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회복 성과 체감할 수 있도록 역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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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경제 총괄 사령탑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

“머리를 써야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몸으로 때우는 자리더군요.”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이 취임 후 사석에서 농반진반으로 한 말이다. 이름대로 지식경제부(영문명 Ministry of Knowledge Economy)는 머리, 즉 지식과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곳이다. 홈페이지 대문에도 걸려 있듯이 ‘지식 혁신 기반의 산업 강국 실현’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 한 기업을 경영하기도 어려운데 나라의 산업을 강하게 키우려면 어지간히 머리를 써서는 잘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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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상 장관이 되고 보니 머리보다 몸, 다시 말하면 체력이 더 필요하다는 게 최 장관의 얘기였다. 실물경제를 총괄하는 부서인 만큼 챙겨야 할 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산하기관, 민간단체, 기업 등의 행사에 ‘불려’ 다니는 것만으로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우리나라 총 297개 공공기관 가운데 지경부 관할이 66개에 이른다. 민간단체와 기업은 셈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최 장관은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없는 조건에서 몸으로 때워 이룩한 우리 경제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임무를 맡고 있다. 말하자면 머리로 하는, 즉 지식 기반의 선진국형 경제로 산업 구조와 체질을 바꾸는 일이다. 산업자원부가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의 일부 기능을 통합해 지식경제부로 재출범한 취지가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최 장관이 말한 ‘머리’와 ‘몸’이라는 단어 속에는 이처럼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현실과 미래가 함축돼 있다.

장관은 머리와 몸이 다 좋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말하면 ‘운’도 따라야 한다. 요즘 최 장관은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발전소 건설 수주와 수출 호조 등으로 어깨가 활짝 펴졌다. 얼마 전 한 언론이 실시한 국회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 평가에서 15개 부처 장관 가운데 최고 점수를 받기도 했다. 최 장관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머리와 몸과 운이 함께 따른다면 이는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지 않을까. 3월 9일 서울 역삼동 한국기술센터에서 최 장관을 만났다.

취임한 지 6개월 정도 됐습니다. 공직을 떠났다가 10년만에 ‘친정’으로 돌아와 보니 어떻습니까.
“공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바로 그 부처는 아니지만 같은 경제 부처의 장관으로 복귀했으니 감회가 남다르죠. 10년 동안 공직사회가 바뀐 점도 있고 안 바뀐 점도 있는데, 대체적인 느낌은 과거에 비해 경제 부처 공무원들의 소명의식이 조금 약화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취임 일성으로 산업계를 총괄하는 정책 부서로 위상이 강화돼야 하겠다고 얘기했죠. 우리 경제가 10년 동안 침체 국면에 있었고, 또 경제 위기 국면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새로운 모멘텀을 찾아서 1인당 국민소득 3만, 4만 달러에 이르는 산업구조로 가려면 지경부가 정책부서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그런 정책들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거죠.”

그래서 이번에 인사도 파격적으로 했군요.
“보통 공직사회는 장관이 바뀌면 간부들이 일을 안 합니다. 인사가 어떻게 되는지 보는 거죠. 그래서 취임한 그날 간부회의를 통해 당분간 인사는 없다, 업무와 사람을 파악하고 나서 인사를 하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3, 4개월 지켜본 다음에 적재적소 인재 배치를 원칙으로 하여 일부 세대교체도 단행하면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인사를 했습니다.”

최 장관은 취임과 더불어 그린카 산업, 부품소재 원천기술, 소프트웨어 산업, 항공산업, 플랜트산업, 원전산업, 연구개발(R&D) 지원체계 등 우리 경제의 근원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여러 부문의 대책을 숨 가쁘게 내놨다. 우리 경제의 구조 고도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대책들이다. 지난 3월 8일 R&D 지원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지식경제 R&D 혁신전략’을 발표했고, 인터뷰 직전에는 ‘그린카 로드맵’ 수립을 위한 그린카전략포럼을 발족시켰다.

취임할 때부터 R&D 시스템의 문제점을 강도 높게 지적했습니다. 어제 그 방안을 내놓았더군요.
“예, 어제 발표했습니다. 우리 경제의 승패가 R&D에 달려 있음에도 그동안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투입하는 것보다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게 더 중요해요. 기본 원칙은 이겁니다. 지금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이나 미래의 기술과 관련된 시장 판도를 공무원 주도로는 따라갈 수 없어요. 늘 시장에서 경쟁하고 각고하는 민간이 주도하고, 공공부문은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 바꾼 게 어제 내놓은 R&D 혁신의 큰 정신입니다.”
지경부는 현재 원전 관련 R&D 사업과 온실가스 관리 업무를 놓고 다른 부처와 영역 다툼을 벌이고 있다. 원전 R&D는 교육과학기술부, 온실가스 관리는 환경부와 각각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다. 특히 온실가스 관리 문제를 놓고는 산업계와 환경단체 등에까지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온실가스 관리 업무를 놓고 부처 간에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처럼 비칩니다.
“온실가스 감축은 모든 부처의 전문성과 인프라, 정책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입니다. 이를테면 산업·에너지 부문은 지식경제부, 건물·교통은 국토해양부, 폐기물은 환경부, 농축산 부문은 농림수산식품부의 몫이지요. 온실가스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은 에너지·산업 부문으로, 95% 가량 되지 않습니까. 감축 수단이 없는 부처가 담당할 때 자칫 규제로 흐를 수 있는 거죠. 다만 산업계가 제기하고 있는 에너지·온실가스 목표 관리의 이중부담 문제에 대해서는 관계 부처와 협의해 해소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경제의 승패가 R&D에 달려 있는데 그동안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투입하는 것보다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게 더 중요해요.”

“우리 경제의 승패가 R&D에 달려 있는데 그동안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투입하는 것보다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게 더 중요해요.”

세계적으로 경제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우리 경제는 어떻습니까. 또 올해 가장 중요하게 추진할 정책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가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다는 데에는 세계적 평가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저력을 발휘해 오히려 역전의 발판이 마련됐다고 봅니다. 그런 성과를 발판으로 올해는 성장 활력을 높이면서 경제 회복 성과를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중소기업과 지역, 재래시장, 소상공인들은 아직 경제 회복의 온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그쪽에 온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최근 국회 상임위 소관 15개 부처 장관 업무평가에서 1등을 했더군요. 어떤 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좀 과분한 평가이고….(웃음) 늘 하는 얘기지만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지난해 말 UAE 원전 수주가 우선 그렇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 등 여러 가지가 작용한 것이지만 주무장관으로서 매우 보람 있는 일이죠. 또 지난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출이 굉장히 선전해 세계 9위를 했잖습니까. 세계 시장 점유율도 2%대에서 20년만에 처음으로 3%대에 진입하는 성과를 냈고요. 솔직히 말해 장관이 잘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지요. 원전 종사자라든가 수출 기업의 경영자는 물론 근로자의 각고의 노력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제가 주무장관이다 보니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웬 겸양의 말인가 하면서도 최 장관의 이력을 더듬어 봤다. 과연 운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최 장관은 연세대 경제학과 재학 중인 1978년 행정고시(22회)에 합격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 시절 미국에 연수갔다가 내친 김에 2년 휴직하고 위스콘신대에서 박사 학위(경제학)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는 한국경제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경북 경산·청도에 출마해 당선됐고, 18대에는 같은 지역구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재선됐다. 남들은 무수한 좌절과 굴곡을 겪은 끝에 오를 수 있는 여러 고지를 오로지 한달음으로 달려온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최 장관은 경제 부처에서 잘 나가던 공무원이었다. 경제기획원 시절 ‘아파트 채권입찰제’를 기획하고, 기획예산처 시절에 500억원 이상 소요되는 사업에 반드시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도록 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론계로 자리를 옮길 당시 국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모험을 했을까.

공직생활을 잘 하다가 갑자기 언론계로 자리를 옮긴 까닭은 뭐였습니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고 얘기하는 환란이 제 인생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환란 당시에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근무했습니다. 그전에도 나름대로 오로지 국가경제만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최선을 다했는데 함께 일한 사람들이 환란 주범으로 몰려서 사법적인 심판대에 섰어요. 물론 나중에 다 무죄를 받았지만 그런 환경에서 공무원을 계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굉장히 반시장적인 정책을 많이 내놨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그런 것들은 비판할 수 없으니 차라리 다른 쪽으로 생각한 거죠.”

굉장히 도전적인 선택을 한 거군요.
“다들 무모하다고 말했죠. 저 또한 벤처를 하는 기분이었고요. 그런데 언론계에 있은 4년은 굉장히 유익하고 많이 배운 시기였습니다. 일선 취재기자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언론인으로서 제 전문성을 발휘할 기회도 됐고, 방송 토론이나 각종 정부 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시각과 균형감각을 많이 배운 시기였어요.”
듣고 보니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도전이나 모험이 있기 때문에 행운이든 불운이든 그것과 맞닥뜨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연수 중에 박사 학위에 도전한 것부터가 그렇다. 휴직은 빠른 승진에는 핸디캡으로 작용하겠지만 훗날 경제 전문가로 활동할 바탕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론인으로의 변신과 적응을 가능케 했다. 언론계에 재직하면서 100회에 이르는 방송 출연을 한 것 역시 경제 전문가로서 브랜드 가치를 키우고 정치적으로 입신하는 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순탄한 것처럼 보이는 이력의 뒤편에는 이처럼 모험적인 선택들이 있다. 그런데 그 선택이 매번 옳았던 것은 운이 좋아서일까, 위험 관리를 잘해서일까. 최 장관은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경선 때 박근혜 전 대표 진영의 종합상황실장을 맡은 친박계 핵심 인사다. 그가 입각하자 정치권과 언론은 ‘친박계 몫’으로 보기도 했지만 계파색보다 전문성이나 능력 때문이라는 시각이 더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인정하는 일꾼’ ‘당·정·청이 공인하는 정책통’ ‘입심과 논리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경제 브레인’ 등 그가 장관에 내정됐을 때 나온 인물평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 정도면 앞에서 언급한 머리와 몸과 운이 마구 뒤섞인다. 더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로 가 보자. 최 장관은 “부친의 강요로 농사꾼이 될 뻔했다”고 회고한 적 있다.

부친이 자식에게 농사를 짓도록 강요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요.
“아, 그건 이렇게 된 겁니다. 저희 집은 3남 3녀예요. 내가 다섯 번째인데 두 형님이 월급쟁이 하려고 일찍이 시골을 떠났지요. 아버지는 아들 셋 중에 한 명은 고향을 지키기를 바랐던 거죠. 그래서 저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농사일에 투입했어요. 내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농사지어라’ ‘농사 괜찮다’ 하면서….”

농사가 꽤 많았던 모양이죠.
“과수원도 좀 있고, 중농 이상은 됐죠. 그때는 과수원이 아주 괜찮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농사일을 하면 늘 칭찬해 주고, 공부를 잘해 오면 늘 못마땅한 거야.(웃음) 그래서 참고서를 사 보는 건 꿈도 못 꾸고, 숙제 하는 건 아예 생각도 못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 보따리는 던져 놓고 소꼴을 벤다든가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던 거죠. 제 생활기록부를 보면 늘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게을러서 숙제를 안 해 온다’는 거였어요. 공부는 좀 했으니까요.”

아버지의 유혹을 어떻게 뿌리쳤습니까.
“어린 마음에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걸 벗어나려면 공부를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말하자면 오히려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요. 어릴 때는 그런 아버지가 참 원망스러웠죠.”

지금은 원망하지 않습니까.
“제가 언론계에 있다가 갑자기 출마하게 됐잖습니까.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줄곧 서울에 있었으니 고향에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아버지 때문에 중학교를 대구로 못 나갔잖아요. 그 시절만 해도 계속 공부를 시키려면 중학교부터는 대구로 보냈거든요. 제가 나온 경산중은 이를테면 고향에 눌러앉아 살 아이들만 다니는 데였죠. 그러니 중학교 친구들이 지역에 정착해 내가 내려갔을 때는 다 유지가 돼 있는 거예요. 그들이 초창기에 나를 알리고 선거운동을 하는데 굉장히 큰 힘이 됐어요. 그래서 ‘아, 아버지가 역시 선견지명이 있었구나’ 하고….(웃음)”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유능한 부하가 아니라 그날 운세가 가장 좋은 부하를 선봉에 세웠다고 한다. 황당한 얘기 같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수긍할 만한 구석이 있다. 결과적으로 운이라는 것은 과감한 도전과 그에 따르는 위험을 잘 관리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머리와 몸, 즉 실력과 노력이 극적인 결과로 나타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운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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