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지면 군인에게 검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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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보도지침’ 폭로한 김주언 언론광장 감사에 ‘1980년 언론’을 듣다

봄은 짧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더 그랬다. 박정희 정권의 갑작스런 종말로 찾아온 짧았던 서울의 봄은 그해 5월 광주 시민들의 저항이 군홧발에 짓밟히면서 순식간에 소멸했다.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끝장내는 데 언론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유리한 보도는 내보내고 불리한 보도는 막았다. 신군부는 언론을 어떻게 이용하고 억압했을까. 4월 15일 오후 <한국의 언론통제>(리북·2008)를 통해 권력의 언론통제 실상을 재구성한 김주언 언론광장 감사(56)를 만났다. 그는 1980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일했고, 1986년 9월 <말> 특집호를 통해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신군부는 기자들을 새마을연수원에 데려가 안보교육을 시켰다. 기자들에게 군복 비슷한 제복을 입히고 열흘 동안 합숙하게 하면서 군대식으로 안보관을 주입했다”

“신군부는 기자들을 새마을연수원에 데려가 안보교육을 시켰다. 기자들에게 군복 비슷한 제복을 입히고 열흘 동안 합숙하게 하면서 군대식으로 안보관을 주입했다”

당시 언론 상황은 어땠나
“서울시청에 검열단이 상주했다. 대부분 군인들이 검열했다. 당시 신문은 활판인쇄 방식이었는데, ‘시쇄판’이라고 부르는 초판 대장이 나오면 그 대장을 갖고 검열단이 직접 검열을 했다. 보도검열단 장교들이 기사를 읽어 보고 하나하나 다 체크했다. 그날 내려온 검열지침은 검열단 사무실 흑판에 적혀 있었다. 초기에는 검열로 삭제된 부분을 광고로 대체하거나 그냥 비워둔 채 신문을 발행했다. 그러다가 독자들이 검열당한 부분을 통해 역으로 원래 기사를 유추하는 일이 생기니까 나중에는 아예 그것조차 못하게 막았다. 당시 학생들이 거의 날마다 시위를 했는데, 학생 시위를 정당화하는 기사는 모두 ‘불가’였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주변 청소를 했다거나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는 등의 내용은 모조리 불허했다.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이후 기자들을 새마을연수원에 데려가 안보교육을 시켰다. 기자들에게 군복 비슷한 제복을 입히고 열흘 동안 합숙하게 하면서 군대식으로 안보관을 주입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권을 완전히 잡고 난 이후에는 치안본부·문공부·보안사·중앙정보부를 비롯한 7개 기관 기관원들이 수시로 언론사를 드나들었다. 이들은 언론사 편집국장이나 데스크 책상 옆에 앉아 그날 기사 내용을 일일이 캐묻고 자신들의 상급자들에게 보고했다.”

1980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신참 기자의 눈으로 본 서울의 봄은 어땠나.
“4월에 입사했다. 소위 ‘서울의 봄’을 맞던 때다. 당시만 하더라도 선배들은 수습기자들에게 ‘이런 좋은 시절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건 행운이다’라는 얘길 했다. 그 ‘서울의 봄’이 실제로는 가짜였다는 걸 12·12 쿠데타 이후에도 사람들은 잘 몰랐던 거다. 당시 수습기자들은 대장을 들고 서울시청 검열단에게 검열을 받으러 다녔다. 검열단 앞에서 검열을 받는 기분이 참 묘했다. 검열 당한 내용을 보면 정말 별 거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선배 기자들이 한강 다리에서 군용차가 몇 대가 지나가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만큼 군의 동향에 대해 민감해 있던 시절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언론은 어땠나.
“각 신문사에서 5·18 직전에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들을 호남이나 광주 출신으로 뽑아서 내려보냈다. 그러나 현장에는 갔지만 보도는 거의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계엄사에서 발표한 것만 쓸 수 있었다. 사실 현장에서도 거의 취재를 못했다. 어차피 보도하지도 못할 기자들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광주 시민들의 생각이었다. 보도가 사실과 다르게 나가니 누가 말을 하고 싶겠나. 그래서 광주 시민들은 주로 외신기자들의 취재에만 응했다.”

보도검열에 대한 기자들의 대응은 어떠했나.
“기자들은 검열철폐 주장과 제작 거부로 맞섰다. 한국기자협회가 중심이 됐다. 기자협회는 서울의 봄을 맞기 이전까지는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80년 3월 31일 김태홍 당시 합동통신 기자가 20대 기자협회장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에는 기협 간부들이 모두 수배되거나 체포됐다. 검열 거부를 주도하거나 제작 거부 농성에서 강경한 모습을 보인 이들은 이후 언론인 강제해직 때 우선순위로 쫓겨났다.”

신군부의 언론통제 음모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게 K공작이다.
“K공작, 즉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킹 메이커’ 공작의 실체가 밝혀진 건 1988년이다. 그 이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80년 1~2월 신군부는 보안사 아래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언론반을 가동했다. 여기서 만든 K공작 문건은 극비리에 작성된 것으로, 이 문건을 보면 언론사 평기자부터 사장까지 모두를 회유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8개 항의 주요 내용과 두 가지 첨부 자료로 되어 있고, 소요 비용까지 명시돼 있다. 신군부는 K공작의 연속선상에서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들과 면담을 추진하고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분석했다.”

신군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과 언론의 인식 사이에 차이가 있었나.
“당시 학생시위가 거의 날마다 벌어졌고, 사북 사태처럼 억눌려 있던 노동운동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신군부는 민주화세력을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세력으로 여겼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비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군부는 이를 이용해 민주화운동이 안보를 위협하고 사회 혼란을 조장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여론은 혼란이 안정되길 바라는 마음과 이번 기회에 완전한 민주화를 이뤄야 한다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언론사에서도 우선적인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안정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그룹이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개 간부들로, 이들은 나중에 신군부와 밀월관계를 형성했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의 언론통제 방식을 비교한다면.
“박정희 시대에는 초창기부터 보도지침이나 그런 게 있었던 게 아니다. 보도지침이 내려오거나 기관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기 시작한 것은 유신 이후다. 신군부 언론 통제의 특징은 박정희 시절의 언론 통제 수법을 한꺼번에 시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언론사를 모두 통폐합시켰다. 다른 하나는 이것을 법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도 군사기밀보호법 등으로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입법이 있었는데 신군부 들어서는 언론사의 등록을 문화공보부 장관이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언론기본법으로 언론사를 압박했다. 한편으로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엄청난 특혜를 베풀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비해 기자들의 급여가 두 배 이상 뛰었고, 언론인금고를 통한 저리 융자와 세금 감면 등 온갖 ‘당근’으로 기자들을 길들였다.”

신군부는 왜 언론을 통제하려 했나.
“언론을 손에 넣는 것이 여론을 조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당시만 하더라도 국민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건 신문과 방송밖에 없었다. 인터넷도 없었고, 구전에 의한 여론 확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당시 언론은 젊은 기자들이 그런 분위기에 저항했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 통제에 길들여진 간부들의 타성과 당시의 억압적인 분위기가 맞물리면서 스스로 굴복한 측면도 크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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