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인 2003년 매출액 14조인 포스코가 지난해 매출액 62조로 5배가 늘었다. 매출을 늘려준 것은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포스코의 지시에 따라 철강을 생산하는 1만5천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다.
소설 <태백산맥>의 고을 남도의 가을바람이 차갑다. 순천 시내를 빠져나와 광양으로 향한다. 소설의 무대 벌교, 고흥, 송광사, 조계산이 지척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고즈넉한 들녘이 차창 밖으로 펼쳐진다. 광양읍에 있는 포스코 사내하청 노조사무실. 자동차 사내하청은 모두 불법파견이라는 최근 법원 판결을 문답으로 만든 노조 소식지를 놓고 노조 간부들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나눈다. 밤샘근무를 마친 피곤한 몸이지만 밝은 표정들이다.
양동운 노조지회장(53)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포스코에서 아침 선전전을 마치고 조합원들을 순천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이다. 1987년 광양제철소 사내하청업체인 삼화산업에 들어와 포스코 하청노동자 인생이 낼 모레면 30년이다. 1989년 3월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1998년 해고돼 1년 만에 복직하고 2001년 해고돼 2년 만에 돌아왔다. 호기롭게 노조위원장을 하겠다고 나선 서른 청춘의 패기는 세 딸아이를 다 키우고 정년이 가까운 나이에도 시들지 않았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한강> 7권 ‘길을 바꾼 불기둥’에서 국가의 영웅으로 그린 박태준의 포스코에 맞서 28년째 싸우고 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 박점규
28년 동안 포스코와 싸우는 노동자
회의 탁자에 ‘작업공정도 및 작업투입 인원현황’ 그림이 있다. 노조 이동근 법규부장이 손으로 만들었다. 양동운 지회장은 천정기중기 자격증을 가진 크레인 기사다. 2열연공장 42, 43호기 11m 크레인에 오른다. 진행반과 라인운전실에서 근무하는 포스코 정규직의 지시에 따라 일한다. 컨베이어를 타고 이동 중인 코일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야드와 다음 공정에 보급한다. 고로에 철광석을 넣어 쇳물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완성품이 나올 때까지 컨베이어와 크레인이 연결된 자동흐름방식의 공정이다. 현대자동차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난해 1월 순천법원은 16명의 조합원이 포스코를 상대로 낸 정규직 소송에서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그래서 9월 18일 현대차의 모든 공정이 불법파견이라는 판결 소식을 듣고 노조 카톡방이 난리가 났다. 조만간 광주고등법원에서 2심 판결이 내려진다. 조합원들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청업체가 독자적으로 작업을 계획해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포스코의 생산계획에 따라 작업합니다. 도급계약서도 직종별로 인력을 공급하고 노무비를 받는 계약을 체결했어요. 우리가 불법파견이 아니면 대한민국에 불법파견은 없습니다.”
광양시청에서 포스코로 향한 2차선 도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삼화산업 해고자 50명이 아침부터 점심까지 매일 걷던 길이다. 거북이보다 느린 걸음으로 포스코 입구 금호대교를 지나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생 걸을 길을 2년 동안 걸었던 사람들, 발이 짓무르도록 걷고 또 걸으며 포스코에 맞섰던 시간들이다.

순천 조례동 세월호 촛불문화제. | 박점규
현대제철 순천공장이 있는 맞은편 율촌공단보다 더 넓은 광양제철소를 한 바퀴 돈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바다 너머로 철강석과 석탄을 쌓아놓은 야적장이 보인다. 코크스를 만드는 공정을 지난다. 5개의 고로를 갖춘 광양제철소는 연간 조강 생산량이 단일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5년 연속 철강사 경쟁력 세계 1위, 철강 매출액 세계 2위인 포스코는 삼성전자, 현대차와 더불어 대한민국 대표기업이다. 10년 전인 2003년 매출액 14조던 회사가 지난해 매출액 62조로 5배가 늘었다. 평균 연봉도 4300만원에서 7900만원으로 뛰었다. 그런데 직원은 1만9373명에서 1만7932명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매출을 5배로 늘려준 것은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포스코의 지시에 따라 철강을 생산하는 1만5000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다. 박태준이 없었다면 포철도 없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포스코가 자기 직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없다면 단 한 개의 코일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9년 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점거했던 현대하이스코 크레인. | 박점규
‘트루먼 쇼’처럼 감시하는 스마트폰 어플
포스코는 올해 초 국가보안시설이라며 스마트폰 통제 프로그램 어플인 ‘포스코 소프트맨’을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휴대폰에 깔게 했다. 노조 간부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깔았다. 보안시설 촬영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는데 문자나 카톡 내용도 다 들여다볼 수 있고 위치도 추적된다. 최근 검찰의 카카오톡 대화내용 사이버사찰이 개인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본 것이라면, ‘포스코 소프트맨’은 영화 ‘트루먼 쇼’처럼 노동자들을 발가벗겨놓고 카메라로 지켜보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지 5년 이상 지났는데 갑자기 보안을 이유로 감시프로그램을 강요하는 이유는 뭘까? 양동운 지회장은 법원에 포스코의 불법파견을 입증하는 동영상 자료를 대거 제출했는데 이를 막겠다는 의도라고 보고 있다. 그는 지금 세 번째 해고를 각오하고 있다. 하청업체를 청산하겠다는 협박과 연봉을 1000만원 올려주겠다는 회유를 견뎌내며 양동운 지회장과 남은 50명 조합원들이 거대재벌 포스코에 맞서 싸우고 있다. 태백산맥의 주인공들처럼.
현대하이스코에서 현대제철로 바뀐 순천공장. 시커먼 코일이 크레인을 기다리고 있다. 현대제철 당진공장, 포스코, 일본에서 만들어진 코일이 컨베이어를 타고 오면 크레인이 들어 올려 냉연강판을 만든다. 아연 금속, 전기 도금, 페인트 도금을 거쳐 자동차와 전자제품, 건축자재로 납품한다.
박정훈 전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지회장이 B동 공장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는 9년 전 오늘을 잊지 못한다. 일주일에 70시간을 일하면서 기본급 75만원을 받던 시절, 견디다 못한 하청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조합원이 많은 순서대로 업체를 폐업해 120명이 길거리로 쫓겨났다. 그는 학창 시절 친구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공장으로 숨어들어왔다. 10월 24일 새벽 1시, 61명의 해고노동자들이 공장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 40톤짜리 크레인 5개를 세우자 공장이 완전히 멈췄다. 다음날 전국에서 달려온 5000여명이 전경버스 3대를 불태우고 공장 진입을 시도하며 격렬히 싸웠다. 그러나 현대하이스코는 물과 음식물 반입을 막고 정규직 노동자들을 구사대로 세워 강제진압에 나섰다. 경찰 특공대가 투입돼 지붕을 뜯어냈다. 태백산맥의 주인공들처럼 초코파이와 생쌀을 먹으며 버텼다. 경찰이 소방호스로 뿌린 물을 받아 마셨다. 서로 부둥켜 안고 추위를 견뎌냈다.
![[박점규의 노동여지도]광양 순천의 <태백산맥>을 닮은 사람들](https://img.khan.co.kr/newsmaker/1099/20141029_51_02.jpg)
11월 3일 새벽 노사는 해고자 우선 취업, 노조활동 보장 등에 합의했다. 크레인을 점거했던 11명이 구속됐고, 박정훈 전 지회장은 꼬박 1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1일간의 전쟁은 철강회사 하청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9년이 흐른 지금, 비인간적인 대우는 사라지고 월급봉투는 두툼해졌다. 그러나 정규직은 2002년부터 4조3교대를 하고 있는데 하청노동자는 지금도 3조3교대로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다. 여전히 하청노동자들은 2등 국민, 2등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현대제철 정규직, 비정규직노조 모두 교섭을 하는 날이다. 정규직노조는 의견일치를 봤지만 하청노조는 안조차 내지 않는다. 바지사장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롤을 정비하고 이송하는 공정의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2시간 기습파업을 했다. 박정훈 전 지회장은 전국의 하청노동자가 동시에 기습적으로 일손을 놓는 ‘전국 게릴라 파업’을 해보는 게 꿈이다.
현대제철 순천공장 비정규직 조합원 163명도 정규직 지위확인 소송을 하고 있는데 현대차 판결 이후 문의가 폭증하고 있다. “투쟁을 통해서 정규직이 되는 게 아니라 소송으로 한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조합원만 우선 정규직화에 갇히지 말고 제조업 사내하청은 모두 불법파견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더디더라도 함께 싸워야죠.” 롤샵 공정에서 일하는 김종안 조합원의 말이다.
하청노동자 ‘전국 게릴라 파업’ 소망
현대제철을 나와 율촌공단을 둘러본다. 세아제강, SPP, 한솔, PSR제강 공장이 보인다. “몇 년 사이에 공단이 엄청나게 커부렀어요. 사내하청이 무지하게 늘었고, 이주노동자도 많다는데, 실태조사라도 해봐야겠당께요.” 광양과 순천의 철강단지에서 민주노총에 속한 사업장은 포스코, 현대제철, 비앤비성원, 미주제강이 전부다. 한국노총이라도 노조가 있으면 다행이다. 새로 만들어진 노조 없는 공장은 10년 전 현대하이스코 하청노동자들의 처지 그대로다.
박정훈 전 지회장이 비염 치료를 위해 민들레하나한의원을 찾는다. 들풀한의원과 함께 사회운동가의 주치의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벗이다. 이정우 원장은 지난 주말 남원 귀정사에 있는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에 다녀왔다. 전주에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외롭게 남아 있는 진도에 갔다. 다음주에도 팽목항을 찾아 하룻밤 자고 올 계획이다. “삶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지역에 와 있어요. 노동자, 농민이 무슨 일 당하면 지역에서부터 연대해야 하잖아요.” 그의 얼굴이 가슴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처럼 빛난다.
6시30분 순천시내 번화가인 조례동 국민은행 앞. 수업을 마친 교사와 학생, 하루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촛불을 든다. 초등학생 딸아이와 함께 온 부부, 두 살 아이를 안고 온 젊은 노동자 부부의 얼굴이 해맑다. ‘세월호 특별법 오해와 진실’을 알리는 긴 현수막 옆에 노란 리본이 빼곡히 달려 있다. 같은 시간에 열리는 영화 ‘카트’ 시사회에도, 지역화폐를 소개하는 강연회에도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하고 있다.
저녁을 겸한 술자리. “오늘 학교에서 리본을 만들었는디, 우리 얘가 칼로 손을 썰어 부렀어. 피를 봐부렀제.” 전교조 박은혜 조합원의 사투리가 정겹다. 2011년 6월 11일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향했던 희망버스를 가장 먼저 올라탄 연대의 도시 순천. 현대차 비정규직, 쌍용차, 유성기업, 밀양, 그리고 세월호. 순천은 연대와 희망의 바이러스를 전국으로 실어날랐다. 6개월 동안 이어진 촛불집회, 50이 넘은 신선식 전교조 순천중등지회장의 열정이 대학생보다 뜨겁다. 포스코 사내하청 양동운 지회장이 금속노동자들이 세월호 진실규명 싸움에 앞장서지 못했다며 미안해한다. 아름다운 연대의 이야기들이 꽃을 피운다. 들풀한의원 윤성현 원장이 말없이 지켜본다. 태백산맥을 닮은 사람들의 미소가 향기로운 밤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cco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