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의 ‘B급 연애’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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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김현진 지음 | 레드박스 | 1만2800원

[이주의 책]음지의 ‘B급 연애’ 풍경들

에세이는 저자를 발가벗기는 장르다. 소설에서 저자는 플롯이나 이야기의 뒤편으로 도망칠 수 있고,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저자는 사건과 사실의 연쇄 속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에세이에서는 그럴 수 없다. 에세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만이 아니라 감성의 속살까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서 에세이는 저자에게는 까다롭지만 독자에게는 더없이 흥미진진한 장르다.

20대 에세이스트로는 단연 돋보이는 필력을 자랑하는 김현진씨가 올해 들어 두 번째 에세이집을 냈다. 지난 5월 펴낸 책이 그 이전 한 해 동안 저자가 지켜본 ‘골치 아픈 시국’에 관한 글들이었다면 이번 책은 “이 시국에 연애는 무슨 연애냐 싶다가 마침내 이 시국이니까 연애지” 싶어서 쓴 글들을 모았다.

지난 1년, 저자는 ‘거리의 에세이스트’였다. 그 기간에 김씨의 동선은 청계광장에서 기륭전자, 강남성모병원과 용산 참사 현장을 거쳐 평택 쌍용차 공장으로 직진했다. 저자는 거리에서 거리로 이동하며 때로는 굶고 때로는 소리치면서 약자에게 더없이 가혹한 세상을 향해 악다구니 쓰듯 펜을 휘둘러왔다. 발랄함과 삐딱함으로 이명박 시대의 모순과 불합리를 까발려온 그 펜은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에서는 까칠하지만 섬약한 한 글쟁이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골방을 향한다. 그 골방 안에서 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무안을 주는 경상도 사람’이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으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사랑 중독자다.

저자는 자신이 “무척이나 구차스러운 사랑, 구질구질한 연애만 했고 그것들이 끝나자마자 곤충이 탈피하듯 얼른 껍질을 벗고 도망쳐버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약간의 취기 없이 시작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연애는 많이 해봤지만 남들 앞에 자랑스레 내놓을 만한 연애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는 저자는 “잘난 남자 잡으라고 사방팔방에서 부담주는 세상 조류에 떠밀려 외로운 당신”에게 약간의 위로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고 말한다.

그런 저자의 눈이 포착한 것은 연인을 두고 다른 연인에게 마음을 내준 동성애 커플, 남의 외모에 오지랖 넓게 참견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온 ‘조금 많이 통통한 여성’,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면서 유독 유부남하고만 사귄 여성처럼 근사한 것과는 거리가 먼 ‘B급 연애’의 풍경들이다. 양지의 사랑이 아니라 음지의 사랑, 낭만도 비극도 아닌 패배와 수치의 사랑이다.

평범한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그 또한 엄연히 현실의 일부다. 책은 극복하는 대신 견뎌내자고 말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CF처럼 매끈하고 어여쁜 연애의 환상에 괴롭다면 그냥 괴로운 만큼 괴로워하고 그저 우리 자학만은 하지 말자”라고 당부한다.

그래서일까, 책 제목은 <컬퍼 퍼플>의 작가 앨리스 워커가 쓴 동명의 시에서 따왔다. 시의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버림받은 자가 되어라/네 삶의 모순을 숄처럼 몸에 두르고/날아오는 돌을 피해라/네 몸을 따뜻하게 하여라….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버림받은 자가 되어라/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 자격이 있는.”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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