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진입 총소리 잊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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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5·18 당시 ‘거리 언론’ 만든 김태종씨의 회고

1980년 5월 공수부대와 계엄군이 광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학살극을 벌이던 당시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된 섬이었다. 막힌 건 길목만이 아니었다. 언로도 차단됐다. 주요 신문과 방송은 무자비한 국가 폭력의 현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보도하는 경우라도 사실은 묻히고 맥락은 비틀렸다.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 자리는 ‘유인물’로 채워졌다. 당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각종 유인물을 발간해 광주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언론이 사라진 자리에서 언론 구실을 한 셈이다. 당시 광주 YWCA 건물을 근거지로 유인물 제작과 배포에 참여한 김태종씨(51·당시 전남대 국문과 4학년)를 4월 29일 오후 광주에서 만났다. 김씨는 현재 ‘5.18 30주년 기념 뮤지컬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으로 있으면서 5월 15일 막을 올리는 뮤지컬 <화려한 휴가>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5월 18일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열흘간의 항쟁이 시작됐다. 전날 밤인 17일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한 세대가 지났다. 시민들은 화해를 원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

“한 세대가 지났다. 시민들은 화해를 원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

“당시 전남대생인 나는 ‘광대’라는 이름의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거의 날마다 YWCA 회관에서 <한씨연대기> 공연 연습을 했다. 17일 저녁에는 광대 멤버인 김선출·이윤기, 군대에서 휴가 나온 박석면 등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YWCA에서 있었던 함석헌 선생 강연회 뒤풀이였다. 그날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광천동까지 걸어서 박선면의 형인 박석무씨(현 한국고전번역원장) 집으로 갔다. 자려고 하는데 형님이 운동하던 선배들이 다 잡혀 갔는데 지금 잠이 오냐고 호통을 쳤다. 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광주 지역 재야인사와 학생운동 간부들이 예비 검속에 걸려 다 잡혀 갔다는 얘기였다. 이튿날인 18일에는 오전 10시쯤 YWCA 회관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함성과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 전남대에 있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교 앞에서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유인물 배포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
“사방에서 난리가 난 상황이어서 도저히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김선출, 김윤기와 함께 일단 전남대에 가 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들불야학 강학(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대학생들 사이에서 야학 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학생들은 스스로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으로 ‘교사’라는 말 대신 ‘강학’이란 표현을 썼다) 출신인 전용호를 만났다. 우린 결국 쿠데타가 난 것으로 보고 지금 상황을 광주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사기를 구해 김선출의 친구 이현철이 살고 있는 무등육아원으로 갔다. 공용터미널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공수부대가 젊은 남자들을 무작정 잡아다 패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흩어졌다가 밤에 무등육아원에서 다시 모였다. 몇 명이 밖에 나가서 상황 정보를 취합해 오면 안에서 문안을 작성하고 찍어서 밖에 나가 배포하는 식이었다. 유인물은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이름으로 발행했다. 보통 하루에 2000장쯤 찍었다. 유인물은 광대 팀 이외에 들불야학 팀에서도 발행했다. 두 팀은 서로 따로 유인물을 찍다가 나중에는 ‘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통일했다. 25일 도청에 항쟁지도부가 구성되면서부터는 YWCA로 자리를 옮겨 항쟁지도부의 홍보부 역할을 했다. 이때는 수동윤전기를 사용해 인쇄 부수가 수만부로 늘어났다. 명칭도 ‘민주시민회보’로 바꿨다.”

5월 21일 계엄군이 물러난 뒤 22일부터 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궐기대회는 어떻게 시작됐나.
“22일 궐기대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쏟아냈다. 23일부터는 범시민궐기대회라는 이름으로 청년 운동권이 궐기대회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22일 오후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하고 온 수습대책위원회가 협상보고대회를 열었다. 요지는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과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윤상원 형을 비롯해 나중에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광주 지역 청년 운동권 멤버들은 그것이 일종의 투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 이전까지 광주 시민들의 싸움은 무엇이 되는가. 수습대책위에 맞서 전열을 정비하려면 시민들의 뜻을 모아 지지를 받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범시민궐기대회를 조직한 것이다. 나는 23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범시민궐기대회 당시 사회를 봤다.”

당시 시민군은 무력에서 계엄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항전을 결의한 이유는 무엇인가.
“청년들은 일주일만 버티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국제적인 여론이 신군부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데다 우리의 싸움이 다른 지역으로 알려지면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신군부가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봤다. 개인적으로는 26일 가두행진을 마치고 패배의 기운을 강하게 느꼈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나면 수천명이 가두행진을 했는데 26일에는 참여 시민 수가 수백명으로 줄었다.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고립감이었다. ‘전국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이란 제목의 유인물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번 광주의거를 몇십년 뒤의 사건비화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로 만들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실 그대로 보도하여 주시기를 600여 사망자들의 피맺힌 원혼과 80만 광주시민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촉구하는 바입니다’라고 썼다.”

계엄군의 폭력 앞에서 광주 시민들이 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라고 보나.
“광주에는 농촌 지역의 정서적 유대가 남아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있었다. 시민들은 젊은 사람들이 맞고 찔리고 잡혀가는 걸 자기 가족의 일처럼 느꼈다. 한편으로 계엄군의 폭력이 워낙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금남로 지하도 공사를 하고 있던 인부들이 각목을 들고 계엄군과 싸웠다. 군이 너무 잔인하니까 그랬던 것이다.”

마지막 날 기억은.
“나는 YWCA 건물에서 먹고 자면서 도청과 YWCA를 오갔다. 26일 밤에는 궐기대회를 진행하면서 쌓인 피로 때문에 정신없이 잠들었다.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도청에 들어갔다면서 사람들이 날 깨웠다. YWCA 뒷담을 넘어 피했다. 도망가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하면서 M16 소총을 자동발사하는 소리였다. 광주 사람들은 그날 그 총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30년이 지났다. 광주항쟁의 상흔은 이제 다 치유된 것일까.
“한 세대가 지났다. 시민들은 화해를 원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 나는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내부의 해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원하는 건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신군부 세력의 진심 어린 사과다. ‘우리 때문에 군인도 죽고 시민들도 죽었다.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다. 인간성을 파괴한 데 대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안 그러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글·사진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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