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항쟁의 역사적·사회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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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민족민주주의와 시민주의의 궐기

5월이다. 「Weekly 경향」의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는 이제 광주로 간다. 30년 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뜨거운 상처다. ‘광주’라는 이름 앞에 사람들은 울거나 분노했다. 그 분노와 슬픔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견인해 한국 사회 민주화의 기름진 밑거름이 됐다. 김호기·박태균 교수가 4회 동안 ‘5·18’의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돌아보는 글을 기고한다. 김호기 교수가 5.18국립묘지를 방문한 소감을 정리했다. <편집자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지난 2005년 한국방송공사(KBS)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한국지성사>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 타이틀을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제3부는 나의 대학시절로 시작된다. 그때 대학 동기인 기형도의 시 ‘대학시절’을 인용했다.

기형도의 ‘대학시절’

“돌층계 위에서 /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1979년 대학에 입학해 전두환 정권 아래서 학부와 대학원을 다닌 내게 이 시만큼 그때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작품은 없다. 대학에 들어와 나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됐다. 막스 베버와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배우고, 미셸 푸코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읽었다. 어린 나이에 공감하는 것도 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학문의 세계는 놀라운 것이어서 언제나 새로운 인식의 경이로움을 안겨줬다.

그러나 당시 내가 공부보다도 더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책 밖의 너무도 황량하고 뜨거운 현실이었다. 황량했던 것은 질식당한 민주주의였으며, 뜨거웠던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됐다는 데 있었다. 교정에 넘치는 사복 군인과 경찰들, 그 속에서 우리는 텍스트가 아닌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깨우치게 됐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우리는 교정에서 시위를 벌이곤 했다. 시위라고 해서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이나 학생회관, 아니면 대강당 건물에서 선배나 친구 또는 후배가 유인물을 뿌리면서 구호를 외치면 그를 따라 함께 구호를 외치다가 이내 교정에 들어와 있는 사복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해산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5월은 광주 항쟁 및 민주주의와 동의어였다.

시민사회 연구자로서 내가 보기에 1980년 5월 광주 항쟁은 4월 혁명과 함께 민주화 시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양대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4월 혁명을 이끈 것은 자유민주주의였다. 4월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표출되기는 했지만 4월 혁명을 관통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었다.

‘더 많은 민주주의’의 정신적 출발점
4월 혁명과 비교해 광주 항쟁은 더욱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 군부 권위주의에 맞서는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주의에 맞서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맞서는 시민주의가 긴밀히 결합돼 일대 사회운동으로 분출한 것이 바로 광주 항쟁의 본질이었다. 광주 항쟁에는 1960년대와 1970년대라는 산업화 시대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담겨 있다.

김호기 교수와 박태균 교수가 5.18민주묘지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무덤을 숙연한 모습으로 둘러보고 있다.

김호기 교수와 박태균 교수가 5.18민주묘지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무덤을 숙연한 모습으로 둘러보고 있다.

계엄령 철폐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금남로에 진출해 시위를 벌인 5월 18일(일요일)부터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폭력적으로 시민들을 진압한 5월 27일(화요일)까지의 격렬한 항쟁의 경험은 광복 이후 우리 사회가 체험한 가장 극적인 사회운동의 하나였다. 항쟁에 담긴 정신인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197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을 집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민족민주운동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와 더불어 국가의 폭력에 맞서서 시민의 평화가 성취된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항쟁 당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로 해 본다.

“무장한 시민군의 포위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계엄군이 오후 5시 30분경 도청을 버리고 달아남으로써 광주 시민들은 1차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그로부터 27일까지의 ‘해방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도덕성과 투쟁성을 보여 주었다. 기존의 통치기구가 모조리 와해되어 버린 상태에서 범죄율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낮았고, 시민군에 의한 폭력사고도 없었으며, 은행이나 보석상 어느 한 곳도 습격당하는 일이 없었다. 시민군은 더욱 조직적으로 편성되어 시내의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였으며 날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도청 앞에 모여 계엄령 해제, 학살책임자 처벌,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유기홍, ‘1980년대의 민족민주운동’, <한국사 20>, 한길사, 1994, 69쪽)

무릇 민주주의를 위한 어떤 사회운동이라 하더라도 그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자율, 자치, 연대에 있다. 광주 항쟁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으나 자율 속에서 자치를 모색하고 연대를 쌓아간 대단히 이례적인 체험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국가중심주의에 맞서는 시민중심주의이며, 앞의 진술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광주 항쟁이 우리 사회에 미친 중요한 영향은 두 가지다. 첫 번째 광주 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군부 권위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원형을 이뤘다. 광주 항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전두환 정권은 형식적으로 억압적 국가기구에 기반한 ‘강한 국가’였는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정당성을 결여한 ‘약한 국가’였다.

학생운동을 포함한 일련의 사회운동들은 군부 권위주의에 맞서서 민주화를 요구했으며, 이러한 사회운동들은 결국 전두환 정권을 퇴출시키는 1987년의 6월 민주화 운동을 가져 왔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화 시대는 이렇게 열렸으며, 그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용기 있는 항쟁이었다.

두 번째 민주화 시대가 열렸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곧바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게 되며, 광주 항쟁에 담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이런 ‘더 많은 민주주의’의 정신적 출발점으로 자리매김돼 왔다.

민족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광주 항쟁에 담긴 민족주의에 대한 요구는 결코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정당한 자결권을 요청하는 비서구 사회의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 민족주의는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는 ‘열린 민족주의’이며, 바로 이 점에서 광주 항쟁에 담긴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른바 ‘기억의 정치’로서의 광주 항쟁의 경험이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이들은 물론 광주에 있지 않았던 경우라 하더라도 항쟁의 간접적 체험을 공유한 이들에게 광주 항쟁은 결코 퇴색하지 않는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기억을 끝없이 환기시키며 그 의미를 일깨워 왔다.

이런 맥락에서 광주 항쟁은 역사적 의미를 넘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광주 항쟁을 상징하는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에 따르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라고 한다. ‘새 날’이란 무엇인가. 혹자들은 ‘새 날’에 이념적 덧칠을 하려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 민족의 자결권이 보장되는 세계시민 사회가 아니겠는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지난 4월 29일 이른 새벽에 박태균 교수와 함께 광주로 떠났다. 천안을 지나고 논산을 지나고 전주를 거쳐 우리는 광주로 내려갔다. 우리가 이동할 때 운전을 도맡은 사진 기자(김석구 국장)에게는 언제나 미안했지만 봄이 완연한 산야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차 안에서 우리는 천안함 사건과 지방선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남도 음식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1980년 5월 전남도청 앞에서 희생자 유족들이 관을 앞에 두고 오열하고 있다. |경향신문

1980년 5월 전남도청 앞에서 희생자 유족들이 관을 앞에 두고 오열하고 있다. |경향신문

고속도로를 벗어나 광주로 들어서자 우리는 망월동 국립묘지를 먼저 들른 다음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으로 가기로 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어서 국립묘지 입구에 도착해 차를 세워 두고 묘역 쪽으로 걸어갔다. 분향을 하고 박태균 교수와 묘역 이곳저곳을 둘러 봤다. 이곳을 찾아올 때는 언제나 그랬듯 마음이 처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항쟁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고, 1980년대 초반 대학 시절이 떠오르고, 영화 <화려한 휴가>가 떠오르고, 김남주의 시와 임철우의 소설도 떠올랐다. 박태균 교수도, 김석구 국장도 별 말이 없었다. 그저 눈빛으로 서로의 심사를 헤아릴 뿐이었다.

금남로로 가기 위해 묘역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임을 위한 행진곡’이 국립묘지에 울려 퍼졌다. 박태균 교수가 말하기를 단체 참배객이 올 경우에는 관리실에서 이 노래를 틀어 준다고 한다. 그동안 몇 번 이곳을 찾았지만 혼자 또는 지인들과 온 경우가 전부여서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더러 듣던 노래인데도 순간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널리 알려졌듯이 이 노래는 광주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곡이다. 민중운동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가운데 일부를 가사로 해 광주 지역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이 작곡한 노래다. 이 곡은 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과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다룬 노래굿 ‘넋풀이’에서 이들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발표된 것이라고 한다.

단체로 방문한 이들이 분향을 마치자 노래는 끝나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노래는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이 노래를 부르던 20대 초반의 나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공부하는 내게 광주 항쟁은, 민주화 운동은, 한국 사회는 무엇인가를 새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다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초등학생들이 참배를 왔다. 무엇이 즐거운지 아이들은 재잘거리면서 묘역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고적한 국립묘지에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어린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 김석구 국장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따라갔다. 박태균 교수와 나는 좀처럼 자리를 떠나기 어려웠다.

<글·김호기 교수 연세대 교수·사회학,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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