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다리에서 생각하는 우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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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삶 실현 민주주의가 과제다

경술국치 100주년·한국전쟁 60주년·전태일 분신 40주년·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시작한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청계 6가 전태일 동상은 지난해 연말 김호기·박태균 교수가 연재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찾았던 곳이다. 마지막 원고에서 김호기 교수는 미래에 대해 말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민주주의의 성숙이다. 그 미래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미래다. 노동을 민주주의의 중심축에 놓지 않고서는 인간적 삶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전태일이다. <편집자 주>

청계6가 버들다리 위 전태일 동상. 버들다리는 오는 11월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전태일다리’로 개칭될 예정이다.

청계6가 버들다리 위 전태일 동상. 버들다리는 오는 11월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전태일다리’로 개칭될 예정이다.

지난 연말 청계천 6가 전태일 동상을 찾은 후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그동안 10개월이 지났다. 2010년을 시작하면서 사회학 연구자로서 필자는 한일병합 100년, 한국전쟁 60년, 4월혁명 50년, 전태일 분신 40년, 그리고 광주항쟁 30년의 현장을 탐방하고 그 의미를 물어왔다. 그 첫 번째로 찾은 곳이 다름 아닌 여기 청계천 6가였다.

시간상으로 가장 늦은 11월에 있었던 사건인데도 올해 역사 탐방에서 이곳을 맨 먼저 찾은 것은 그 현재성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노동이다. 우리 인간에게 모름지기 노동은 삶의 핵심 영역이다. 노동은 생산 및 창조의 다른 이름이며, 평범한 이들에겐 생계를 위한 기본 수단이기도 하다.

전태일 분신과 노동 없는 민주주의
우리 사회에서 이 노동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부상시킨 것은 정확히 4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여기 평화시장 앞길에서 스물두 살의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마라’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산업화가 가져온 향도이촌(向都移村)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낯선 도시에서 시작한 노동자들의 삶은 말이 삶이었지 생존에 가까운 것이었다. 누구는 격렬했던 그 산업화의 일차적 수혜계층이 노동자였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노동자라고 모두 같은 삶을 영위한 것은 아니었다. 화이트칼라로 불린 신중간계급은 경제성장이 가져온 결과의 분배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이른바 도시 비공식부문이라 불린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육체노동자들의 노동조건 및 생활조건은 마치 18~19세기 영국 자본주의 산업화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삶과 매우 유사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이들은 성장의 결과에 대한 분배 및 재분배에서도 정당한 수혜를 받지 못했으며,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대우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분배의 정치’ 영역과 ‘인정의 정치’ 영역 모두에서 이들은 대표적 소외계급이었다. 전태일의 외침은 바로 산업화의 위용에 가려지고 억눌려온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현실이 참혹했던 만큼 그 절규에 담긴 아픔과 공감, 그리고 설득력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이론에 따르면 전태일 분신사건은 우리 사회 노동의 국면사에서 하나의 예광탄이었다. 다시 말해 1970~80년대 노동운동, 90년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등장이라는 일련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전태일 분신사건은 새로운 노동의 국면사를 여는 일대 전환점이었다.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가 20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전태일 분신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의 생활과 노동운동의 의미를 비로소 자각할 수 있게 됐다.

노동은 자본과 함께 시장을 구성하는 2대 핵심 요소다. 노동력 절감 기술이 고도화하는 정보사회에서도 여전히 노동이 우리 삶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다. 더욱이 서비스사회가 강화되면서 노동이 분화되고 이른바 감정노동의 수요 및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도 하다. 노동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한 게 아니라 변화되고 있으며, 노동과정·노동시장·노사관계가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는 게 현실이다.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가 내건 현수막 너머로 청계천이 보인다.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가 내건 현수막 너머로 청계천이 보인다.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동문제가 이렇게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노동 담론과 정책에 대한 토론이 그리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여름 쌍용자동차 사태는 그 대표적 사례다. 사태가 격렬히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의 삶이 더 없이 애처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든, 정당이든, 나아가 공론장이든 국민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바로 우리 사회의 현재적 자화상이라는 점이다. 일자리 창출에서 안정에 이르기까지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결코 성숙할 수 없다. 당장 먹고 살아가야 할, 날이 밝으면 출근해야 할 일자리가 없는 상황에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본래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하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 있는, 노동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 창출과 안정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민주주의를 먹고 사는 문제에만 국한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한 구성 요소로서 그 경제적 차원을 주목하고 또 강조하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과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시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적절한 주거 대책과 안전한 노후 보장 등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매우 중차대한 미래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지난 10개월 동안의 역사 기획을 마무리할 시점에 도달하니 개별 사건들이 주는 현재적 의미들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한일병합과 한국전쟁이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번영의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면, 4월혁명, 광주항쟁, 그리고 전태일 분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청계천 6가 전태일 동상에서 시작한 역사 여행은 마산과 광주, 임진각과 상해, 그리고 강화도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현실의 여행 경로는 이러했지만, 마음 속 여행은 대학 2학년인 1980년 서울의 봄, 윤동주가 공부했던 교토 도시샤대학, 흥남 철수 작전과 1·4후퇴, 그리고 만주와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전역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김호기 교수가 청계6가 전태일 동상 앞에 서 있다.

김호기 교수가 청계6가 전태일 동상 앞에 서 있다.

이제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우리의 외부로서의 동아시아의 구조 변동이다.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올해는 의미심장한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다름 아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이 그 자리를 중국에 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2분기에 중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앞질렀는데, 예상컨대 연간 약 3000억 달러로 일본을 앞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세계 질서는 미국을 상급 동반자로, 일본과 유럽을 하급 동반자로 한 구도에서 미국과 중국으로 이뤄진 ‘주요 2개국(G2) 시대’로 막 변화하고 있는 와중이다. 이러한 중국의 부상은, 최근 천안함 사건 또는 중국과의 교역 규모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 이미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어떻게 모색하고 구축할 것인가야말로 앞으로 우리 사회에 부여된 가장 중대한 대외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대내적인 사회변동 또한 눈여겨봐야 한다. 정부 수립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에 뒤이어 최근 우리 사회는 새로운 시대로의 문턱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무엇보다 문턱 저 안에 놓인 세계는 우리 사회를 역동적으로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개발독재론 시대와 시장만능주의 시대를 넘어 이제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 더 많은 정의의 사회를 일궈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적 삶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최우선의 가치라는 점이다. 2008년 촛불집회와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최근 점증하는 사회양극화의 확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험대 위에 이미 올라 서 있다. 세계화의 충격 속에서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것,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속에서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부여된 가장 중대한 대내 과제일 것이다.

전태일 동상 앞에 서서
며칠 전 그동안 이 기획에서 사진을 맡아준 김석구 국장과 지난 연말 우리가 처음 만났던 청계천 6가 전태일 동상 앞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기로 약속했다. 전철을 타고 종로 5가역에서 내려 동대문시장을 가로질러 평화시장 앞으로 갔다. 오전 시간인지라 동대문시장은 막 문을 열고 있었다.

10개월 만에 찾은 전태일 동상 인근에는 작은 변화가 하나 있었다. 지난 10월 3일 서울시가 동상이 있는 여기 ‘버들다리’의 명칭을 ‘전태일다리’와 함께 쓰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는 그동안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로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지난 9월 서울시의회 일부 의원들이 이 요구를 발의해 서울시가 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오는 11월 13일에 전태일다리 명명식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반신의 동상 앞에 서서 그의 눈을 응시해 보니 마음은 여전히 착잡했다. 은회색 동상의 눈빛은 결연하기도 하고, 다소 처연하기도 했다. 전태일이 분신했던 1970년에 필자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나는 이미 오십에 달했는데, 그는 여전히 청년이다. 전태일 동상 앞으로 오가며 시장을 여는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 새삼 변화하는 시간과 변화하지 않은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40년 동안, 아니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변화한 것은 무엇이며,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을 하면, 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전태일다리 아래로 흐르는 청계천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변화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동시에 더 나은 삶,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나라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그대로인, 결코 변화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역사란 본디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우회하는 나선형을 이룬다 하더라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사진을 찍은 후 대학원 세미나가 있어 다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종로 5가 쪽으로 걸어갔다. 짧은 시간 사이에 시장은 이미 특유의 활기를 되찾았다. 손님을 부르는 상점도 있었고, 흥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확히 10개월 만에 원점으로 돌아온 시간, 이제 과거에서 미래로 가야 할 현재의 시간, 종로 5가 지하철역으로 가는 보도에는 인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성큼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동안 이 기획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우리가 방문한 기관 관계자 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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