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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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황태자’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왕자와 공주. 동화 속에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뉴스에서는 스캔들이나 가십의 소재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잠시 즐겁게 해 주는 일 말고는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뉴스라도 정치 뉴스는 다르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정치”

우리 정치권에 공주와 왕자가 한 명씩 있다. ‘유신공주’ ‘얼음공주’ ‘수첩공주’ 등의 별명을 지닌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황태자’ ‘소통령’으로 불린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다. 물론 이들 별명은 동화적 이미지나 호사가의 입방아 소재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버지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고 국민과 언론은 대통령의 아들딸들을 다 왕자와 공주로 ‘책봉’하지 않았다. 이들은 좀 특별한 점이 있다. 박 전 대표는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한 적이 있고, 김 부소장은 대통령인 아버지의 정치적 조력자로서 국정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젊은 나이에 권력의 엄정한 세계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일은 남들이 겪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공주와 왕자는 같은 당에서 정치를 하지만 그 위상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공주는 이미 정치지도자로 우뚝 서서 대권을 ‘양위’받을 위치에까지 올라 있고, 왕자는 아직 궐 밖에서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의 일차적 목표는 오로지 궐 안에서 활동할 자격증인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일이다.

이번 이야기는 ‘황태자’에 관한 것이다. 김 부소장은 ‘국정을 농단하고 나라를 파탄으로 몬 장본인’이라는 낙인과 함께 조세포탈, 정치자금법 위반 등으로 두 차례 사법 처리됐다. 국회의원 선거에도 두 차례 출마를 시도했으나 여론의 반발과 당의 공천 불허로 중도하차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 진출 의지를 꺾지 않았고, 2008년 10월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돼 처음으로 당의 공식 직함을 갖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최근 정국 상황은 조용히 정치 입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에게 눈길이 가게 만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동교동- 상도동계 간의 화해 움직임, 세종시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화한 한나라당 내 친이-친박계 간 갈등,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세종시법 수정안 국민투표 발언, 6·2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활발한 움직임 등 정국이 비상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득 그가 떠오른 것은 단순한 언어적 연상작용에서 비롯된 것일 뿐인가. 3월 4일 그를 서울시내 개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에 취임할 때 “마포대교를 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말한 게 기억납니다. 1년 반 정도 지나니 어떻습니까.
“여의도연구소는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5월에 설립됐어요. 한나라당 역사보다 더 길죠. 당시 민자당 시절이었는데 설립 과정에서 저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집권당 부설 정책연구소는 세계 정당사에도 유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기대가 컸죠. 개인적으로 관심과 애정이 많아 10년 이상의 공백을 딛고 정치를 다시 시작한다면 여의도연구소에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죠.”

주로 어떤 일을 합니까.
“비상근이기 때문에 월요일 전체회의나 소장단회의,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만 참석합니다. 제가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운영한 경험도 있어서 여론조사에 중점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정책 개발도 하고요. 당 정책위원회가 단기적인 정책을 낸다면 연구소는 중장기적 정책을 개발합니다.”
여론과 정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가장 뜨거운 이슈인 세종시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마침 지난 2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종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세종시법 수정안 지지 및 국민투표 제안 발언을 한 뒤 ‘세종시 정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으니….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준 것이 놀랍습니다.
“아버님이 결정하고 판단해 말씀하신 부분이지만 저로서는 참 미묘한 시점이고 공인 입장에서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원칙이나 신의의 문제라는 관점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선거 공약으로 내건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와 논란이 많자 철회하지 않았습니까. 상당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추진할) 명분에 있어서 틀린 게 아니잖아요. 세종시 문제도 원안대로 끌고 나간다고 해서 이 대통령이 손해 볼 게 없어요. 또 세종시는 박근혜 전 대표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던 만큼 과감히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 전 대통령과 세종시 문제를 갖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뵙습니다. 세종시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얘기를 하죠. 지금은 퇴임한 이후니까 화제가 다양해요. 가족 간의 얘기라든가 비정치적인 부분이 더 많고, 정치 얘기는 현안이 있을 때 주로 합니다.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헌법 제72조(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를 인용하면서 수도를 분할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국가 안위에 대한 정책 문제에 해당된다고 말이죠.”

갑자기 나온 얘기가 아니군요.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계시는 공로명 전 외무장관이 초청해 세종연구소 주최 강연을 하게 됐어요. 세종시 문제로 논란이 많을 때라 아버님께서 그 얘기를 꼭 해야겠다고 하시더군요. 농담 삼아서 ‘세종연구소에서 세종시 문제를 얘기하게 됐다’고….(웃음)”
김 부소장은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환경에서 자랐지만 정치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부터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치고 쌍용증권에 취직해 있던 김 부소장은 아버지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회사를 휴직하고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대선 패배 후 복직이 안 되자 그는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주먹구구식이 아닌 과학적 여론조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돕는 일, 즉 정치에 깊숙이 발을 들인 셈이다.

17, 18대 총선에 출마하려다 실패했잖습니까. 많은 사람이 김 부소장의 정계 진출에 부정적인데….
“저는 사실 정치 입문을 1988년 13대 총선에서 할 뻔했어요. 아버님께서 부산 서구에 출마하면서 저한테 사하구 출마를 권하셨거든요. 아주 강력하고 진지하게 했어요. 아버님께서는 스물다섯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셨지만 그때 제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어요. 저는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고, 너무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고민 끝에 사양했습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아버님이 최종 목표를 이룬 다음에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결과적으로 보면 그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때 받았어야 했어요. 그래서 나갔다면 당선이 됐을 것이고, 중간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6선까지 됐을까요? 국회의장도 노려볼 수 있는 위치가 되지 않았을까….(웃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시운이 맞아야 된다고요. 그 뒤 3당 합당이 되니 정치 수요가 많아졌잖습니까. 제가 들어갈 틈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아버님이 대통령이 되니까 제가 나가는 게 걸림돌이 됐어요. 그 다음 1997년에 그 일이 터진 거죠.”
‘그 일’이란 한보사태를 말한다.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부도나면서 대형 금융 부정이 드러나고 여기에 많은 정·재계 인사가 연루된 사건이다. 김 부소장은 이 일로 검찰 조사는 물론 국회 청문회에까지 출석하고 결국그해 5월 구속됐다.


“이제부터는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고, 과거에 관한 문제가 나올 때는 제가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부터는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고, 과거에 관한 문제가 나올 때는 제가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군요.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거 얘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대선 국면에서 야당이 정략적으로 몰고 간 사건이에요. 지금도 잘 모르는 사람은 제가 한보 비리로 구속된 걸로 알아요. 5개월 동안 검사를 포함한 수사관 100여 명이 저와 제 주변 1000여 명을 샅샅이 조사했어요. 그래서 나온 결과가 뭡니까. 잔뜩 엮어놨지만 대법원에서 다 무죄가 되고 조세 포탈 이것 하나만 남았잖아요. 그 조세 포탈이란 것도 뭡니까. 선거할 때 사조직에서 쓰고 남은 돈을 저한테 맡긴 게 문제가 된 거예요. 이게 전부입니다. 선거자금 가지고 조세 포탈로 걸린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 아마 전무후무할 걸요.”

본인은 결백하고 사법 처리가 억울하다는 얘기입니까.
“제가 그런 식으로 막 항변을 하면 ‘아,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반성 못 하고 있다’고 할 것 아닙니까. 가만히 있으면 ‘아, 죄를 인정하는구나’하고 매도해요.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눈이 펑펑 쏟아질 때는 그냥 맞자, 그치고 난 다음에 쓸자.’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는 것이니까요.”

사법 처리 내용과 별도로 ‘국정을 농단한’과 같은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붙는데, 아직 눈이 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억울하죠. 할 말이 너무 많죠. 지금까지 겪은 온갖 모략이나 근거 없는 이야기들에 대한 것은 무시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이 저한테 큰 멍에가 됐지만 한편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증한 것이니까 홀가분한 느낌도 듭니다. 오히려 저한테는 큰 경험이고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잘못 알려진 것을 계속적으로 언론 같은 데서 단편화시키고 희화화시키고 또 그걸 고정화시켜 말한다는 것은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제부터는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고, 과거에 관한 문제가 나올 때는 제가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좀 전에 질문한 17, 18대 총선 때도 과거의 그런 이미지가 김 부소장의 발목을 잡은 것 아닙니까.
“이미 말했지만 저는 시운이 맞아야 된다고 봐요. 지난번 18대 총선 때는 당헌·당규에 묶여 공천 신청조차 못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죠. 당헌·당규라는 것도 헌법의 하위법인데 사면·복권 제도가 왜 있겠습니까.”

거제에는 자주 갑니까.
“자주는 가지 못합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가는 정도이고, 오는 4월 8일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준공이 있기 때문에 진척 상황을 보기 위해 겸사겸사 가기도 하죠. 내려가면 지인을 많이 만나고 거제 여론도 많이 듣습니다. 이번 지방선거 끝나면 더 자주 내려가게 될 겁니다.”

지난해 11월 김 전 대통령 주재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만찬을 했지 않습니까. 그 뒤에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민주세력 두 기둥의 22년 만의 화해’라고 평가하면서 김 부소장은 목포시장, 김홍업 전 의원은 거제시장에 출마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아 그거, 재미있는 발상이더라고요. 손 교수가 말씀하신 취지는 동서화합이 잘 되어 그런 것도 좀 봤으면 좋겠다는 것 아니겠어요. 아버님께서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가셔서 마지막으로 극적인 화해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동교동 사람들 초대해서 식사도 한 번 했는데 그 답례로 이달에 식사를 모시겠다고 했어요. 날짜를 잡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지역갈등, 세대갈등, 계층갈등, 이념갈등 등 갈등의 연속 아닙니까. 이제 세종시 문제와 더불어 계파갈등까지 들어가 사분오열돼 있는 상황에서 지역화합의 물꼬를 텄다는 데 대해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도 앞으로 앞장설 생각입니다.”
김 부소장은 여의도연구소 외에 고려대 동북아경제경영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도 재임하고 있다. 다른 대학의 초청이 있을 때는 특강에도 나가고 있다. 특별한 주제가 주어지지 않으면 주로 리더십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

리더십 강의를 할 때 주로 어떤 내용으로 합니까.
“국민보다 한 발 앞서가는 지도자보다 반 발 앞서서 국민과 소통하고 대화가 될 수 있는 리더십을 말하죠. 너무 앞서가다 보면 혁명이나 이상만 꿈꾸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뒤지면 당연히 안 되겠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집단지성이라고 인터넷에서 공론화된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여론을 수렴할 때도 있어야겠지만 선도해야 할 때도 있거든요. 이번 세종시 문제를 볼 때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대화와 타협과 소통을 원활하게 할 줄 아는 사람,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얻어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거제에 출마하겠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것이 저로서는 제일 급선무죠. 정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만 목표가 뭐겠습니까. 국민을 편하게 하는 일 아닙니까. 저는 자라면서 봐 왔던 것이 정치이고,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도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김 부소장의 정치적 자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버님이 저한테 정기적으로 교육하듯이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만 그 옆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국정 농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국정 참여의 기회를 가졌다는 게 제가 정치를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박근혜 전 대표도 본의 아니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지금 자리에 올라간 것도 그때의 경험이 상당히 도움이 됐겠죠. 저 같은 경우도 야당 시절부터 대통령 시절까지 권력의 영욕을 다 봤고 제 스스로 한가운데 있었으니까요.”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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