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집 낸 ‘섬진강 시인’ 김용택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내년에 나올 시집은 전혀 다른 새로운 서정”

잘못된 만남인가. ‘섬진강 시인’에서 요즘은 ‘국민시인’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던 김용택 시인을 만나 적이 당황했다. 서로 생각이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38년 교사생활 대부분을 몸담았던 전북 임실군 덕치초등학교, ‘영원한 2학년 담임선생님’답게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동심, 그의 고향만이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고향’처럼 돼버린 진메마을… 이런 걸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최근 연애시집 <속눈썹>을 냈다. 잃어버린 고향, 시골, 시절, 정서, 여기다가 말라버린 연애감정, 그를 만나 잠시나마 이런 부분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런데 김 시인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이게 끝이에요. 다시는 연애시를 안 쓸 겁니다. 앞으로는 전혀 다른 시가 나올 거예요.”

무슨 말인가. 솔직히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KBS 2TV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남격)에 출연해 남격 멤버들에게 시 작법을 강의했던 그는 지난 10월 29일 남격에서 뽑은 작품을 발표하는 KBS 1TV ‘낭독의 발견’을 녹화하러 서울에 왔다. 귀향길인 서울고속버스터미널 2층 간이 휴게실에서 좀 난감하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연애시집 낸 ‘섬진강 시인’ 김용택

10년 만에 연애시집을 냈잖습니까. 그게….
“연애시가 한 3권 정도 될 겁니다. <나무>를 낸 게 2002년인데, 그 뒤로 제가 방황을 많이 하죠. 왜냐하면 고향이라는 게 2002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정 붙일 만한 곳이었죠. 그런데 그 후에 제가 살았던 마을 자체가 뜯어고쳐지면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 컸어요. 마음이 정리가 안 됐어요. 그래서 그런 시들을 쓰게 되었죠.”

방황하는 중에 연애시를 썼다니 무슨 말입니까.
“연애시는 써지더라고요.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연애시를 쓰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죠. 물론 쓰면서도 마음이 흡족하지는 않죠.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도 갖는데, 그래도 써지니까….”

그 참 이상하다. 김 시인은 2008년 평생 짊어진 교직을 내려놓았다. 자유인이자 전업시인으로 돌아와 마음대로 시를 쓰고, 전국 방방곡곡 강연을 다니고, 영화에 출연(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시인 김용탁을 연기했다)도 하면서 시심이 활활 불타올라 연애시를 쓴 줄 알았다. 다시 말하면 환갑을 넘긴 시인의 회춘(?)을 기대했다. 그런데 <속눈썹>의 시들은 그 시기에 쓴 게 아니었다. 거의가 2002년 <나무> <연애시집> 출간 이후 시적 방황기에 쓴 것이라니….

“사실은 이 시, 연애시를 안 쓴 지 오래됐습니다. 지금은 다시 ‘섬진강’ 연작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고, 그래서 그동안에 제 모든 시와는 전혀 다른 그런 시를 발표하고 있죠. 문학을 할 수 있는 마음이 인제는 된 거예요.”

마음이 정리가 됐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변화된 것들을 인정한 거죠.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진 거고요. 그 전에는 인정하지 못했으니까. 마을 앞 징검다리가 사라진 걸 가지고 몇 년을 제가 괴로웠으니까. 그런 걸 인정을 못 했던 거죠. 그러다 세월이 가면서…(웃음) 무뎌진 거죠. 고향이란 게 공간 개념이 아니고 시간 속에 있었던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이제 마음이 편해져서 지금은 고향에도 편하게 갑니다. 그러니까 다시 고향이 보이는 거예요.”

자연의 인위적 변형이라든가 농촌공동체의 해체와 같은 건 2002년부터가 아니라 그 전에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 전에도 일어났었죠. 2002년 <나무>를 쓸 때까지는 그래도 내가 거기가 고향이라고 인정을 했죠. 근데 그 이후에는…(웃음) 인정이 안 되는 거야. 너무 고통스러운 거야. 징검다리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길들이 포장이 되고 마을의 집들이 빈집이나마 서 있던 것들이 다 쓰러져서 없어져버리는, 그런 모습을 못 견뎌 했죠. 내가 집을 안 갔습니다. 집에 안 잔 지가 오래됐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2002년부터는 시골에 잔 적이 거의 없어요. 괴로워서 잠을 못 자요.”

사랑 말고/우리가 노을 아래 엎디어 울 일이/또 무엇이 있을꼬.(‘자서’ 중에서) 어젯밤/나는/네 얼굴을 보려고//달 속으로/기어들어갔다.(‘달’ 전문) 산그늘 내려오고/창밖에 새가 울면/나는 파르르/속눈썹이 떨리고/두 눈에/그대가 가득 고여온답니다.(‘속눈썹’ 전문)

젊은 어법으로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의 이런 연애시가 절망과 방황 속에서 탄생했다니 도무지 와 닿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꽃은 좋은 계절에만 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악조건 속에서 더 아름답게 피는 게 자연의 이치이라는 식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이나 연애가 시의 제일 소재이긴 하지만 나이 들어서 소년·소녀처럼 순수한 연애감정에 빠지기는 어렵고, 그래서 그런 시를 쓰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나이가 들었다고 풋풋한 연애감정이라든가 감미로운 사랑의 감정이라든가 달콤한 연애라든가 이런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단지 표현을 못 하지.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로 말이에요. 신 기자는 그런 감정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쿠. 거꾸로 인터뷰당하는 상황을 벗어나기에 급급해서 “젊었을 때처럼 설레거나 잠 못 이루는 일은 없죠”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솔직히는 잘 모르겠다.

“그런 건 없지요. 그래도 감미로움, 달콤함, 그런 사랑은 있죠. 그런 감정은 마음속에 살아 있죠. 연애감정이라는 게 탁 하나를 건드리면 여러 개가 튀어나오잖아요. 현실적으로 사랑의 감정이 어떤 여인네를 보고 싹틀 때도 있는 거잖아요. 그걸 죽일 수는 없는 거죠. 그럴 때 쓰기도 하고, 옛날에 연애 안 하고 산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추억들을 떠올리며 쓰기도 하죠. 시라는 게 전체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고 하나의 감정을 딱 건드리면 이게 굉장히 확대되고 또 끌어오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요즘 시가 이해하기 어렵고 각박해지면서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느낌이 있는데, 김 선생님 시는 정서적으로 친숙하게 와닿는 점이 좋습니다.
“시라는 게 자연현상을 핑계대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잖아요. 전통적인 서정시가 그런 겁니다. 사실은 그게 싫어요.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복잡하고, 자본이라는 게 얼마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도대체 발을 디뎌놓아야 될 데, 발을 들이밀 데가 없을 정도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혼돈에 빠져 있는데 이런 한가한 서정시를 쓰고 있다는 게 말이에요. 하지만 써지는 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반서정적인) 사회에 대한 서정적 도발 말이죠.
“그렇죠. 말하자면 우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해지고 싶은 거죠. 자연과 인간은 밀접한 관계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인간적이죠. 이런 복잡한 사회에 이런 (서정적인) 시를 던져주는 것도 정서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주는 것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억새가 하얗게 흔들리는 것 자체는 서정성이 짙은 건데 그걸 잊고 살기 때문에 그런 억새의 흔들림을 도시에다가 주고 싶기도 하죠.”

[신동호가 만난 사람]연애시집 낸 ‘섬진강 시인’ 김용택

요즘은 사랑의 감정이나 연애감정도 뇌의 화학적 작용으로 파악하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기계적이고, 즉흥적이고, 쾌락적이고, 순간적이죠. 도회지의 삶은 순간을 자꾸 모면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이 너무 불투명하고 예측을 못 하잖아요. 불투명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된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즉 순간을 모면하고 싶은데 가장 쉬운 게 섹스죠. 시 중에 뭐 컴퓨터하고 씹을 하고 싶다(최영미의 시 ‘퍼스널 컴퓨터’에서)… 사실은 무서운 말들이죠.”

<속눈썹>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많이 인용되기도 하는 ‘우화등선’이 그의 그런 생각을 잘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형, 나 지금 산벚꽃이 환장하고 미치게 피어나는 산 아래 서 있거든./형 그런데, 저렇게 꽃 피는 산 아래 앉아 밥 먹자고 하면 밥 먹고, 놀자고 하면 놀고, 자자고 하면 자고,/핸드폰 꺼놓고 확 죽어버리자고 하면 같이 홀딱 벗고 죽어버릴 년/어디 없을까.(‘우화등선’ 전문)

“내 친구가 있어요. 어느 날 산벚꽃이 많이 핀 날이었거든요. 이 놈이 전화를 해서…(웃음) 비슷하게 얘기를 한 거죠. 이 시에서 중요한 건 핸드폰이에요. 복잡한 세상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것의 상징이 핸드폰이잖아요. 핸드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핸드폰 꺼놓고 어딘가 가버리고 싶은 거예요. 복잡한 생각에서 탈출하고 싶은, 그런 것이죠.”

시집 제목을 <속눈썹>으로 한 건 어떤 상징성이 있어서입니까.
“속눈썹은 굉장히 성적이죠. 여자하고 첫 키스를 할 때 살짝 눈을 떠보면 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요. 그런 경험을 오랫동안 기억을 하고 있었던 거죠. 바로 그런 여자의 속눈썹, 내밀하고 엉큼하면서 노골적이고 도발적이고 또 그런 상징… 사실은 제목이 도발적입니다. 굉장히 섹시한 거예요.”

연애시에 대한 기자의 엉큼한(?) 오해에서 비롯된 엇박자 문답이 이 대목에 이르러 말끔히 정리되는 듯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질문하고 답했지만 어느 새인가 같은 방향을 함께 보고 있는 걸 발견한 기분이랄까.

이 시집을 끝으로 지금까지의 시 세계와는 결별하겠다고 했잖습니까. 다시 쓰는 ‘섬진강’ 연작시도 그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까.
“전혀 다른 변화된 모습이죠. 분노도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섬진강이 변했듯이 나 역시 지금까지 써왔던 시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왔죠. 나는 엄청 변해 있죠. 우리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나는 변화된 곳에 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시 세계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 문단, 우리 문학이 변해야 됩니다. 시대가 변하면 시도 변해요. 나이 든 분들이 젊은 사람들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절대 그러면 안 되죠. 그건 시대에 뒤져버린 거예요. 아무리 자폐적인 시를 쓰든, 그 어떤 시를 쓰든 그들의 정신이 그 시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시를 이해해야죠. 이해하려면 공부를 했어야죠. 시들을 읽을 줄 알았어야죠.”

앞으로는 서정적인 시를 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서정을 떠날 수는 없죠. 하지만 19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서정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서정이고요. 섬진강 연작을 비롯해 새로 쓴 시를 모아 아마 내년 봄쯤 시집으로 낼 겁니다. 저는 그 시집에 굉장히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좀 무모하죠. 젊어졌죠. 엄청 젊어졌습니다. 시가 말이에요. 젊고 무모하고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그런 시라고 저는 생각을 하죠. 내 시를 본 사람들도 그렇게 평을 하죠. 어떻게 자기 세계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서 또 다른 세계로 진입했을까, 그런 얘기들을 하니까 저도 굉장히 고무가 돼 있습니다.”

교직에서 은퇴해 3년 동안 자유롭게 지내니까 어떻습니까.
“저는 제 삶이 이렇게 될 줄 몰랐죠. 평생 덕치면이라는 조그만 면에서만 살았잖아요. 그 좁은 공간에서 초등학교 2학년만 20~30년 가르치며 살던 사람이 이를테면 전국을 다니며 강연한다는 건 상상도 안 해봤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하여튼 좀 있죠. 강연 나가 보니까 어떤 때는 내가 좀 낯설죠. 내가 사람들 앞에 서서 얘기를 잘 못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를 하고, 그러다 보니까 삶이 즐겁죠. 재미있죠.(웃음)”

하도 많이 다녀서 어디 시장, 군수가 일을 잘하는지 딱 보면 알 정도라고 하던데요.
“지자체 거의 다 봤고, 학교라든가 이런 저런 공기업 다 가봤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게 되죠. 가장 중요한 건 시대가 변했다는 거예요. 놀랍게 변해 있습니다. 안철수 현상이라는 게 어떤 개인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안 변했다고 우기는 집단이 너무 큽니다. 제가 볼 때는 그런 집단의 힘이 굉장히 약해졌고 그 가치도 이미 한물 가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전혀 못 써버리잖아요. 그런 변화된 물줄기에 서울시장 보궐선거라든가 안철수 현상이 딱 배를 타고 있는 거지.”

강의할 때 어떤 얘기를 즐겨 합니까.
“시대가 복잡해졌기 때문에 하나만 잘하면 안 되잖아요. 각 분야를 융합해야 되는데 융합을 하자면 융합시키는 매체가 필요해요. 나는 그게 문학과 예술, (더 구체적으로는) 글쓰기라고 생각하죠. 문학과 예술이야말로 모든 분야를 융합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학과 인문학이 하나가 되고,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만든 거죠. 또 인간의 상상과 현실을 하나로 만들 줄 알았어요. 그런 융합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문학과 예술적인 감성입니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신동호가 만난 사람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