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지용과 옥천 - 꿈엔들 잊힐리야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나는 시를 새롭게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이 기행을 하는 동안 늘 들떠 있었다.

옥천의 여름

옥천의 여름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기행서라기보다는 해설서에 가깝다. 정지용에서부터 천상병까지 우리 시의 한 풍경을 이룬 22인의 시적 고향을 찾아가면서 좋은 시가 모두에게 쉽게 다가가고 즐겁게 읽히기를 바라며 쓴 글들이다. 저자가 글을 쓰면서 작자는 물론 다른 평자의 의견을 많이 참작했다거나, 특히 기행을 하는 동안 중·고교에서 문학을 담당하고 있는 현직 교사들과 더러는 동행을 하고 더러는 술자리를 함께하면서 들은 의견을 많이 반영했다는 데서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천상 기행서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자상한 해설들이 우리 시의 경관(景觀)을 두루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몇 차례 독자가 시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해설서 비슷한 글을 썼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면에서 감정의 확대라 할 수 있는 시를 가장 잘 이해하려면 그 시인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조건에서 살았으며, 그 시를 쓸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모은 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미 우리 시사에서 고전이 된 시들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쓴 글이다. 나는 이 기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목월의 향토색 짙은 밝은 색깔의 이미지가 무엇에 연유하는가도 알았으며, 영랑의 맑은 노래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도 알았다.

‘향수’의 고향

정지용문학관

정지용문학관

1988년 시인 정지용이 해금과 더불어 우리 곁으로 되돌아온 이후 그의 고향 충북 옥천은 순전히 시인의 땅이 되었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을 뿐이고,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서 ‘빨갱이 시인’으로 몰린 다음 한동안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려하던 고향이기는 하지만, 그의 시들이 대개 고향과 고향의 정서에 맞닿아 있기 일쑤이고, 그 고향 역시 먼 길을 돌아온 이후 기꺼이 그의 시들을 보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마을 거리 이름이 ‘지용로’로 바뀌었는가 하면 생가가 복원되고, 그 곁에 문학관이 들어서고, 해마다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기까지 한다. 어느 외국인은 그의 시가 너무 좋은 나머지 아예 보따리를 싸들고 들어와 그의 고향에 주저앉기도 했다. 이쯤에서 너무도 귀에 익은 그의 시 ‘향수’를 모다 읊조리지 않을 수 없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전문

실개천 가를 뛰노는 아이들

실개천 가를 뛰노는 아이들

그의 생가 앞으로 여전히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그 물줄기는 한껏 갸름해졌지만 물빛만은 그래도 맑다. 그 실개천 가로 아이들이 뛰어간다. 아이들을 따라가면 오래된 목조 교사(校舍)가 눈에 희번한 학교가 나온다. 죽향초등학교. 지용이 다닌 학교다. 당시의 교명은 옥천공립보통학교로 옥천 군내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학교였다. 지용은 4년제인 이 학교를 아홉 살 때인 1910년에 들어가 1914년에 졸업했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지용과 100년 터울의 동창인 셈이다. 지용에게는 또 다른 색다른 동창이 있다. 육영수 여사다. 시인의 한참 후배인 그녀는 시인이 해금되기 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한다. ‘웃고 뛰놀자.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시인의 흉상 곁에 세워진 여사의 휘호탑이 아이러니하다. 그러고 보면 여사의 생가도 시인의 생가 가까이에 있다.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 우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 맞아 쩌 르 렁!//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늘 오던 바늘장수도/ 이봄 들며 아니뵈네 -‘산너머 저쪽’ 전문

금강이 휘돌아 나오고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지용의 고향마을을 ‘휘돌아’ 나온 실개천은 여기저기서 모여든 작은 물줄기들과 함께 금강에 합류한다. 그리고 금강은 대청호에서 잠시 제 몸을 가둔다. 그래서 정지용 문학기행은 당연히 대청호의 어느 물가에서 시작, 금강을 따라 흘러간다. 아니,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길은 옥천의 ‘넓은 벌’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때 옥천 땅은 신라와 백제가 번갈아가며 주인이 되던 격전지였다. 군서면 월전리의 구진벼루는 관산성 싸움을 벌이던 백제 성왕이 매복한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곳으로 전해진다. ‘구진’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힌 성왕의 전사지 ‘구천’에서 온 말이며, ‘벼루’는 병풍처럼 둘러선 벼랑을 뜻한다. 백제는 관산성 싸움에서 군주를 잃고 크게 패퇴한 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국운을 가른 벼랑은 높고 가파르건만 그 아래 휘도는 물은 그저 무심하기만 하다.

금강은 장계에서부터 금강유원지까지 거슬러 오르는 구간에서 가장 싱그러운 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으로 치자면 청소년기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자연뿐만 아니라 견지로 쏘가리를 낚고, 우산으로 피라미를 잡는 사람들의 풍정 또한 풋풋하기만 하다. 물길에 가로막힌 땅은 곳곳에 불편함을 낳았지만 그만큼 순정한 인심을 지켜내기도 한 것이다. 마을 들머리에 세워진 돌탑과 솟대, 장승 등 그런 소박한 기원 밑에 벌거숭이 아이들은 자라났다.

삼동내 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지리…// 왜 저리 놀려대누// 어머니 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지리…// 왜 저리 놀려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 홀로 놀자 -‘종달새’ 전문


영동의 한 농가

영동의 한 농가

어름치가 노니는 지탄을 거슬러 오르면 땅은 영동 땅이고, 금강 또한 영동의 강이 된다. 여기서도 금강은 강선대 등 양산팔경을 빚어 강을 찾는 이의 마음을 자못 고즈넉하게 한다. 특별히 ‘양강’이라 불리는 송호리의 물가에는 ‘문향(文鄕)의 숲’이 있다. 민요 ‘양산가’를 비롯, 이 고장 출신 문인들의 시비를 세운 숲으로 금강 가를 흐르는 연면한 문학적 전통을 짐작케 한다. 강가를 벗어나면 길은 이내 산골로 오르고, 드문한 농가의 툇마당엔 장독대 사이로 다알리아도 맨드라미도 한껏 무르익어가고 있다.

가을볕 째앵하게/ 내려 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다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다알리아// 시악시아, 네 살빛도/ 익을 대로 익었구나//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익을 대로 익었구나// 시악시야, 순하디 순하여다오/ 암사슴처럼 뛰어다녀 보아라// 물오리 떠돌아다니는/ 흰 못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나온 다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 나오는 다알리아 -‘다알리아’ 전문

글·사진 | 유성문<여행작가> meonbit@hanmail.net

답사기로 떠나는 답사여행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