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당론 반대 행보로 ‘남는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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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개구리’와 요명판당(要名販黨)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대부분 망명, 저격, 영어(囹圄) 등의 곡절을 겪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유의 사례를 덧붙였다. 그의 죽음을 두고 ‘자진(自盡)’과 ‘서거(逝去)’ 등 다양한 표현이 등장했다. 원래 <예기-곡례> 편에 따르면 죽음은 천자의 붕(崩·태산이 무너짐), 제후의 훙(薨·새가 문득 떼지어 나는 소리), 대부의 졸(卒·생을 마침), 선비의 불록(不祿·녹봉을 받지 못함), 서인의 사(死·숟가락을 놓음) 5개의 등급이 있다. ‘서거’는 작고와 운명(殞命) 등보다 한 단계 높은 말이다. 제후로 있던 조선조의 국왕이 훙어(薨御)와 승하(昇遐) 등으로 표현된 점에 비춰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서거’로 표현한 것은 그리 높인 셈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자진은 무엇을 위한 ‘순(殉)’이었을까. 유서의 내용에 비춰 순국(殉國)보다는 순명(殉名) 내지 순절(殉節)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진을 불사하며 지키고자 했던 명절(名節)은 대략 ‘깨끗한 정부’를 자처했던 참여정부 수장으로서 도덕성이었을 것이다. ‘박연차 리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으로서는 경제난 및 북한 핵 문제와 더불어 또 하나의 도덕적 부담을 떠안은 셈이다.

여러 비리에 얽혀 국정 파행의 1차 책임을 지고 있는 한나라당이 그의 ‘서거’를 두고 공개적인 ‘애도’ 발언 외에 극도로 말을 삼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원희룡 당 쇄신특위 위원장이 “국민장이 치러지는 동안은 정치권의 시계를 멈춰야 한다”고 강력 주문한 게 이를 뒷받침한다. 4·29 재·보선 참패의 여진으로 ‘불편한 동거’가 이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여권 책임론(정치적 타살)’의 후폭풍까지 불어닥칠 경우 이를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듯하다.

보신행보에 능한 ‘영인’ 비판도
당초 원 위원장은 원내대표 합의추대 방안이 무산된 직후 동일한 취지에서 만들어진 당내 쇄신특위를 떠맡아달라는 당 대표의 제의를 주저없이 받아들이는 애당심을 발휘했다. 당내 중재자를 자처한 취임 기자간담회의 발언이 그 증거다.

“거대여당으로서 민심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정부 및 청와대와 소통이 부족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쇄신에는 그 어떤 성역도 있을 수 없다. 조만간 폭넓게 의견을 수렴해 쇄신안을 마련하겠다.”

그러나 ‘친이’와 ‘친박’을 막론하고 당내 반응은 영 시원치 않다. 의원들은 ‘친이’ 측의 대표주자로 나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신임 안상수 대표가 ‘친박’ 측을 의식해 언필칭(言必稱) ‘당내 화합’을 역설한 것과 같은 맥락의 수사(修辭)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의 평소 행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더 큰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성헌 의원의 비판이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소위 ‘남원정’이라는 사람들은 정작 당이 어려울 때는 보신(保身)을 위해 숨어 있다가 때만 되면 ‘장마철 개구리’가 튀어나오듯이 불쑥 나서 저러고 있다. 그런 사람들한테 당 쇄신을 맡겨서 쇄신이 되겠는가.”

‘남원정’은 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으로서 소위 ‘원조 소장파’를 지칭한다. ‘장마철 개구리’의 비유는 좌장 격인 그를 보신 행보에 능한 소위 ‘영인’으로 폄훼한 것이나 다름없다. 원래 ‘영인’은 구변에 능한 능변가(能辯家)를 뜻한다. <논어-헌문> 편에 따르면 공자도 주유천하(周遊天下) 도중 은자(隱者)인 미생무(微生畝)에게 ‘영인’의 의심을 산 일이 있다. 하루는 미생무가 공자의 면전에서 이같이 힐난했다.

“구(丘: 공자의 이름)는 무슨 일로 이처럼 서서자(栖栖者·바쁘게 나돌아 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인가. 이리 하면 이내 ‘영인’의 모습을 보이는 꼴이 아닌가.”
공자가 황급히 변명했다.
“제가 감히 그런 모습을 보이려는 게 아니라 고집스럽게 옹졸한 것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원 의원의 ‘장마철 개구리’에 대한 해명이 없어 헤아리기가 쉽지 않지만 그 역시 공자와 유사한 변명을 하고 싶어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조 소장파’의 좌장 격인 그는 원래 한나라당 내에서 대표적인 진보인사로 꼽히고 있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으로서는 보물과 같은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늘 ‘잡탕정당’인 한나라당 내에서 극우파에 대비되는 급진좌파의 인물로 지목돼 왔다.

2004년 말에 터져나온 한 일간지의 ‘출당(黜黨) 확정’ 운운의 오보 소동이 그 증거다. 이는 한때 수뇌부가 그의 출당을 진지하게 검토한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2007년 초에는 김용갑 의원 등 일부 극우파 의원과 당의 외곽조직인 참정치연대가 합세해 그의 탈당을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보수우파 정당의 정체성을 흔드는 행위는 사실상의 이적행위나 다름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그는 ‘민정당 회귀’ 등의 역공을 가하며 이들의 요구를 일축했다.

그의 이런 행보를 두고 당내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보수 일색의 한나라당을 중도 성향으로 포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양명(揚名)을 위해 당을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2007년의 대선 후보 경선 직후에 나온 다음과 같은 지적은 비판적 시각의 대표적인 예다.

“원 의원은 당론에 반대되는 일로 계속 ‘남는 장사’를 했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아름다운 꼴찌’를 한 것 역시 그랬다.”
이는 그가 최근 쇄신특위를 맡은 것을 두고 ‘장마철 개구리’로 비유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친이’와 ‘친박’을 막론하고 적잖은 의원들이 쇄신특위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쇄신특위에 참여하고 있는 한 소장의원은 이같이 언급했다.

“당·정·청의 엇박자에 대한 전면적인 국정 쇄신이 전제되지 않는 한 쇄신특위는 이벤트에 불과할 뿐이다.”
보수우파 정당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진보노선을 견지하는 한 유사한 비판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자진을 택한 것과 유사한 직행(直行)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정반대의 시각에서는 ‘이벤트 양명(揚名)’의 속보이는 행보로 폄훼할 소지가 큰 것이다.

한나라당 구원투수 역할 전망 엇갈려
역사상 ‘이벤트 양명’의 대표적인 사례로 병자호란 당시 척화(斥和)의 여론을 주도한 김상헌을 들 수 있다.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한 조선의 군신(君臣)은 ‘독안의 쥐‘와 다름없는 신세와 되어 있는데도 시종 ‘척화’의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특히 김상헌은 강화를 주장하는 최명길을 볼 때마다 마치 벌레라도 보듯 꾸짖었다. 하루는 화가 난 최명길이 이같이 대꾸했다.
“대항할 힘도 없는데 화친을 하지 말자는 것은 패망을 재촉하는 것밖에 안 된다. 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감히 강화를 성사시키고자 한다.”

이 소식을 접한 척화파는 연일 상소를 올려 최명길의 목을 베고 김상헌을 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미지급(焦眉之急)의 현실을 무시한 채 명분에 함몰된 결과였다. 이 사이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그럼에도 김상헌은 최명길이 인조의 명을 받아 작성한 항복문서를 갈가리 찢으며 이같이 비난했다.

“어찌 오랑캐에게 ‘신’을 칭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이조참판 정온이 상소를 올려 최명길을 ‘매국노’로 단죄할 것을 강력 요구하며 자진하자 그 또한 이내 목을 매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과 조카 등 여러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 이를 시도했다. 이로 인해 거센 비판이 일었다. 게다가 그는 인조가 삼전도로 투항하러 출성(出城)하는 날, 몰래 성을 나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의사(義士)를 자처했다. 그의 이런 모순된 행보로 인해 인조도 크게 실망했다. 삼전도의 굴욕 후 1년여가 지난 인조 16년(1638) 7월에 장령 박계영 등이 그를 강력 성토하고 나섰다.

“김상헌은 정온처럼 칼로 할복하지 못했다면 시종 화복(禍福)을 전하와 함께해야 하는데도 몰래 성을 빠져나와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런데도 편안한 곳에서 쉬며 ‘몸을 깨끗이 해 절의를 지키고, 오랑캐에게 몸을 숙인 오군(汚君)을 섬기지 않는다’며 이론(異論)을 고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요명판군(要名販君: 자신의 명절을 구하느라 군주를 팔아먹음)과 수당오국(樹黨誤國: 현실과 동떨어진 척화파를 이끌며 나라를 그르침)을 엄벌해야 합니다.”

훗날 세도정치를 연 안동 김씨는 그의 직계 후손들이다.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시종 비현실적인 ‘북벌’을 주장하며 극단적인 명분론에 함몰된 결과였다. 원 의원은 스스로 ‘요명판당(要名販黨)’으로 폄훼 당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행보를 할 필요가 있다. 세계경제포럼에서 선정하는 ‘차세대 리더’로 뽑힌 바 있는 그는 도남(圖南)을 위해 내년의 ‘경성대전’에 도전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선에 앞서 당내의 여러 우려를 씻어주는 것이 선결 과제다.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 |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기자,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대·외국어대·국민대 강사, <자치통감-삼국지> <국어>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초한지> 등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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