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주 우도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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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따뜻한 바람처럼

내 바다의 저녁 불빛들, 꿈들, 안개와 같은 지난 여행의 기억들에게.

곽재구는 시인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의 기행은 시적이다. 그의 시는 노인이 노를 젓는 낡은 배를 타고 묵언의 바다로 나간다. 그 노인은 해신(海神)이다. 배는 푸른빛의 어둠을 뚫고 흘러간다. 날개가 없는 시간들, 언덕이 없는 꽃들, 바람이 없는 춤들이 스쳐 지나간다. 짧은 항해 끝에 배는 한 섬에 닿는다. 바다 위의 신비한 푸른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천천히 선창의 끝으로 걸어간다. 그곳에 가로등 하나가 서 있다. 오래 전, 이 가로등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하룻밤을 새운 적이 있었지. 밤새 파도소리를 들으며 별을 보았지.

성산포, 제주바다

성산포, 제주바다

그날처럼 가로등 기둥에 등을 대고 앉는다. 문득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 하나가 보인다. 그 불빛은 가로등 밑둥까지 천천히 다가온다. 작은 배 위에 한 노인이 등불을 들고 서 있다. 그 노인은 시신(詩神)이다. 그는 삿대를 내밀고 나는 주저 없이 배에 오른다. 배는 다시 바다를 저어간다. 세월이 오고 세월이 가고, 천형인 그 시간들을 운명처럼 바람처럼 따뜻하게 껴안는 축제의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이제 배는 또 어떤 포구로 흘러갈 것인가.

안녕. 이정표 앞에 멈춰선 나는 눈인사를 한다. 낯선 마을들의 이름이 적힌 이정표 앞에 섰을 때 여행자는 그 마을의 이름 앞에서 어떤 영감을 느낀다. 새로운 삶, 시간, 언덕, 풍경, 꽃, 흙냄새…. 녹색 바탕에 흰색 페인트로 적힌 마을들의 이름 속에는 그 마을의 과거와 현재, 사랑과 추억의 모든 싱싱하고 쓸쓸한 풍경들이 배어 있다. 녹물이 조금 배어 있다 한들 어찌 그 이정의 문신 앞에서 인사를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모든 여행자들은 이정표 앞에 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의 눈빛을 지니게 된다.

바닷게와 만휴
저자의 제주 기행은 사계포에서 우도를 거쳐 조천으로 흘러간다. 산방산이 자리한 사계포는 화가 이중섭과 추사 김정희의 예술혼이 쓸쓸하게 고여 있는 곳이다. 이중섭은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터지는 동안 이곳 바다에서 일본인 아내 남덕을 그리워하며 가난과 싸웠다. 그가 화구 살 돈이 없어서 은박지 위에 그려낸 그림들에는 어김없이 바닷게들이 등장한다. 그는 많은 끼니를 바닷게들로 해결했고, 자신이 먹은 바닷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그림 속에 게를 그려 넣었다.

추사 김정희는 또 어떤가. 이곳 바닷가에서 9년간의 유배생활을 한 그는 짧지만 강렬한 경구를 남긴다. 만휴(卍休). 안성리 추사적거지에서 만난 그의 경구는 그가 유배지에서 남긴 걸품 ‘세한도’와 마찬가지로 적조한 초탈의 경지를 보여준다. 바닷게와 만휴. 세상 모든 작고 쓸쓸한 것, 분노와 열정과 그리움들, 욕망과 좌절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이란 점에서 사계포는 한줄기 아름다운 빛을 지닌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또 다른 여로의 출발지다.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포구기행>

바로 곁 송악산에서는 마라도로 가는 배가 떠난다. 국토의 맨 남쪽 끝, 땅이 마지막으로 호흡을 멈추는 그곳으로 드나드는 배를 보는 것도 허허롭다. 천천히 선착장으로 내려가니 마지막 배가 이미 떠났다고 매표원이 일러준다. 어둠이 내릴 무렵 갈치구이를 파는 식당에 들렀다. 집어등을 켠 고깃배들을 바라보며 맥주 한잔. 육지에 두고 온 지지리도 못생긴 세상의 이야기들도 이곳에서는 그리운 불빛이 된다.

성산포에서 우도로
서귀포에서 하룻밤을 묵은 저자는 남원과 표선을 거쳐 성산포로 흘러간다.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60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시인보다 4세기 전 29세의 청년시인 백호 임제는 성산포에서 우도로 가는 배를 탄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산포는 우도로 가는 관문이다.

정의 현감을 만나서 함께 배를 타고 우도로 떠났다. 관노는 젓대를 불고 기생 덕금이는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성산도를 빠져나오자 바람이 몹시 급하게 일었다. 뱃사공이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자, 나는 웃으며 “사생은 하늘에 달렸으니 오늘의 굉장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다”고 하였다. 바람을 타고 배는 순식간에 우도에 닿았다. 이곳의 물빛은 판연히 달라 흡사 시퍼런 유리와 같았다. 이른바 ‘독룡이 잠긴 곳이라 유달리 맑다’는 것인가.

4세기 전의 시인은 한껏 풍류와 호기에 젖어 있지만, 행자의 눈에 성산포는 ‘슬픔의 바다’에 가깝다. 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도는 이른바 ‘우도팔경’이라 하여 탐라 제1의 절경을 자랑한다. 주간명월(晝間明月), 야항어범(夜航漁帆), 천진관산(天津觀山), 지두청사(指頭靑沙), 전포망도(前浦望島), 후해석벽(後海石壁), 동안경굴(東岸鯨窟), 서빈백사(西濱白沙)로 어느 것 하나 그 이름에 값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지만 우도의 물빛이 슬프도록 푸르고 투명한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없는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저 물결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우는 아기 젖 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비 오는 날의 우도

비 오는 날의 우도

해녀들의 바다, 그리고 아침하늘
1932년 1월부터 3월에 걸쳐 제주 일대에서는 해녀들의 권익사수를 위한 격렬한 항일투쟁이 있었다. 당시 해녀들은 해산물 채취대금의 8할쯤을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착취당했는데 그 시정을 위해 해녀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섰던 것이다. 연인원 1만7000명에 달하는 해녀들의 항일투쟁은 당시까지 국내 최대의 어민봉기이자 여성 항일운동으로, 우도의 해녀들은 여기에 최전위 역할을 했다. 나이든 해녀들은 지금도 당시 불렸던 ‘해녀가’를 기억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세상은 바뀌었지만 해녀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살기 위해 늙은 몸을 이끌고 바다로 나간다. 그 숨비소리는 제주바다보다 더 깊고 푸르다. 행자는 그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섬을 거닌다. 키 낮은 언덕들과 화산석으로 경계 지어진 밭들, 섬 안 어디에서든 보이는 파도들, 그 곁에 납작 엎드린 마을들…. 그런 풍경들 위로 느릿느릿 햇살들이 쏟아져 내린다. 우도에서의 삶은 신산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외려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바람이 슬픔을 머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천 연북정

조천 연북정

이윽고 나는 상우목동에 닿았다. 눈부시게 희고 아름다운 모래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래들은 바다의 푸른빛과 어울려 꿈결처럼 빛났다. 죽은 산호들의 흰 뼈로 이루어진 모래사장, 나는 발목을 물살에 적시며 천천히 바닷가를 거닐었다. 삶의 끝에서 더더욱 빛나는 이름들. 따뜻한 바람들이 바다로부터 불어왔다. 바람들은 다시 산호들의 모래를 파도 쪽으로 쓸어가고…. 바다 끝에서 나는 천천히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몇 개의 집어등을 보았다.

저자가 제주를 떠나기 전 들른 곳은 조천이다. 조천(朝天), 아침하늘. 하지만 이곳 바다의 빛은 검은빛이다. 해안선을 따라 굴곡을 이룬 용암들이 그 해안선과 만나는 파도의 몸빛을 검은빛으로 만든다. 먹기와를 얹은 옛 기와집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마을 안 골목길을 따라가면 그 끝에 정자 하나가 나온다. 연북정(戀北亭).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부임해온 옛 목민관들이나 기약 없이 유배되어온 사람들이 한양에서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북녘을 그리워하던 정자다. 그러나 아침은, 더구나 하늘은 결코 북에서 열리지 않는다. 다만 어둠을 뚫고, 그 검은빛을 거두며 다가오는 것일 뿐.

글·사진 | 유성문<여행작가> meonb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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