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명분 위해 ‘낮은 자세’로 백의종군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거강위유(去剛爲柔)와 경성대전(京城大戰)

[신동준의 인물 비평]손학규, 명분 위해 ‘낮은 자세’로 백의종군

여야 모두 4·29재·보선에서 ‘총력전’을 폈음에도 한나라당은 출전장수가 전원 몰사하는 참패를 당했고 민주당은 반장(叛將)에게 텃밭을 잃는 타격을 입었다. 여야 지도부의 위기 리더십 부재를 질타하는 민심의 경보음이 아닐 수 없다. 한나라당의 참패는 기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파행적인 국정 운영에서 비롯한 것이다. 재·보선 직후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이 국정을 잘못 이끌고 있다는 견해가 70%를 상회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지지율도 2개월여 만에 다시 20%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민주당 역시 수도권 민심의 ‘MB정권 심판’ 운운하며 희희(嬉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호남의 몰패는 말할 것도 없고 최대 격전지였던 부평 을의 승리 역시 ‘깽판국회’를 공연(共演)한 민주당을 수권정당으로 인정한 결과라기보다 반사이익으로 보는 게 옳다. 박근혜 전 대표와 ‘만사형통’의 대리전 양상으로 치른 경주의 투표율이 총선 때보다 높은 54%를 기록한 데 반해 전국적 관심을 불러 모은 부평 을의 투표율은 평균보다 10%나 낮은 최하위에 머문 게 그 증거다. ‘말없는 다수’가 투표장행을 거부한 상황에서 ‘수도권 정당으로 도약’을 언급하며 잔칫집 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망자존대(妄自尊大)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재·보선 긴급지원 요청 흔쾌히 승낙
그런 점에서 부평 을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한 손학규 민주당 고문의 ‘낮은 자세’ 행보는 세인의 이목을 끌 만하다. 그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긴급지원 요청에 “소리나지 않게 낮은 곳에서 돕겠다”며 쾌히 승낙했다. 아홉 달에 걸친 칩거를 깨고 지원유세에 나선 그는 일체의 직함을 마다한 채 ‘손일병’을 자처하며 시장과 거리를 부지런히 누볐다. 특유의 친화력을 무기로 서민들의 소중한 한 표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비결은 ‘낮은 자세’의 행보였다. 그의 지원유세 골자는 간단했다.

“50년 전통의 정통야당이 제대로 일어서야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
당 주변에서 벌써 오는 10월 재·보선에서 수도권에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수도권 승리에 기여한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원래 ‘낮은 자세’ 행보는 위정자의 기본 덕목이기도 하다. 일찍이 노자는 <도덕경> 42장에서 이같이 갈파한 바 있다.

“사람들은 고(孤)·과(寡)·불곡(不穀:不善)을 꺼리나 제왕은 이를 자신의 칭호로 삼는다. 사물은 덜어내고자 하면 오히려 더해지고, 더하고자 하면 오히려 덜어진다. 사람들은 거유위강(去柔爲剛·부드러움을 버리고 굳세게 됨)을 말하나 나는 거강위유(去剛爲柔)를 말하고자 한다.”

그의 이번 행보에 비춰볼 때 아홉 달에 걸친 칩거는 노자가 말한 ‘거강위유’을 체득하는 내수(內修)의 계기로 작용한 듯하다. ‘거유위강’의 요체는 ‘화광동진(和光同塵·번쩍거림을 부드럽게 해 세속에 뒤섞임)’의 ‘낮은 자세’에 있다. 노자는 <도덕경> 56장에서 이같이 풀이해놓았다.

“지자(知者)는 도를 말하지 않고, 언자(言者)는 도를 알지 못한다. ‘화광동진’을 일컬어 ‘현동(玄同·현묘한 하늘과 동화됨)’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순자-대략> 편에서 ‘다언무법(多言無法·말만 많고 법도에 맞지 않음)은 소인, 소언이법(少言而法·말을 적게 하나 법도에 맞음)은 군자’라고 해석해놓았다. 그는 유세 기간 동안 정동영 의원의 ‘항명(抗命)’과 대비되는 ‘순명(順命)’ 행보로 인해 복귀 시점을 묻는 질문공세에 시달린 바 있다. 그는 그때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역할을 할 준비가 됐을 때 복귀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소언이법’의 취지에 부합하는 행보다. 부평 을 승리가 확정된 당일, 춘천의 우거(寓居)로 직행하면서 내놓은 고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선거는 MB정부에 대한 준엄한 경고인 동시에 어려운 시기에 야당이 단합해야 한다는 명령에 해당한다.”
심기일전의 각오로 대대적인 쇄신을 해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취지를 밝힌 셈이다. 사실 민주당 역시 한나라당 못지않은 위기 국면에 처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DJ의 ‘민주당 중심 단결’ 주문에도 불구하고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출전한 정 의원이 반기(叛起)의 위세를 떨치기 위해 이웃 지역의 후보까지 당선시킨 것은 민주당의 앞날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나 다름없다. 정 의원은 민주당을 열린우리당의 복제판으로 낙인찍은 후 “전주의 안방을 친노(親盧) 386세력에게 내줄 수 없다”는 호소로 압승을 이끌어냈다. 이는 내년 4월의 지방선거를 전후해 민주당의 기반인 호남권 전체가 요동칠 가능성을 예고한 것이다. ‘복당’을 명분 축적용으로 해석하면서 복당 무산이 확정되는 시점을 계기로 참여정부의 색채를 완전히 탈색한 새로운 야당이 태동할 공산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재 손 고문은 정세균 대표, 정동영 의원과 더불어 민주당을 지탱하는 ‘빅3’로 불린다. 그의 복귀 시점 및 향후 행보는 이들의 길항(拮抗)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정 대표는 DJ에게 차기 호남맹주를 승낙받기 위해 자신의 지역구까지 내놓는 승부수를 띄운 덕에 일단 명분은 건졌다. 고심 끝에 내린 출사표가 ‘골목대장의 반기’로 폄하되는 악조건 속에서 압승을 일군 정 의원은 일단 실리는 챙겼으나 향후 DJ라는 거대한 산과 맞닥뜨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확고한 지반 없는 치명적 약점
손 고문은 10월 재·보선 출마의 명분과 당내 입지 구축이라는 실리를 동시에 챙긴 경우에 속하나 득실 면에서 볼 때 정 의원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붕(大鵬)의 꿈을 키우면서 지반이 없는 것은 치명적이다. 3공화국 이래 영·호남의 지반을 가진 사람만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게 그 증거다. 40년 가까이 호남을 ‘낭중취물(囊中取物)’ 다루듯 주무르고 있는 DJ를 대신할 수 있는 호남의 총아(寵兒)로 발돋움한 정 의원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안방’의 돌풍이 불 경우 TK 아성을 거듭 확인한 한나라당 박 전 대표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손학규 민주당 고문이 4월 19일 인천 부평 을 청전동 도깨비시장 지원 유세 도중 정세균 대표를 만난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손학규 민주당 고문이 4월 19일 인천 부평 을 청전동 도깨비시장 지원 유세 도중 정세균 대표를 만난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현재 호남을 둘러싼 ‘빅3’와 DJ의 상호관계는 삼국시대 초기에 조조 와 유비, 여포, 원소 등이 하북(河北)의 패권을 놓고 다툰 정황과 사뭇 닮아 있다. 호남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른 정 의원은 대략 조조에 비유할 수 있다. 당초 조조는 여포를 끌어들인 장막의 배신으로 인해 자신의 기반인 연주를 빼앗기는 위기 국면을 맞은 바 있다. DJ의 대리인 격인 정세균 대표가 친노 386세력을 앞세워 그를 공천에서 배제한 것과 닮아 있다. 조조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유비의 서주를 깨뜨린 뒤 여포를 치고자 했으나 근거지를 탈환한 뒤 후일을 도모할 것을 권한 순욱의 계책을 받아들여 이내 연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는 정 의원이 ‘필마단창’의 반란을 일으켜 ‘전주 안방’을 확인한 것에 비견할 만하다. 장차 ‘호남 안방’으로 영지를 넓힐 경우 이는 조조가 백마대전(白馬大戰)에서 원소를 깨고 새로운 하북의 패자로 등장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내년 ‘호남대전’은 DJ는 물론 정 대표와 정 의원의 진퇴를 결정짓는 분수령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내년 ‘경성대전’ 도전해볼만
문제는 손 고문의 경우다. 한나라당 탈당 후 386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경선 과정에서 정 의원과 격돌한 바 있는 그는 현재 아무런 지반도 없다. 총선 패배 후 지속되는 그의 칩거 행보는 원소 및 여포 등의 지원을 철석같이 믿었던 유비가 확고한 지반을 다진 조조와 다투다가 참패한 후 사방을 떠도는 유랑객 신세로 전락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확고한 지반이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원래 수도권 지역은 영·호남 등과 달리 근거지로 삼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한때 그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친노 386세력은 우군으로 삼을 수 있는 세력도 아니다.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계기로 참여정부의 최후보루인 도덕성마저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이들의 지지를 근거로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지나지 않는다. 참여정부 패망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 단 이들이 18대 국회에 등원한 후 정 대표를 간판으로 내세운 것은 동탁을 척살한 여포가 유비를 몰아내고 서주를 차지한 것과 닮아 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그의 탈당 이후 행보를 두고 친노세력의 ‘불쏘시개’로 이용되었다고 혹평한다. 그는 비록 이번 선거에서 일정한 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처해 있는 상황만큼은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얹혀살며 ‘비육지탄(肥肉之嘆)’을 토해내는 정황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아무런 지반이 없다는 점에서 유비와 상통하고 있는 그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을 계기로 유비가 삼국 정립(鼎立)의 계기를 마련한 사실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당시 아무것도 없던 유비가 이에 성공한 것은 ‘한실(漢室) 부흥’이라는 명분을 틀어쥔 후 형주를 발판으로 익주를 점거하는 실리를 챙긴 데 있다. 그 역시 이번 선거를 통해 일단 명분을 얻는 데 성공한 만큼 더 확고한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행보를 지속하는 동시에 실리를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무일푼의 유비가 적벽대전을 계기로 손권의 끈질긴 반환 요구에도 불구하고 형주를 점거한 채 익주를 노린 전례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오는 10월 재·보선에 출마해 등원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자칫 대권 가도에 부메랑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 대표가 내년의 호남대전에서 패할 경우 친노 386세력이 또다시 그를 간판으로 내세워 잔명을 꾀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호남을 상실한 채 유두분면(流頭粉面)으로 치장한 386세력에 업히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대붕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 바로 경성대전(京城大戰)에 직접 뛰어드는 일이다. 내년의 경성대전은 성격 상 적벽대전에 비유할 만하다. 경성대전 참전만이 아무런 지반이 없는 그가 친노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가운데 호남의 총아로 부상한 정 의원은 물론 TK를 아성으로 보유하고 있는 박 의원 등과 진검승부를 벌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여의도와 별반 인연이 없던 이 대통령이 ‘경성부윤’ 역임을 배경으로 도남(圖南)에 성공한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 |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기자,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대·외국어대·국민대 강사, <자치통감-삼국지> <국어>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초한지> 등의 저·역서가 있다.

신동준의 인물 비평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