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적 중도주의 제안한 사회평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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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지음 | 창비 | 1만7000원

[이주의 책]변혁적 중도주의 제안한 사회평론집

자기 분야에서 쌓은 명성과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향해 발언하고 사회 현실에 개입하는 데 ‘남용’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면 백낙청 서울대 교수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는 진술에 의문부호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43년 전 계간 <창작과비평> 첫 호를 세상에 내보낸 이래 백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 국립대 교수라는 사회적 명망을 십분 활용해 민주화와 분단현실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 왔다.

상상력의 씨실과 논리의 날실로 정교한 언어의 직물을 짜는 현장비평의 영역에서 그가 이룬 성취가 그의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일부의 비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백 교수가 지난 40여 년 동안 분단국가 지식인의 자의식을 끈질기게 유지하면서 보여준 말과 행동의 무게는 그 자체로 우뚝한 성채를 이룬다.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는 1966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서 공적 활동의 시동을 건 이래 쉼없이 담금질해 온 그의 사상적 궤적이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일별할 수 있는 책이다. 백 교수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발표한 글과 강연한 내용으로 책의 몸통을 만들고, 출간에 맞춰 새로 쓴 글을 책 앞머리에 세웠다. 묶인 글들은 시기적으로 3년이라는 시간적 좌표에 산포해 있지만 그 글들을 관통하는 기조는 ‘변혁’과 ‘중도주의’다.

어째서 변혁인가. 변혁의 대상은 1953년 정전 이래 한반도 남쪽과 북쪽의 사회 체제를 규정해온 한반도 분단체제다. 분단체제의 특징은 남북 기득권 세력이 상대에 대한 배타적 미움을 제 이익을 취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삼아 유지되는 ‘적대적 공존’이다. 이 틀을 깨부수지 않고서는 남한 사회의 민주화와 선진화, 북한 사회의 개방과 개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분단체제 극복은 돌출적인 폭력혁명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혁명’이 아니라 ‘변혁’이다. 동시에 적대적 공존의 틀 자체를 ‘발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변화’가 아니라 ‘변혁’이다.

어디가 중도인가. 저자에 따르면 분단체제를 존속시키는 힘은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의 부족이다. 분단현실을 의식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사적 이익을 위해 호도하는 수구세력이나 분단체제의 특성에 대한 성찰 없이 진영 논리에 갇혀 있는 일부 진보세력은 중도가 아니다. 수구세력은 “사익실현의 대가들”일 뿐이고, 일부 진보세력은 “민간통일운동을 친북행위로 몰고 가는 수구세력에 빌미를 제공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 어떤 극단적인 노선도 분단체제가 남북 주민들의 삶에 들씌워놓은 멍에를 벗기고 족쇄를 풀어줄 수 없다는 성찰”을 견지하는 입장이 바로 중도라고 말한다.

변혁적 중도주의를 견인할 주체로 저자가 중시하는 것은 시민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민주주의의 후퇴를 ‘참상’이라고 규정하는 저자는 2008년 ‘촛불시민’들과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행렬에 동참한 시민들이야말로 변혁적 중도주의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미숙했지만 “그 어떤 기존의 친숙한 이념에도 포섭되지” 않은 채 분단체제가 낳은 낡은 정치질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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