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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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비상을 꿈꾸는 ‘새’의 처절한 몸부림

<Weekly 경향>은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짚어보는 2010년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를 연재한다. 1980년, 한국 사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오랜 ‘겨울’에서 깨어나 마침내 ‘서울의 봄’을 맞았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은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배신을 당했다. 1980년 5월 15일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운집해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불과 이틀 뒤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뒤이은 광주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서울의 봄’을 산산조각낸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서울의 봄을 통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궤적을 반추했다. <편집자주>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든 시청 앞 거리.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든 시청 앞 거리.

1979년 3월,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서울 북부 지역과 도심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서대문과 이화여대를 지나 처음으로 서울 서부 지역에 입성했다. 내 나이 열 아홉이었다. 이후 나는 유학과 연구년을 제외하곤 신촌 지역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걸은 길은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학교 정문, 다시 백양로를 따라 올라가 캠퍼스 저 안쪽에 있는 문과대학과 사회과학대학 건물로 가는 길일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학교 캠퍼스를 가로지로는 백양로는 내 삶의 한가운데 놓인 길이다.

백양로에서 만난 이들
1979년 대학 1학년 이후 백양로에서 만난 선배, 친구, 후배들은 여전히 내게 가장 가까운 이들이다. 백양로에서 나는 조희연(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신기욱(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유창선(시사평론가), 하승창(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그리고 적지 않은 제자들을 만났다.

도서관과 백양로, 그리고 캠퍼스 저 안쪽에 위치한 연구실은 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학교생활에서 일종의 트라이앵글이었다. 이 삼각형 안에서 나는 조희연 선배로부터 종속이론을 배웠고, 후배 하승창과는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으며, 제자들과는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했다.

백양로가 내 삶에 특히 깊게 각인된 것은 1980년대 초반 학부 시절이었다.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주도하던 선배와 친구와 후배를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고, 잡혀가는 이들을 보며 분노는 끓어올랐지만 역시 어쩌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던 아픔을 갖게 한 곳도 다름 아닌 백양로였다.

1980년 서울의 봄, 그때 나는 사회학과 2학년이었다. 3월에 개강은 했지만 강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와 1970년대 성장한 시민사회는 매우 불안정한 타협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1960년 4월 혁명에 이어 또다시 열린 정치적 개방의 공간에서 국가와 시민사회는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대치 국면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실제 학업이 이뤄진 곳은 강의실 안이 아니라 학과별로 자율적으로 세미나가 진행되던 중앙도서관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선배 홍훈(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등은 후배들에게 우리 현대사와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또 우리와 토론했다.

학내에서 신군부를 비판하고 완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우리는 5월이 되어 교문 밖으로 나가 도심에 진출했다.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10만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 서울역 시위는 정치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와 시민사회의 최전선에 선 학생운동 간 정치적 긴장의 절정이었다.

바로 그날 우리는 논란 끝에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틀 뒤인 17일에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신군부의 권위주의는 한층 강화됐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출발을 이룬 광주 민주화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1961년 체제와 민주화운동
돌아보면 산업화 시대가 격렬히 진행되던 와중에 민주화의 요구가 일거에 분출했던 것은 바로 ‘서울의 봄’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1970년대 유신체제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운동이 밑거름으로 돼 왔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이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3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서울의 봄으로부터 광주 항쟁, 그리고 그 연속으로서의 6월 항쟁에 이르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사회학적 과제다.

김호기 교수는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반추했다.

김호기 교수는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반추했다.

어떤 사회운동이라 하더라도 그 운동이 놓인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의 차원을 세 가지로 나눴다. 사건사, 사회사, 구조사다. 이 가운데 그는 사회사를 ‘콩종크튀르(국면)의 역사’라 이름짓고 특정한 국면에서의 사회변동을 추적한다. 콩종크튀르가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라 하더라도 국면에 따라서 의미와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 있다.

콩종크튀르의 역사에서 볼 때 1960년 4월 혁명 이후 우리 사회의 전환을 가져온 두 개의 체제는 ‘1961년 체제’와 ‘1997년 체제’다. ‘1961년 체제’를 통해 우리 사회는 산업화 국면으로 나아갔으며, ‘1997년 체제’를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으로 들어섰다.

1961년 체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1961년 체제가 남긴 교훈은 산업화와 민주화는 함께 가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을 국가 목표로 특권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유신과 전두환 시대의 ‘민주주의 없는 산업화’가 1987년 6월 항쟁을 배태했다는 것은 이를 직접적으로 증거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성취는 ‘정상 국가’로의 전환이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에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약진에서 우리 사회는 정상국가로의 대행진을 목격해 왔다. 이런 민주화 과정에 대해 물론 아쉬움이 결코 작지 않다. 양극화 해소, 인권, 양성 평등, 사회적 약자 보호 같은 사회·경제 민주화의 과제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회 갈등의 분출 역시 민주화 시대가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1961년 체제 아래 억눌려 온 사회 갈등은 간단없이 폭발해 왔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 대 노동, 중앙 대 지방, 환경 대 개발, 남성 대 여성, 기성세대 대 신세대 등 다양한 균열이 혼란스럽게 공존해 왔다.

문제는 이런 민주화 시대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등장한 1997년 체제에 의해 새로운 전환의 시험대 위에 올라섰다는 점이다. 전환을 요구하는 첫 번째 동인은 세계화의 충격이다. 세계화는 무한경쟁을 강제함으로써 경쟁에 합류한 집단과 탈락한 집단 간의 양극화를 증가시켜 왔다.

두 번째 동인은 사회 불평등의 심화다. 지난 23년 동안의 민주화 과정에서 작지 않은 성취가 있었음에도 소득 분배는 오히려 악화돼 왔다. 민주주의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평등에 있다면 이는 민주화 시대가 가져온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환을 요구하는 세 번째 동인은 동북아 질서의 변동이다.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동북아의 냉전적 질서는 균열을 보여 왔으며, 이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선택을 요구해 왔다. 그동안 남북한 평화 공존이 꾸준히 모색돼 왔음에도 최근 탈(脫)냉전적 동북아 질서는 적잖이 불안정하고 불투명하다.

콩종크튀르의 교체 시기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집합 의지는 극대화될 수 있다. 역사의 전진과 후퇴는 그 교체 시기에 어떤 집합 의지가 발휘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산업화 시대 또는 1961년 체제의 국면을 통해 우리는 두 번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다. 서울의 봄이 첫 번째 기회였다면 6월 항쟁이 두 번째 기회였다.

1980년 5월 15일 학생들이 서울역광장에서 남대문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1980년 5월 15일 학생들이 서울역광장에서 남대문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주목할 것은 특정한 국면에선 중간계급이 보이는 정치적 지지의 향방이 그 국면의 교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1980년 봄, 지배 집단과 저항 집단 간의 대립 구도에서 우리 사회 중간계급은 저항 집단의 민주화 요구에 적극적이라기보다 유보적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중간계급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의 물질적 생활 수준 향상은 이러한 평가의 지반이 됐다.

그러나 이런 우호적 평가의 이면에는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이 침식되는 과정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군부 귄위주의 통치에 대한 저항은 1979년 가을 부마 항쟁으로 나타났으며, 서울의 봄은 이 부마 항쟁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비록 서울의 봄이 저항 집단을 정치적으로 결집시키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신군부 세력의 억압적 통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일대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5월 18일 광주 항쟁으로 나타났다.

‘새’, 자유와 민주를 향한 열망

“저 청청한 하늘 /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 왜 날 울리나 / 날으는 새여 / 묶인 이 가슴 (…)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 가는 / 넋 속의 저 짧은 / 여위어 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 떠나가는 새.”

김지하의 시 ‘새’다. 1980년대 초반에 백양로에서, 학교 앞 주점에서, MT를 가서 더러 부르던 노래였다. 며칠 전에 이번 학기 학부 강의를 듣는 신문방송학과 석진철군이 수업 사이버 게시판에 4월 혁명에 대한 글을 남겨 그에게 선배 세대들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알려 주고 싶어 ‘새’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이튿날 보니 석군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 가는 넋’이라는 구절이 유난히 와 닿아 슬픕니다. 그렇지만 지금 느낀 이 슬픔이 ‘낮이 밝을수록 또렷해지는 넋’이 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 봅니다. 더 이상 우리 곁을 ‘떠나가는 새’가 없었으면, 또 그를 바라보며 서럽게 울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새는 바로 자유와 민주, 그것을 갈망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 4월 혁명에서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서울의 봄으로, 다시 광주 항쟁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결코 짧지 않은 역사는 바로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는 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결국 풍화되고 말 것이지만 자유와 민주를 열망하는 그 정신은 개체의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세대적 전승을 이룰 것이며, 바로 그것이 역사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연구실 창밖을 내다보니 벚꽃이 바람에 날려 춤추고 있다.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캠퍼스가 제법 고적하다.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석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벚꽃이 다 지기 전에, 이 4월이 다 가기 전에 백양로에서 그를 만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토론을 나누고 싶어졌다.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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