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공학 속에서 생활정치 펼쳐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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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 - 안철수의 미래

이 글은 안철수 당선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치전문가가 아니며 정치권의 움직임에도 아는 바가 많지 않다. 사실 한 사람의 국회의원 당선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크게 관심도 없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정치를 모른다!”는 말은 참으로 이중적이다. 우리 사회는 인간적인 것과 정치를 반대로 생각하고 정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많은 사람이 정치적 행위를 비난하지만 그럼에도 정치는 사회적 삶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기도 하다. 비난하고 힐책하면서 애써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떠날 수 없는 영역이 또한 정치다.

학문적으로 정치학이란 분야를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한다. 인간은 폴리스(polis)에 사는 존재이기에 그 안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 사람 사이의 관계와 행동 등은 삶을 이해하는 본질적 요소이다. 폴리스란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기에 그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를 성찰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폴리스의 학문, 즉 정치학이다. 이 말이 나중에 정치기술, 정략적 행위 등으로 전용되면서 정치에 대한 이중적 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안철수의 ‘새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의도 정치, 정치공학적 정치를 혐오하고 경멸하지만, 그들이 결코 떠날 수 없는 영역이 정치다. 그럼에도 ‘그들이 벌이는 정치’는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는 듯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국민을 위한다면서 집단 이기심에 사로잡혀 정략적 놀음이나 일삼는 사람들, 공약은 선거 때나 써먹기 위해 속여도 좋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전 대통령은 물론, 경제민주화와 복지담론으로 대권을 쥔 대통령이 곧바로 이 말을 내팽개치는 현실을 보면서 느끼는 양면적 마음이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정치인이 개인의 공동체적 권리를 위임받아 이를 정치행위로 재현하는 체제로 형성되었다. 정치는 본래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해준 사람들의 관심사를 재현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는 이 원칙을 심각하게 배반하고 있다. 여기에 정치에 대한 이중적 생각이 자리하게 된다. 4·24 재보선은 민주당의 참패라고들 말하지만 그게 민주당의 정확한 위상이다. 민주당은 한국 기성 정치집단의 아류로 2등에 만족하며, 그 언저리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이번 선거로 나타난 것이다. 기득권층의 부패와 불의를 거부하지만, 최소한의 삶과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재현하는 정치는 사라졌다. 그 절망이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과 함께 실체도 알 수 없는 ‘새정치’란 상징에 몰려들고 있다.

[2030 vs 5060]정치공학 속에서 생활정치 펼쳐갈까

안철수의 몫은 이제 시작이다. 필연적으로 정치적이지만, 정치공학적 정치, 그들끼리의 잔치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그 권리를 재현하며, 그 삶을 위한 정치를 펼쳐가야 하는 것이 그의 과제다. 신물나는 사익 정치, 정략적 정치를 넘어 우리의 이 고단하고 목표 없는 삶을 위한 새로움을 펼쳐달라는 외침이 울려펴지고 있다. 정당정치가 부족해서 정치를 기피하는 것이 아니다. 기성 정치가 삶을 살리지 못하기에, 그들의 권리를 재현하지 못하기에, 집단 이기심이나 채우는 행태에 환멸을 느끼기에 정치를 경멸하는 것이다. 정치공학과 생활정치 사이에서 안철수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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