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 맞서 문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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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심상찮았다. 9월 말, 한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는 발매 예정인 한 게임의 한글화 팀원의 ‘실종’ 글이 올라왔다. 게임의 발매 후 게임을 뜯으러 간 팀원이 게임 실행 후 연락두절되었고, 투입된 2차 예비팀원도 연락두절이 됐다는 것이다. 팀원들 중 한 명의 ‘네이트 온’에는 “문명5 설치 중”이라는 단어만 남아있었다.

누리꾼이 만든 문명 게임 속 ‘간디’를 패러디한 이미지. http://worb.egloos.com/3464892

누리꾼이 만든 문명 게임 속 ‘간디’를 패러디한 이미지. http://worb.egloos.com/3464892

‘문명’은 일종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처음에는 보드게임이었다. 이걸 미국의 게임개발자 시드마이어가 PC게임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게임방식은 과거 있었던 역사적 문명을 하나 선택하여 다른 문명과 경쟁하며 번창하게 하는 것이다.

10월 초, ‘문명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한다. 트위터든 블로그든 활발히 활동하던 누군가가 어느날 온라인에서 ‘잠적’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는데, 그 이유가 ‘문명’이라는 게임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험담이 쏟아져 나왔다. “금요일 밤, 잠깐 맛보려고 실행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월요일 새벽이었다”는 류다. ‘문명’이 주목을 끌다보니 덩달아 화제에 오른 경우도 있다. 누리꾼은 경북 경산시에 있는 문명고등학교의 홈페이지를 캡처한 이미지를 ‘우리…대학 갈 수 있을까요?’라는 제목으로 돌려봤다. ‘인강_듣고_눈떠보니_서울대.jpg’라는 제목의 이미지도 있다. 캡처한 인터넷강의 선생의 실명이 ‘문명’이었다.

그런데 10월 중순에 이르자 ‘문명 유머’의 중심이 미묘하게 이동한다. 바로 문명게임의 캐릭터인 간디다. 누리꾼의 증언에 따르면 문명 게임 속 간디는 막무가내인 데다가 거의 깡패 수준이다. “순순히 ○○○을 넘긴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임 속 간디의 협박(?)은 누리꾼 패러디를 양산했다. 한 대학축제의 주점에 내걸린 안내판엔 간디의 얼굴과 함께 “순순히 술을 마신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간디의 실체’라는 글도 나왔다. 한 누리꾼은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라는 책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간디는) 노동자나 계급평등을 주장한 이에게는 히틀러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슬람 여성과 결혼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은 교조적인 힌두주의자이며, 인도의 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의 변호자였다.”

진실은 뭘까. “허허허… 그렇게 보는 사람도 물론 있지요.” 김선근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는 간디 연구의 권위자다. 간디 자서전 및 주요 저서를 번역했고 간디의 삶과 사상에 관한 20여편의 논문을 냈다. 김 교수는 “인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독립을 고민하던 간디는 폭력으로는 일시적인 독립만 쟁취할 뿐이라고 봤다”며 “인도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가 비폭력이라는 것이 간디의 결론인데, 그러기 때문에 간디는 단지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세계적 철학사상가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김 교수가 말하는 간디와 ‘문명’의 간디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간디 연구자나 간디 학회 같은 데서 게임개발자인 시드마이어에게 공식항의할 일은 아닐까. “간디는 시비는 가리되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문화적 현상에 대해 칼을 들이대면 더 큰 탈이 벌어진다는 것이 간디의 가르침입니다.” 역시 대인배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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