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주’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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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5·18은 광주만의 일이 아니다

5월이다. 「Weekly 경향」의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는 광주로 갔다. 30년 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뜨거운 상처다. ‘광주’라는 이름 앞에 사람들은 울거나 분노했다. 그 분노와 슬픔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견인해 한국 사회 민주화의 기름진 밑거름이 됐다. 김호기·박태균 교수가 4회 동안 ‘5·18’의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돌아보는 글을 기고한다. 박태균 교수가 오늘날 우리 사회가 1980년 광주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편집자주>

광주를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역사화’하기 위한 작업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5·18 당시 시민들의 격렬한 항쟁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앞 금남로.

광주를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역사화’하기 위한 작업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5·18 당시 시민들의 격렬한 항쟁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앞 금남로.

과연 1980년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1993년 처음 현대사 강의를 시작했을 때 광주는 살아있는 역사였다. 1980년 광주의 직접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또 5월이면 열리는 모든 대학 축제의 화두는 광주였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라는 섬뜩한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는 캠퍼스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졌다.

그러나 30년밖에 지나지 않은 광주는 이제 50년이 된 4·19혁명이나 90년이 지난 3·1운동과 다르지 않은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 됐다. 지금 대학교 1학년이 1991년을 즈음해 태어난 학생들이니 나이 많은 복학생이라고 해야 1985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게 1980년 광주를 접하는 것은 광주를 방문하지 않는 한 더욱 쉽지 않다. 다행히 수준 높은 예술성을 담은 영화들이 만들어졌지만 <꽃잎>(1996)이나 <박하사탕>(2000)은 이들에게 너무나 오래됐고, <오래된 정원>(2006)과 <화려한 휴가>(2007)는 입시에 지쳐 있던 이들에게 너무도 사치스러운 선택이었다.

‘미국 사과’ 요구한 미국문화원 점거사건
시간이 지날수록 왜 그런 일이 일어났어야 했는지, 왜 광주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해야 하는지, 왜 광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1980년 광주를 이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가? 50주년이 된 4·19혁명이 전국적으로 대접받고 있는 가운데 30주년이 된 5월의 광주는 광주를 제외하고는 푸대접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1980년대에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상 광주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기 위해 또 다른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 어려운 과정은 1982년 부산에서 시작됐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부산 지역 범기독교 사회운동 단체 소속의 학생들이 전두환 정부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리면서 미국문화원에 방화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문화원에서 공부하던 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얼마나 상황이 엄혹했으면 그런 방법을 택했을까 싶지만 그래도 결코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왜 미국문화원이었을까. 사건의 주모자인 문부식은 나중(1986년)에 다음과 같은 탄원서를 제출했다.

반민주적 반민족적 현 군사파쇼 정권을 지탱시켜 주는 가장 큰 힘은 정치적 기반도, 경제력도, 경찰력도, 군사력도 아니며 바로 비정상적이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 이 시점에서 저는 과연 미국이 이 땅에 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묻고 싶습니다. … 주한미군의 허락 없이는 대규모 병력 이동이 불가능하다면 광주사태 때 수많은 공수부대 요원을 광주에 투입시켜 전두환 군부가 단독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 어찌 우방으로 자처해 온 미국이 그토록 잔인한 광주시민 학살을 지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후 1980년 광주의 전모를 밝히고자 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1982년 4월에는 강원대생들의 성조기 소각 사건이 발생했고, 1983년 9월에는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으로 고등학생 1명이 숨지고 경찰 4명이 부상했다. 그리고 급기야 한국의 중심이자 주한미군사령부가 있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미국문화원이 학생들에게 점거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부산과 대구에서 있은 미국문화원 사건이 무고한 사상자를 내면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1985년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사건은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점거라는 방식을 빼고는 사상자가 나지 않은 평화적 방법이었다. 또한 이 시기가 남북적십자회담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국의 책임’
창문을 통해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라는 펼침막을 내건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광주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 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미국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 국민은 한미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라’ 등의 주장을 담고 있었다.

박태균 교수가 상무대 영창 앞에 서 있다.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잡혀간 시민군들은 이곳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박태균 교수가 상무대 영창 앞에 서 있다.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잡혀간 시민군들은 이곳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이 남북적십자회담을 의식하고 자진 해산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광주의 진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미’가 허용되지 않는 성지에서 ‘미국’이라는 존재가 사회적뿐만 아니라 학문적 논의의 중심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반미 자주’가 학생운동의 핵심적 슬로건이 됐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북한 바로 알기 운동’과 ‘통일운동’으로 연결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이후 진행된 이른바 ‘광주 청문회’에서 1980년 광주와 관련된 공개질의서가 미국 행정부에 전달됐다. 1989년 6월 미국 국무성은 다음과 같은 답변서를 제출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은 한미연합사의 지휘권 밖에 있는 부대로, 그 이동에 대해 사전 협의는 물론 사후 통보도 없었다. 광주사태 수습을 앞두고 군사적 해결보다는 정치적 해결을 촉구했으나 실패할 경우 특전사보다 20사단으로 대치시킨다는데 대해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와 함께 (5월) 17일 밤 정치인들이 연행되는 등 급변하는 상황에서 광주에 파견된 20사단의 동향을 몰랐다.

이는 1980년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의 1985년 7월호 신동아 인터뷰에 있는 내용과 동일한 것이었다.

미국의 이 같은 해명에도 한국 내에서 미국의 책임 문제에 대한 논의는 식지 않았다. 1990년 1월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는 미국이 광주시민에게 정말 사과해야 할 것은 광주에서의 발포 명령에 미국이 개입됐는가 여부가 아니라 “미국이 지금까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해 광주 피해자들에게 아픔이 더해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1995년에 광주를 방문한 제임스 레이니 대사는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닌데 상당수 광주시민들이 미국이 5·18을 조종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면서 “이로 인해 ‘상당 수준의 반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차례 거듭된 답변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1980년 광주와 미국의 관계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당시 미국의 관련 문서들이 공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정보공개법은 30년이 지난 문서들을 공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경향신문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경향신문

광주를 수면 위로 올리는 일은 이처럼 쉽지 않았지만 이 과정은 이후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미국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국가 기념일에 성조기가 태극기와 함께 등장하는 ‘성지’에서 이제 미국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윤금이 사건’(1992년)과 ‘미선·효순이 사건’(2002년) 때 대규모 반미시위가 이어졌으며,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비롯한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심지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선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문제를 반대하는 시위도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 시기만 해도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차지철로 하여금 베트남 파병 반대 발언을 하도록 했을까.

다른 하나는 미국의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광주가 한국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한·미 관계가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인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1980년 광주는 지역 감정의 한 부분으로 치환하려는 끊임없는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1980년 광주는 한국 현대사 전체에 대한 인식을 끌어냄으로써 단지 한 지역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승화된 것이다. ‘오래된 정원’의 ‘꽃잎’ 아래에서 ‘박하사탕’을 먹으면서도 ‘화려한 휴가’를 보낼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당한 ‘역사화 작업’ 계속돼야 한다
그래서 그런가? 4·19 혁명과는 달리 광주에 집중돼 매년 진행되고 있는 5월 기념행사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따라서 광주를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역사화’하기 위한 작업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계속돼야 한다. 그래야만 앞에서 제기한 왜 그런 일이 일어났어야 했는지, 왜 우리 사회 전체가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등 문제에 대한 올바른 답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광주는 광주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국 내의 특정한 지역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과 7개월 전에 있은 부산과 마산에서의 민주항쟁을 고려하면 단순히 지역적인 사건으로만 치환할 수는 없다. 4·19혁명 이후부터 이어져 오는 민주화의 흐름을 잇고 있으며, 유신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YH사건과 부마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의 진원이 됐다.

특히 부마항쟁과의 연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것은 민주화를 위한 혁명이 아니라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반혁명’ 전략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박정희가 죽지 않고 유신이 계속됐다면 국민들 스스로가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항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1980년 광주는 한국 현대사 연구에 기폭제가 됐다. 1970년대를 통해 현대사를 재조명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80년 광주를 통해 한국 현대사 연구는 일취월장했다. 그리고 이른바 과거사와 관련된 사안들이 시대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광주는 오히려 더 축소되고 있는 느낌을 준다. 1980년 광주를 또다시 ‘지역’적인 문제로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80년 광주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무관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그렇다. 원인은 우리 안에 있다. 5월 광주는 그래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협찬 : KB금융지주

<글·박태균 서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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