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1980년 ‘서울의 봄’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새 시대’ 열망 신군부가 짓밟다

<Weekly 경향>은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짚어보는 2010년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를 연재한다. 1980년, 한국 사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오랜 ‘겨울’에서 깨어나 마침내 ‘서울의 봄’을 맞았다. 시민들의 가슴은 손에 잡힐 듯 보였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그 열망은 신군부에 의해 또 한 번 배신 당했다. 1980년 5월 15일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운집해 계엄 철폐를 요구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뒤이은 광주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서울의 봄’을 산산조각냈다. 박태균 교수가 서울역 광장을 찾아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1980년 봄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봤다. <편집자주>

1980년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계엄 철폐를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곧 산산조각난다. 옛 서울역 건물은 지금 공사 중이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계엄 철폐를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곧 산산조각난다. 옛 서울역 건물은 지금 공사 중이다.

4·19 혁명, 벌써 반세기가 됐다. 4·19는 우리에게 역사가 아닌 것 같았는데 이제 역사가 되어 가고 있다. 그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를 나와 혜화동의 이화장으로 가는 날 아침에 시인 김수영은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고 하면서 혁명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 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 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그리고 그는 다시 말했다. 민주주의는 이제 상식이 됐다고, 자유는 이제 상식이 됐다고. 그리고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고, 아무도 잡아갈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됐다고 외쳤다. 그리고 혁명이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그는 ‘가다오 나가다오’를 통해 미국과 소련에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도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라고 마음껏 외쳤다.

배신 당한 서울의 봄 1980년
그런 그의 마음은 곧 허무해졌다. 혁명이 이제 6개월밖에 안 됐지만 시인 김수영은 방을 바꿨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지만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김수영은 혁명의 진행 과정에 대해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었지만 그래도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그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했다.(‘그 방을 생각하며’ 중에서)

그러나 그 잃어버림과 풍성함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에게 아픔을 주었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팠고,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그의 몸이 아팠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먼 곳에서부터’ 중에서)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아픈 몸이’ 중에서)이고 스스로를 다잡아 보기도 했지만.

그리고 20년이 지난 뒤 대한민국의 한 지식인 리영희는 자신의 삶과 사상을 되돌아본 <대화>에서 1980년을 회상하면서 시인 김수영이 겪은 4·19 혁명을 다시 떠올렸다.

“이것은 이승만정권 몰락 후의 정세와 닮은꼴이었지요. 1960년 그때에는 한국 국민이 4.19 학생혁명을 절정으로 장기간의 국민적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일단 반독재 정권을 추구하고 친미 일변도의 이승만 정권을 거부하는 일치단결한 한국 국민의 역량을 처음부터 거역할 수 없었어.”

리영희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에게 1980년 봄은 또 다른 4·19 혁명이었다. ‘4년만에 형무소에서 나와 서게 된 강단’에서 학생들을 다시 만나게 됐고, 학생들은 군인과 경찰의 모습이 사라진 캠퍼스에서 최루탄이 없는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고통에서 해방된 듯한 부푼 기대와 기분이 캠퍼스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바로 1980년의 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19년 동안의 폭력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온통 ’새 시대‘의 정치행동에 정열을 태웠지만” “영원불멸할 것만 같았던 박정권의 체제가 한순간에 끝나”면서 “다음에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지식인들이 망설이고, 암중모색을 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리영희는 이 시기를 ‘배신당한 서울의 봄 1980년’이라고 표현했다. 시인 김수영의 아픔이 봄에서부터 아팠던 것처럼 지식인 리영희는 봄으로부터 배신 당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 앞에 모인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경향신문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 앞에 모인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경향신문

도대체 그 놈의 ‘봄’이 뭐기에 봄을 이렇게 못 살게 구는가? 왜 사람들은 그 봄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는가? 5·16 쿠데타를 주도했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봄으로부터 배신 당했다고 외치도록 만든 주역의 하나인 김종필씨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가 않다는 뜻이다. 

2004년 봄 국회에서의 탄핵으로 대통령 직무 정지 상태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써서 유명해진 이 말은 원래 중국 고대 4대 미인의 하나인 왕소군이 흉노족에게 시집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었다. 마치 올해 봄의 늦추위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한 이 말은 김씨가 1980년 서울의 봄에 사용해 대중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1980년의 봄도 올해처럼 그렇게 추웠는가?

준비되지 않은 봄, 절망의 피 물들어
지식인 리영희의 <대화>는 두 가지 점에서 1980년 봄의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누구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유신의 엄혹한 시절에도 많은 사람이 어둠을 뚫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막걸리 보안법이 있어도, 긴급조치가 있어도, 심지어 모여서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죄없는 지식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도 사람들은 밤을 뚫고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했다. 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봄과 새벽을 맞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4·19 혁명의 시기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인들은 통일을 위해 40년 동안 조금씩, 그러나 중단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막상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왔다. 어느 날 갑자기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마치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준비되지 않은 봄은 또다시 사람들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 주었다. 4·19 혁명 이후의 절망이 마음속의 절망에 그쳤다면 1980년 서울의 봄에 맞은 절망은 피를 동반했다. 광주에서 너무도 많은 사람이 쓰러진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로 인해 채 피지도 못한 봄꽃들이 떨어지듯이.

다른 하나는 미국이다. 1960년 봄, 그리고 1980년 봄에 많은 한국 사람이 미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국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미국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지식인 리영희는 1960년 4월 학생과 시민들의 손을 들어 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거부하는 일치단결한 한국 국민의 역량을 처음부터 거역할 수 없었”다고 했다. 1980년 서울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나긴 겨울을 뚫고 시작된 봄을 아무리 세계 최강 미국이라고 한들 자기들 마음대로 다시 ‘겨울’로 돌리기는 쉽지 않으리라.

30년이 지난 오늘, ‘봄’은 왔는가
그러나 미국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미국은 4·19 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마침표를 찍은 5·16 쿠데타 세력과 서울의 봄을 봄 같지 않도록 만든 신군부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번영의 상징이건만 봄을 맞이한 한국인들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미국이 봄을 봄 같지 않도록 만든 신군부에 저항한 광주 사람들을 또다시 배신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이 땅에서 금기시된 반미운동이 시작됐다.

박태균 교수가 옛 서울역사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박태균 교수가 옛 서울역사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그런데 혹시 미국이 한국인들의 열망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미국의 바람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을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한국인들이 자신있게 민주주의를 밀고 나간 것이 아니라 서로 분열되고 준비되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신군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너무 미국을 두둔한 건가? 조금 말을 바꾸어 볼까? 미국의 태도만 비난하기에는 한국인들이, 아니 한국의 정치인들이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30년이 지난 오늘 서울역 앞에 섰다. 서울역은 단지 기차역의 하나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성공의 희망을 품고 도착하는 곳이었고 희망을 찾아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1980년 봄에 수많은 학생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서울역에 모였다. 최루탄 연기에 휩싸여 있던 바로 그곳이다. 그날 학생들의 함성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곳에는 또 서울역과 함께 옛 대우빌딩이 서 있었다. 1977년 완공된 이후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면서 서울역 앞의 랜드마크가 된 그 빌딩이다.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 <외딴 방>에서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빌딩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엄마와 외사촌과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고 했다. 서울역이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이었다면 옛 대우빌딩은 그 위용만큼이나 군부독재 시대의 정경유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다.

4·19 혁명이 단순히 정치적 민주화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부조리를 뿌리째 뽑길 원했던 것처럼 서울의 봄이 보여 준 민주화의 열망은 경제개발의 시대를 통해 형성된 정경유착과 재벌의 비리를 청산하길 원했건만 춘래불사춘은 모든 열망을 앗아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 서울역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오늘 다시 춘래불사춘을 말한다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 같아 불안하다.

<글·박태균 서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관련기사

2010 연중기획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