일하고 오신다며 한숨을 짓는다.

셔틀버스가 공장을 가로지른다. 디젤엔진 주조공장, 쇳물 냄새가 진동한다. 정규직도 울면서 간다는 열악한 공장이다. 쇳물을 녹여 엔진 블록을 만드는 공정은 정규직, 쇳물 찌꺼기를 떼어내는 일은 하청이 한다. 쇳가루 분진이 가득한 공장, 영화 <파업전야>의 느낌이다. 진성씨앤씨 이덕환 조합원은 올해 말이 정년이다. 장성근 조합원은 2년 남았다. 10년 전 젊은 용역깡패들에 맞서 공장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싸웠던 늙은 노동자들의 얼굴이 해맑다.

버스를 타고 퇴근장으로 향한다. 기아차 모든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야 할 공장에 현수막 하나 안 보인다. 지난 10월 1일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본사 앞에 기아차, 현대제철, 현대로템 등 그룹 계열사 4000여명이 모였지만 ‘상여금 통상임금 적용’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 요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조합원들이 통근버스가 기다리는 퇴근장으로 모여든다. 정규직 활동가들도 선전물을 나눠주기 위해 모여든다. 불법노동의 공범 역할을 한 것을 반성하고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 전환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는 ‘현대·기아차 전·현직 노조간부 선언’에 활동가들이 참여 의사를 밝힌다. 그런데 판결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정규직은 얼마나 될까? 판결문을 읽어본 간부는 몇 명이나 될까? 임관수 대의원이 “판결 내용을 물어보는 활동가도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10년을 싸워 만들어낸 판결문이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

공장은 10분 만에 6000명의 노동자들을 쏟아낸다. 160대의 관광버스가 줄지어 화성을 빠져나간다. 기아차를 나와 처음 만난 현대모비스 이화공장. 자동차 섀시와 운전석 모듈을 생산해 기아에 납품한다. 정규직은 관리자 10여명뿐이고 300명이 넘는 생산직 전체가 사내하청인 대표적인 ‘정규직 0명 공장’이다.

장안공단은 ‘노동운동가’ 출신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만든 외국인 전용 산업단지다. 입주한 외국회사에 공장부지 50년 무상임대, 특별소비세·부가가치세 전액 감면, 시설설치비 50% 지원, 신규고용 1인당 50만원 지원 등 파격적인 혜택을 줬다. 기업 사랑이 자본가 출신보다 더하다. 오후 5시, 주간근무를 마치고 나온 금속노조 송기웅 포레시아 지회장과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안산의 창흥정밀을 인수한 포레시아는 2008년 7월 휴가를 이용해 공장을 안산으로 옮기고, 다음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다며 그를 포함한 19명을 정리해고했다. 5년의 외롭고 긴 싸움 끝에 지난 4월 대법원은 정리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사용자가 정리해고 문제로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는 없지만 자율적으로 노사가 합의했다면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첫 판결이었다.

벼룩의 간 마저… 근로기준법 개악안
자동차 머플러를 만드는 포레시아에는 445명의 노동자가 일한다. 청소와 식당을 포함해 99명이 하청노동자다. 잔업과 특근을 거부하고 있는 민주노총 조합원 20명을 뺀 노동자들은 주야 12시간씩 일한다. 토요일, 일요일도 특근을 한다. 개천절을 낀 3일 연휴도 ‘풀 특근’을 했다. 심지어 추석 때 근무를 한 노동자도 있다. 캠핑 열풍이 불어오지 않는 가난한 공단이다.

그런데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은 50% 휴일근무 수당 지급을 삭제한 근로기준법 개악안을 냈다. 노조가 막강한 기아차는 단체협약으로 막아낼 수 있겠지만 포레시아를 비롯해 공단 노동자들의 월급은 고스란히 깎인다. 벼룩의 간을 빼먹겠다는 것이다.

포레시아 주변에 한국3M, 카파코리아, 덴소, 타카타코리아 등 외국계 회사들이 즐비하다. 그나마 노조가 있는 회사는 조금 낫지만 나머지는 죄다 사내하청, 장시간노동, 최저임금이다. “장안공단에서 일하지만 집은 발안·조암·수원·안산이고, 장시간 노동을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만날 수가 없어요. 공단의 노동조건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진 적도 없죠. 집에 가면 자기 바쁜데 제조업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걸 알기나 하겠어요?”

그는 해고 기간 중 영세업체들이 모여 있는 발안공단에서 1년 정도 노동권 캠페인을 했다. 사람도, 재정도, 시간도 많은 기아차노조가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공장 밖을 나오지 않았다.

장안공단을 빠져나와 봉담으로 향한다. 수원으로 향하는 43번 국도가 주차장이다. 20분 거리가 1시간40분 걸렸다. 2007년부터 화성시 방문간호사로 일한 전미옥씨가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반긴다. 서울의 1.5배에 달하는 넓은 화성시, 가난한 비정규직과 농촌의 아픈 노인들이 많은 도시에서 그와 20명의 간호사들은 노인들의 ‘주치의’였다. 월급은 적었지만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힘든 줄 몰랐고, 휴일에도 노인들을 찾았다. 그런데 화성시는 기간제법을 피하기 위해 개인사업자로, 대학 민간위탁으로 바꿨고, 그는 2013년 1월 전화 한 통으로 해고를 당했다. 전국 3000명의 방문간호사들이 비슷한 처지에서 일하고 있다. 상시·지속적 업무이고 공익을 위한 방문간호. 다른 지방정부에서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새정치연합 화성시장은 외면하고 있다. 전미옥 간호사는 “이번 재판에서 이기고 전국의 방문간호사들을 만나 노조에 가입해 권리를 찾으라고 호소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지만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그녀의 눈이 빛난다.

유난히 보름달이 밝은 가을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밤이다. 기아의 직영, 하청, 부품사 노동자 모두가 행복한 가을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cco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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