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걸리, 넌 누구냐?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막걸리와 전주

어쩌다 술향을 맡았다가 그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낯선 길을 보았고, 기꺼이 그 길 속으로 들어섰다. 그 길에는 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술에 인생을 건 장인이 있었고, 세월이 쌓아놓은 제조 비법이 있었고, 곰삭은 문화가 있었고, 휘청거리는 역사도 있었다.

한 전주 막걸리집의 푸짐한 상차림.

한 전주 막걸리집의 푸짐한 상차림.

시작은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이었다. 2001년이었고, 당시만 해도 저자는 술을 잘 못하는 편이었는가 보다. 책날개에 ‘그는 사실 술을 잘 못 마신다. 한 잔만 하면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는 사람이다. 집안 내림이다. 그의 큰형은 맥주 한 잔에 목욕탕에서 쓰러지고, 아버님은 아예 주무신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하지만 술이라는 게 하다 보면 느는 법이다. 2004년 두 번째 책 <비주, 숨겨진 우리 술을 찾아서>를 내고, 2007년 <허시명의 주당천리>를 내면서 그의 주력은 갈수록 깊이를 더한다. 그렇지만 더하는 만큼 빠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나는 그의 첫 번째 책을 가장 좋아한다. 술을 못하는 만큼 ‘그의 혀가 선입견이 없고 깨끗한’ 때이기도 했지만, ‘처음’이라는 조심성에 정갈함이 있어 더 없이 좋았다. ‘2차’를 거쳐 ‘3차’에 이르면서 주기는 깊어지지만 어쩐지 거나해져 풀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들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우려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허시명 <술의 여행>

허시명 <술의 여행>

여행작가 허시명의 <술의 여행>은 <주당천리>의 개정판이다. 말이 개정판이지 ‘표지갈이’에 다름 아니다. 혹시 ‘주당천리’라는 표제가 너무 거나해서 문득 매무새를 추스르듯 바꾼 것일까. 모르겠다. 사실 ‘주당천리’라는 표제가 호방해서 훨씬 좋았는데. 내가 그의 ‘주당 편력’을 이렇듯 거침없이 거칠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에게 사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한 술 한 잔에 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미 취기가 올랐기 때문이다. 저자의 술 편력이 깊어지면서 그는 어느덧 ‘술 전문가’가 되었고, 어쩌다 ‘막걸리학교(<프레시안> 인문학습원 과정)’ 교장까지 되었다. 그리고 ‘<막걸리, 넌 누구냐?>(예담, 2010)’고 묻기에 이른다. 그래, 허시명, 너는 또 누구냐. 나 말고 다른 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의 책을 보시라. 그리고 들어보자. 그의 ‘주유편력(酒遊遍歷)’의 변명을.

곡물로 가공한 음식 중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게 술이고, 음식으로서 가장 비싼 게 술이다. 다산 정약용은 쌀을 허비하는 주범으로 술을 지목하고 소줏고리를 없애자고 했지만, 이제는 쌀을 소비하는 효율적 장치로 술을 지목하고, 농민주와 전통주를 부양하고 술 품평회와 술 축제를 여는 세상이 되었다.

막걸리에 묘리가 있다
‘술의 여행’처럼 호사스러운 여행이 또 있을까. 그곳이 어디이든, 어디일지라도 술이 있어 이미 그만이다. 하지만 저자가 어엿한 ‘막걸리학교 교장선생님’이니만큼 막걸리 기행 편에 먼저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전책 <풍경이…>에서 ‘부산 산성막걸리’와 ‘포천 이동막걸리’에 대해 이미 다룬 바 있지만

<술의 여행>에서는 전주 막걸리골목, 영양막걸리, 장수막걸리, 부자막걸리 등을 살피면서 ‘막걸리에 묘리가 있다’고 설파한다. 뭐 엄청난 묘리는 아니다. 술을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 <국선생전>을 지은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농도 짙은 막걸리 시를 한 편 남겨놓았다. 이른바 ‘백주시(白酒詩)’인데, 그는 시를 짓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콩나물국밥은 해장으로 제격이다.

콩나물국밥은 해장으로 제격이다.

내가 예전에 젊었을 때 백주(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그 무렵에는 청주를 만나기가 어려워 백주를 마셨지만 높은 벼슬을 거치면서 자주 청주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면서 백주를 즐겨 마시지 않게 되었다. 이는 습관 따라 자연스럽게 된 이치가 아니겠는가! 요새는 벼슬에서 물러나 녹이 줄어들어서 청주를 왕왕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부득이 백주를 마시지만 번번이 가슴이 체한 듯하여 유쾌하지 않았다. 옛날 두보는 시에서 ‘막걸리(탁주)에 묘리가 있다’ 하였으나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옛날 백주를 마시던 때에도 습관적으로 마셨을 뿐이요, 실로 그 이유를 몰랐다. 하물며 지금이랴. 두보는 본래 가난했던 사람이라 역시 그 습관으로 인하여 말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백주시’를 짓게 되었다.

…이제야 알리로다 사람의 성품이란/ 습관과 함께 젖어든다는 것을/ 음식이란 처지대로 따르는 것이라/ 즐기고 즐기지 않고가 어디 있으랴…

처세에 대한 자조인지, 아니면 역설적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되 왠지 뒷맛이 씁쓸하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독하다. 저자가 전주 막걸리골목으로 취재를 갔을 때 하필이면 텔레비전에서는 농민 시위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쌀 수입 개방 반대가 그 이유였는데, 수입 개방으로 쌀값의 20%가 하락할 것이고 그러면 농민들 보고 죽으란 말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죽어버리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다. 

전주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그런 모습을 보며 술을 마셔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던 저자는 들고 있던 막걸리에서 애써 위안을 찾는다. 원래 막걸리는 쌀로 만드는 것이고, 한때 막걸리가 술 소비량에서 60%를 넘기도 했었으니 그를 되살린다면 우리 농산물 소비 촉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군색하고 계면쩍은 논리지만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저자의 마음을 모를 리 없고, 더구나 막걸리학교 교장선생님 말이니 그냥 따르기로 하자. 어차피 농심도 탁배기 한 잔에 시름을 달래지 않는가.

막걸리가 새롭게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 술에 대한 인식 변화도 생겨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술을 우리의 문화유산, 관광자원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즉, 좋은 술을 만들려면 좋은 물이 있어야 하고, 좋은 물을 지키려면 땅이 오염되지 않아야 하고 산천이 수려해야 한다. 술의 잔치는 물의 잔치이고 땅의 잔치라야 한다. 그리고 술 속에 녹아든 이 땅의 쌀과 농산물의 잔치가 되어야 한다.

전주 막걸리골목과 전주학교
전주 막걸리의 전통은 도시의 전통만큼이나 깊다. 곡창의 중심지였던 만큼 일찍부터 술을 빚어왔을 것이고, 그 맥은 1970년대 막걸리 전성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 청년기를 보낸 50~60대 전주 사람이라면 옛 도청 뒷골목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막걸리집들을 기억할 것이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면 안주가 2층으로 쌓여 나왔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막걸리가 사양길에 접어든 후에도 전주 막걸리의 전통은 그 명맥을 이어왔고, 지금의 막걸리골목들로 여전히 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삼천동 막걸리골목이다. 50여 곳에 이르는 막걸리집들이 몰려 있어 그야말로 막걸리집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전주비빔밥

전주비빔밥

전주 막걸리집의 장점은 저렴한 술값과 푸짐한 안주에 있다. 1만2000원 정도의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면 값을 따로 받지 않는 안주가 한 상 가득 나온다. 더덕, 풋마늘대, 통마늘 장아찌, 삶은 콩과 옥수수, 날배추, 새우 소금구이, 키조개, 소라, 게 발, 생굴, 꼬막, 피문어, 해삼, 멍게, 도미찜, 광어회, 조기구이 등 25가지에 이르는 안주를 내놓는다. 손님으로서야 그저 입이 함빡 벌어질 일이지만 마음 한편으로 이렇게 해서 장사가 될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물산이 풍부하고, 물가와 인건비가 싸고, 음식문화가 발달한 전주라서 가능한 일이지만 그 바닥에는 전주만의 인심이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키 어렵다.

이왕 전주까지 왔으면 막걸리만 마시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고풍 어린 도시는 막걸리보다 더 진한 풍류와 문화를 곳곳에 간직하고 있다. 이씨 왕조의 발상지임을 가리키는 경기전과 그 뒤편의 한옥마을, 전동성당과 풍남문, 오목대, 전주객사, 한벽루, 덕진공원의 연꽃, 전주대사습놀이로 상징되는 소리문화, 부채와 한지 등 천년고도의 전통은 여태 살아 숨쉰다. 무엇보다 전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식문화다. 고유의 한정식은 물론이고 비빔밥과 콩나물국밥, 오모가리찌개 등 서민적 음식도 전주만의 풍미를 이룬다.

막걸리와 더불어 전주의 ‘온’ 모습을 고루 둘러볼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역시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과정 중 하나인 ‘전주학교(교장 이두엽)’를 추천할 만하다. 오는 9월 24~25일 실시되는 가을학기 강의는 전주 일원을 돌며 전주의 참 모습과 만난다. 전통문화에 대한 강의는 물론이고 공연과 체험학습, 막걸리집에서의 뒤풀이도 있다. 막걸리학교는 9월 1일 개강해 10월 27일까지 매주 목요일 강의를 갖는다.

글·사진 | 유성문<여행작가> meonbit@hanmail.net

답사기로 떠나는 답사여행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