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상 규명, 미완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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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가해자 사법적 처벌 17년만에… 발포명령자 등 핵심은 여전히 미궁

1987년 이전까지 한국 사회 공론장에서 ‘5·18’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5·18이 거론될 경우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대부분 ‘폭동’이나 ‘소요’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은 폭넓게 이뤄졌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사진은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모습. |경향신문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은 폭넓게 이뤄졌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사진은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모습. |경향신문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그해 치러진 대선에서 신군부의 핵심 실세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이미 비등점을 넘은 상황에서 5·18 진상 규명 요구를 거부할 정치적 동력은 없었다.

청문회 정략적 이해관계로 중단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진 것은 그 뒤 5·18 진상 규명 과정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이 됐다. 야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면서 그해 6월 ‘5공비리특위’(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와 ‘광주특위’(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5·18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시작된 것이다.

청문회는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여론의 집중적인 관심사가 됐다. 그러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접근이라는 점에서는 군의 작전문서가 공개된 것 말고는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끝났다. 최정기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 이전까지 광주 시민들과 민주화운동 세력만이 알고 있던 광주 이야기를 전 국민이 알게 된 것 이외에 사건의 실체적 규명과 관련해 밝혀진 게 거의 없었다”고 평가했다. 왜 그럴까. 청문회 당시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과 관련된 쟁점은 네 가지였다. 민중항쟁의 발생은 과잉진압 때문인가 과격시위 때문인가, 집단발포 명령은 누구 책임인가, 미국은 책임이 없는가, 5·18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광주청문회는 총 17회에 걸쳐 67명의 증인을 소환했다. 이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많은 시민이 계엄군의 무력 앞에 희생됐다는 점은 공개적인 사실이 됐다. 그러나 이들 네 가지 질문에 분명한 답을 줄 수 있을 만한 자료나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청문회는 제도정치권의 정략적 이해관계가 작용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정권은 1988년 11월 전두환의 사과성명 발표와 백담사 은둔,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 양심수 석방 등을 통해 정치적 봉합을 시도했다. 야당 또한 전두환의 청문회 증언 이후 “역사적 평가에 맡기자”라며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청문회는 결국 1989년 2월에 중단됐다. 이후에는 청문회를 이어갈 정치적 동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면서 청문회를 주도한 야권이 분열된 것이다. 민자당은 ‘광주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5·18 문제를 종결하려 했다.

과거사 청산서 새 사실 밝혀져
5·18 진상 규명 과제는 검찰과 사법부로 넘어갔다. 1994년 5월에 5·18 피해자 32명은 학살책임자 35명을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듬해 7월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여론의 불만이 비등하자 김영삼 정권은 그해 12월 5·18특별법을 제정했다. 검찰도 태도를 바꿔 1996년 신군부 핵심 인사 8명을 기소했다. 재판은 1년 2개월 동안 진행됐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피고들의 행위가 군사반란과 내란에 해당한다고 보고 유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5·18 가해자들에 대한 사법적 처벌이 사건 발생 17년만에 이뤄졌다.

1988년 광주특위 청문회 당시 시민들이 TV를 통해 청문회를 시청하고 있다. |경향신문

1988년 광주특위 청문회 당시 시민들이 TV를 통해 청문회를 시청하고 있다. |경향신문

그러나 사법적 판단을 통한 진상 규명은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최정기 교수는 지난해 11월 5·18 30주년 준비 학술행사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5·18 재판에서 주로 다룬 것은 국가에 대한 (가해자들의) 범죄 측면이었으며, (국민 인권 유린이라는) 국가범죄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 과정에서 진상 규명과 관련된 주요 자료와 증언이 수집됐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 규명의 관점에서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검찰과 법원은 학생운동에 대한 초기 진압 과정에서 자행된 군의 폭력이 우발적인 것이었는지 명령계통에 따른 체계적인 행위였는지를 다루지 않았다. 발포명령이 어떤 명령계통에 따라 수행된 것인지도 밝혀내지 않았다. 광주시 일대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과 암매장 사실 여부에 대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5·18 당시 군에 의한 증거인멸 활동의 실상도 미궁에 빠진 상태로 남았다.

가해자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결국 용두사미로 끝났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받은 전두환과 노태우는 복역 후 1년도 지나지 않은 그해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5·18에 대한 가장 폭넓은 수준의 조사는 참여정부 시기에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이뤄졌다. 2005년 5월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돼 활동에 들어갔다. 위원회는 1980년 국보위의 ‘광주사태진상조사단’의 조사보고서, 기무사 자료, 각급 부대 장교와 사병·보안부대원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 냈다.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처가 결정되기 전부터 군대 동원이 계획됐다는 점, 당시 계엄군과 보안사는 5월 20일 3공수여단의 발포와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군의 지휘계통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등이 드러났다.

시건 당시에는 존재했지만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찾아내지 못한 자료도 있다. 육군본부에서 작성한 ‘총장 지시사항’ 자료철에는 1980년 5월 3일~6월 29일 기록이 빠져 있었다.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홍금숙씨가 전남합동수사단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도 남아 있지 않았다. 505보안부대가 작성한 사망자 검시조사 결과 보고서와 국군통합병원에서 작성한 응급실 기록부 및 입원환자 등록부도 발견되지 않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과 관련해서는 광복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그 어떤 사건과 비교하더라도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졌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발포 명령자와 미국의 역할처럼 진상 규명에 필요한 핵심 사실은 여전히 미궁이다.

이런 상황에서 5·18이 광주만의 사건으로 축소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5·18의 전국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30주년을 맞아 각종 행사 준비로 바쁜 광주와는 달리 전남 지역만 하더라도 올해 5·18 기념행사를 개최하는 곳은 22개 시·군 가운데 7곳에 불과하다.

오승용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5·18이 과연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운동의 디딤돌로 인식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면서 “5·18이 광주 지역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게 하려면 5·18 관련 단체들이 광주만의 독자성만을 강조할 게 아니라 다른 지역 민주화 운동 단체들과 연대해 한국민주화 운동이라는 보편적 흐름 안에 5·18을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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