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동해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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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여행자가 함께 부처되어

어찌 사라진 것이 이것뿐이랴 / 겨우 주춧돌 몇 개와 함께 / 나도 자매 없이 남겨져 / 풀 가운데 우거진 꿈이여 / 차라리 빈 절터에 절이 있다.

의상대의 여명

의상대의 여명

떠돈다는 것, 그리고 흐른다는 것
시인 고은이 출가한 것은 1951년이었다. 그의 입산이 전쟁과 무관치 않음을 짐작케 한다. 1950~1953년의 한국전쟁은 그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것이었다. 삶과 죽음까지도 그 전쟁이 지배했다. 

하물며 이제 열여덟의 시골 소년에게 그 전쟁은 거의 운명적이었다. 고향에서 좌우익이 빚어낸 순환은 학살의 되풀이로 나타났다. 서로 보복을 일삼았고, 그 보복은 과장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보복의 학살을 피해 살아남았으나 그 대신 다른 이의 송장을 파내어야 했다. 그의 몸에서는 썩은 송장 냄새가 보름이 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소년의 동정은 이런 참극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지고, 결국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다. 영혼의 파괴였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수군거리고, 그때부터 그는 부모와 고향 따위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 먼 곳만이 자신이 살 곳이라고 여겼다. 먼 곳의 미지만이 자신의 삶이며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는 집을 뛰쳐나갔다. 10리 밖 산 속에 들어가 살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히고, 또 30리 밖 친척한테 가서 머무르다 붙잡혔다. 처음으로 시도한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다행히 세 번째 가출은 붙잡히지 않고 성공했다.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다가 한 방랑승을 만났고, 그가 일러준 대로 굶주린 배에 물만 담고 절을 찾아간다. 10여년간의 승려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편력을 구름과 물에 비유한다. 둘 다 머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떠돈다는 것과 흐른다는 것이 편력의 원칙이다. 나의 방랑에 딱 들어맞는 것이 불교 운수납자의 길이었다. 나는 무던히도 떠돌았다. 내 청춘 전체가 구름과 물이었던 것이다.

동해에 가서 부처가 되지 못하는 바보도 있는가

고은 문화기행집 <절을 찾아서>

고은 문화기행집 <절을 찾아서>

고은의 문화기행집 <절을 찾아서>는 그 10여년 편력의 기록이다. 그는 환속하기 전까지 10여년 세월을 전쟁이 지나간 초토와 폐허의 산하를 떠돌거나 잠시 어느 한 곳에서의 선정으로 흘려 보낸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기록의 첫머리는 공교롭게도 낙산사로 시작한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에 의해 창건된 낙산사는 천년 세월을 지켜오는 동안 온갖 전쟁이란 전쟁은 다 치른 절이다.

창건 자체가 중국 유학 중 당나라의 침공계획을 눈치채고 이를 고국에 알리기 위해 급히 귀국한 의상에 의해서였으며, 통일전쟁이 끝난 후 범일에 의해 중건되었지만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고, 조선에 들어와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또 다시 허물어졌고, 한국전쟁 때에도 초토가 되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여행자는 그런 사연들을 모르는 척 짐짓 창망한 바다만 바라본다.

‘동해 낙산사!’라고 말해야 한다. 그곳에는 반드시 감탄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해 낙산사가 큰 절이어서가 아니다. 신라 불교의 오랜 절이어서도 아니다. 그 절은 바로 동해와 합쳐져서 이름이 불려지기 때문이다. 창연 망망한 동해와 더불어 오랜 세월을 그 파도소리에 싸여서 살아온 낙산사를 어찌하여 감탄사 없이 부를 수 있겠는가.

커다란 바다는 그의 모든 파도를 가지고 바닷가로 몰려온다. 웅장한 적이다. 
그 파도는 영원한 분노를 일으켜서 동해안의 모든 바위와 모래밭을 향해서 몰려온다. 그런 파도의 크기가 저 해돋이 수평선으로부터 몰려와서는 겨우 모래밭의 하얀 거품으로 마칠 때의 깊은 허무감은 무엇인가. 모든 힘을 합쳐서 만든 막강의 파도가 한낱 힘없는 거품으로 패잔해버리는 비극감은 무엇인가. 그런 파도의 사망을 경험하는 여행자의 무상감은 또 무엇인가.

낙산해수욕장

낙산해수욕장

여행자는 바다 앞에서 그 바다가 아무리 커다란 파도를 거품이 되게 하는 패배를 되풀이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보다 거대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한낱 터럭에 비유되는 자신 앞에서 바다는 너무나 큰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크지 않단 말인가. 한 여행자의 겸허 때문에 크지 않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야말로 그 바다와 똑같이 크다. 마침내 동해는 그 동해와 사람을 똑같이 만든다. 그리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가 된다.

동해에 가서 부처가 되지 못하는 바보도 있는가. 동해는 부처다. 동해는 관세음보살이다. 그 바다를 바라보면 바라보는 여행자의 여수야말로 법열인 것이다. 그래서 바다와 여행자는 한꺼번에 부처가 되어서 파도치고, 파도치는 소리를 듣고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동해는 외로운 여행자에게는 외로움을 더할 뿐
강릉에서 양양으로 북상, 거기서 속초로 가는 국도 10리를 따라 바다를 끼고 가노라면 이제까지의 산사기행에서 받은 위엄이나 그윽한 경지와는 달리 허심탄회한 바닷바람이 해송을 드문드문 흔들어주는 낙산사에 이른다. 바로 이런 사실이 낙산사의 특색이다. 의상은 동해의 관음수기(觀音授記)를 받고 이곳 바닷가에 절을 지었다. 그래서 낙산사는 관음도량이고, 그것도 해수관음도량이다. ‘낙산(洛山)’이라는 이름도 관음보살이 거주하고 있는 인도의 보타낙가산에서 유래한 것이나 기실 바닷가의 작은 동산일 뿐이다.

절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해바다가 일망무제로 내려다보이는 의상대를 거쳐야 한다. 원래 이곳의 해돋이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1926년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 때 정자를 세웠다. 의상대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높은 절벽 위에는 홍련암이 다소곳이 올라앉아 있는데 법당 마루 밑으로 지름 10㎝ 정도의 구멍을 뚫어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를 대표하는 불상처럼 알려져 있는 해수관음상은 16m의 높이로 마치 등대처럼 10리 안팎까지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낙산사의 또 하나의 명물은 원통보전 담장으로, 기와를 쌓고 다진 흙 사이사이에 동그랗게 다듬은 화강석을 별모양으로 끼워 넣어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정감이 느껴진다. 담이라는 본래의 실용적 기능에 이처럼 정감을 덧붙여놓은 안목과 소박한 정서로부터 받는 감동은 낙산사의 어떤 문화재가 주는 감동보다 깊다.

의상에 의해 창건된 낙산사는 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다. 의상의 관세음보살 친견을 비롯해 원효 역시 관세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며, 이광수의 소설 ‘꿈’의 모델이 된 조신의 설화도 낙산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이처럼 깊고 오랜 내력을 지닌 낙산사건만 숱한 전쟁의 참화 속에 잔재에 잔재만을 더하여 왔을 뿐 뚜렷한 문화재조차 남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참화는 전쟁에 그치지 않고 2005년에는 화마가 찾아들어 그나마 남은 것들을 앗아가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복원이 끝났지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동종 등은 불에 완전히 녹아버려 문화재 지정에서 해제되고 말았다.

낙산사 원통보전 별무늬담장

낙산사 원통보전 별무늬담장

어쩌면 동해 낙산사에는 애초에 따로 도량이 필요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동해 그 자체가 관음이고 관음의 도량이 아니던가. 아무리 초라하다 할지언정 낙산사는 광겁의 바다 동해를 등에 지고 어떤 초라한 기왓장으로도 관세음보살의 대가람이라고 할 수 있게 부유한 것이다. 그 휑뎅그렁한 마당의 마른 흙, 그리고 관음죽이 있던 곳에 솟아오른 늙은 해송들의 솔바람 소리, 절 경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동해 일망무제의 의상대, 그리고 낙산해수욕장의 빈 모래밭, 이런 것으로 여행자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

여행자여, 그대 혼자 가도 좋다. 그러나 낙산사에는 그대가 낳아서 가난하게나마 길러낸 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가면 그것처럼 좋을 수 없는 것이다. 동해는 그런 여행자를 아주 친절하게 맞이하면서 동해의 지혜를 선사한다. 동해는 외로운 여행자에게는 그 자신의 외로움을 더할 뿐 더 큰 것을 감춰버린다.

글·사진 | 유성문<여행작가> meonb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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