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문학교를 가다](11)영국 톤브리지 스쿨

‘하우스 시스템’ 통해 감성교육 중시
“최고의 학생을 원하지만 ‘속물 엘리트’는 필요 없다” 문화와 전통에 자부심

런던에서 30분도 채 안 되는 켄트에 자리 잡은 톤브리지스쿨은 150에이크(약 62만7000㎡)에 달하는 캠퍼스 규모를 자랑한다.

영국은 전통과 현대를 잘 버무려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데 영악하다. 런던 중심부의 워털루역은 해저터널로 유럽대륙과 연결돼 고속철도인 ‘유로스타’가 출발하는 곳이다. 워털루역 인근 템즈 강변에는 ‘런던 아이(London Eye)’라는 세계 최대의 회전 관람차가 있다. 매년 3500만 명이 이용할 정도로 런던의 명물이자 상징물이다. 한 번 타는 데 13.50파운드(약 2만6000원)로 비싸다. 내셔널 갤러리나 대영박물관 등을 무료로 둘러본 관광객들은 ‘런던아이’에 와서는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무료로 대영박물관을 봤다는 일종의 ‘미안함’과 함께…. 관광장사는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옥스브리지’ 진학률 최고 상위

톤브리지 스쿨에 재학 중인 정승우군(왼쪽)과 오종민군.

영국의 명문 보딩스쿨도 전통을 잘 보존해 영국 내에서뿐 아니라 세계의 명품으로 통하면서 전 세계 학부모를 대상으로 교육장사를 하며 돈벌이를 하고 있다. 영국은 제조업이 죽어 금융서비스업과 교육산업이 먹여살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명문 보딩스쿨은 한 해 등록금(기숙사비 포함)만 6000만 원에 이른다. 학교당 웬만한 중소기업의 한 해 매출을 능가한다. 이런 학교가 영국 전국에 산재해 있고 아시아권 조기유학생들이 2, 3년 대기해야 들어갈 수 있다. 이른바 ‘배짱영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 켄트에 있는 톤브리지 스쿨(Tonbridge School)은 1553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학교다. 캠퍼스에는 오랜 전통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때마침 만추에 찾은 교정의 건물들은 담쟁이넝쿨로 화려한 전통미를 뽐내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담쟁이넝쿨의 조화는 톤브리지의 명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톤브리지 스쿨은 남학교로 13~18세가 다니는 중·고교에 해당한다. 전체 학생은 750명의 소수 정예로 이중 60% 정도인 450명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반면 학교 전체 면적은 150에이커(62만5000㎡)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규모로, 학교가 마치 거대한 공원 내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캠퍼스 곳곳에 12개의 하우스(기숙사)가 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심신을 단련하며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 영국은 공교육이 붕괴됐다며 아우성이지만 유명 사립학교만큼은 무풍지대나 다름없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전통과 호흡하며 최고의 인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캠퍼스에 충만하다.

이 학교 홍보 디렉터인 레이첼 호지슨씨는 톤브리지 스쿨을 자랑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서슴없이 “영국에서 가장 환상적인 아카데믹 스쿨로 ‘톱 중의 톱’에 드는 학교”라며 “우선 명문대 합격자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쿠리어(Courier)신문에 난 기사를 들어보였다. 영국 명문대를 상징하는 이른바 ‘옥스브리지(Oxbridge)’에 최근 5년 동안 졸업생의 21.9%가 진학했다는 보도였다. 이는 영국 전체 고등학교에서 최고 상위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한다. 옥스브리지는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의 합성어다. 톤브리지 스쿨은 옥스브리지에 지난해 37명이 합격한 데 이어 2007년에는 23명이 들어갔다.

수업 이외 생활은 하우스 중심으로

450년 전통의 학급답게 학교 건물마다 전통과 권위를 상징하는 담쟁이넝쿨이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호지슨씨는 “특히 영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에이레벨(A-level) 시험에서 올해 73.3%가 A등급(전체 6등급으로 구분)을 받는 등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우수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B등급까지 합치면 전체 졸업학생 94.5%에 이른다며 학교 자랑이 끝이 없었다. 등록금이 너무 비싼 게 아니냐는 기자 질문에 “비싼 만큼 학생들에게 좋은 성적으로 되돌려준다”고 말했다.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이유를 묻자 호지슨씨는 “학교의 리더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통해 감성지능을 배양하는 인성교육에 비결이 있다”고 말했다. 교사와 학생 비율이 1 대 8 정도여서 학생을 항상 관심 있게 지도할 수 있다고 한다. 인성교육은 독특한 ‘하우스 시스템(House system)’을 통해 이루어지는 점이 특색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이든 집에서 통학하는 학생이든 전체 학생이 12개 하우스에 소속돼 있다. 재학생의 60%만 7개 보딩하우스에서 생활하지만 나머지 학생들도 수업 이외의 학교생활은 ‘하우스’를 중심으로 한다. 각 하우스마다 하우스 마스터와 튜터들이 학생들의 감성교육을 담당한다. 튜터들은 학생들의 방과후 활동과 종교활동 등을 케어(care)하면서 부모들이 해주지 못하는 인성과 감성교육을 하는 것이다. 교실 수업이 지식교육이라면 하우스 수업은 인성교육인 셈이다.

이 학교에 다니는 정승우군(1학년)은 우리나라의 중1에 해당한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유학온 정군은 지난해 9월부터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정군은 “하우스마다 다른 문화가 있다”면서 “학생들은 자신이 소속한 하우스의 전통과 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페스티벌과 아트, 스포츠 등을 통해 서로 경쟁한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학생들은 식당이 아닌 각자 자신이 소속한 하우스에서 따로 먹는다. 식사시간도 일종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며 개성 있는 식사문화와 감성교육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우스마다 요리사를 별도로 두고 있다. 이곳 학생들은 영국 이외에도 20개 국에서 유학을 왔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이들 학생의 음식문화에 맞춘 요리로 향수를 달래주기도 한다. ‘전통 중시’ 못지않게 학생들의 ‘개성 중시’가 톤브리지 스쿨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립 보딩스쿨의 경우 학생들은 식당에서 전체 학생이 함께 식사한다. 이 경우 개별적인 ‘하우스 문화’라는 게 없다. 톤브리지 스쿨에는 하우스당 하우스 마스터가 있고 그 밑에 3명의 튜터가 있다. 하우스 마스터와 튜터들은 일종의 하우스 문화의 사령관인 셈이다. 하우스 마스터는 대부분 이 학교 교사 출신으로 선발하는데, 이는 학교와 하우스 문화를 잘 알아야 전통의 창조적 잇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홍보 디렉터인 호지슨씨의 남편은 현재 하우스 마스터로 재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통 중시’ 못지않은 ‘개성 중시’

톤브리지 스쿨은 400년 이상 전통을 지닌 학교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캠퍼스로 유명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정군의 하루는 하우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물론 공부는 교실에서 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하우스를 중심으로 한다. 운동은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운동 역시 하우스별로 시합하는데 경쟁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대학 진학 때 하우스 마스터가 추천서를 써주는데, 스포츠 활동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스포츠를 통해 리더십을 키우고 인성을 다듬게 되기 때문이다. 명문 사립학교끼리 대항경기를 하고 학생들은 종목마다 최고선수들이 소속한 팀에 들기 위해 졸업할 때까지 노력한다. 실력이 좋지 않은 선수들이 소속된 하위 팀에 들어가면 불명예스러울 뿐 아니라 대학 진학 때 하우스 마스터의 추천서에도 결코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도 스포츠만큼 중시한다. 톤브리지 학생들은 60% 이상이 악기를 다룰 줄 안다. 이 학교 오종민군(3학년)은 더블베이스 실력이 수준급이다. 럭비와 하키도 최고선수들이 소속된 A팀에 속해 있다. C팀에 있으면 ‘노력 부족’의 불명예가 따른다.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하기 전에 A팀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종민군이 A팀에 들어간 것은 그만큼 럭비에 구슬땀을 쏟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우군도 럭비를 하는데 1학년이어서 초보팀에 소속돼 있다.

톤브리지 스쿨은 럭비, 하키, 크리켓 가운데 한 종목을 선택해 반드시 선수로 뛴다. 모든 학생이 선수라고 할 수 있다. 교내에서는 ‘하우스 매치’가 열리고 교외에서는 ‘스쿨 매치’를 벌이면서 경기력을 향상시킨다.

톤브리지 스쿨은 “최고의 학생을 원하지만 결코 ‘속물(snob)’의 엘리트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교육에서도 자부심을 중시한다. 그래서 이튼 칼리지(재학생 1300명)보다 규모가 작지만 명문대 진학률 등에서 뒤지지 않는다고 호지슨씨는 강조한다. 졸업생들은 변호사나 저널리스트, 비즈니스 등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다른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10일 주기로 여는 강연회가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호지슨씨는 학생들에게 공부 이외에도 직업 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초청 특강을 개최한다고 설명했다.

400년 가까운 전통과 ‘최고’라는 자부심을 깃들게 하는 교육, 여기에 현대의 시대정신과 호흡하려는 학교와 학생의 노력이 합쳐져 영국 최고의 명문학교, 세계적인 명문학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사립명문은 스포츠를 인격수양 장으로 활용

영국 사립학교에서 스포츠는 필수과목이다. 경쟁을 통해 관용의 정신과 남성성을 배우는 장으로 큰 역활을 하고 있다.

영국의 사립학교는 영국의 새로운 ‘남성성’을 만들어낸 곳이다. 사립학교는 그 전통이 600년을 이어오면서 다른 국가에 비해 권력과 지식인, 법조계, 군대 등 정치·경제·사회의 엘리트를 공급해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1440년에 설립된 이튼 칼리지는 영국 파워 엘리트의 산실이 됐다.

지금은 영국 사립학교들이 엄격한 규율과 엘리트 교육으로 세계적인 명문학교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1800년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사춘기인 청소년들이 집단으로 생활하는 기숙사에서는 여기저기 수음이나 동성애 등 외설적인 행위나 학생 폭력으로 큰 곤욕을 겪었다. 1818년 윈체스터 스쿨에서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난동으로 군대를 투입해야 할 정도였고 유명한 시인 바이런은 학교 반란을 주동하기도 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파멸적인 상황을 거치면서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사립학교의 무질서와 비도덕적인 모습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획기적인 개혁이 시작됐다. 그중 하나가 축구와 럭비 같은 단체경기를 통해 인격을 수양하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교육방식은 운동경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규율과 절제를 심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세기 초까지도 영국의 지배층은 축구를 백정의 자녀들이나 하는 운동으로 비하하고 조정 경기도 금지할 정도였다.

1850년대 들어 영국 사립학교에서 스포츠가 하나의 체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크리켓 구장을 건립하고 조정경기를 재개했다. 이튼칼리지도 19세기 말에 스포츠를 받아들였다. “하루에 한 번, 그리고 공휴일에 두 번 축구 경기를 하지 않은 학생은 벌금을 물어야 하고 매를 맞는다”는 공문이 학교 게시판에 나붙기도 했다. 1910년대에 이튼에 다닌, ‘1984년’의 작가 조지 오웰은 일주일에 사흘은 오후에 단체경기를 했다고 증언했다.

스포츠는 학생의 폭력적 성향을 잠재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음이나 동성애 등의 퇴폐를 방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도입했다. 20세기 초까지 학생들의 자위행위를 금지하기 위해 육체적으로 완전히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게 해야 한다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스포츠는 더욱 각광받았다.

지금은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를 비롯해 대부분 학교에서 스포츠를 인성교육의 한 축으로 활용한다. 스포츠를 하면서 단결력과 절제력, 협동심을 키우고 이기심을 억누를 수 있으며, 거친 육체적인 운동을 하면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고 이기심을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포츠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단체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특히 제국주의 영국에서 국가적으로 요구하는 덕목이 다름 아닌 제국주의적인 남성성이었다. 남성성은 단체경기를 통해 함양되는데 그중 하나가 크리켓과 축구였다. 크리켓 같은 단체경기는 남자다움의 훈련으로 간주해 기사들의 전투에 비유됐다. 이들 스포츠는 강력한 집단적 충성심을 유발하고 자율적인 개인이라는 개념은 허용하지 않았다. 지금도 영국에서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이러한 남성성을 함양해온 영국 사립학교 교육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

스포츠를 통해 남성성을 함양하게 했지만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여전히 폭력과 야만성이 난무했다. 1870년대에 사립학교를 다닌 ‘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은 사립학교에 다닌 시기를 일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라고 회고했다.

영국의 보딩스쿨이 스포츠를 강화한 데는 이와 같은 말 못할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스포츠는 영국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명문 보딩스쿨에서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영국 사립학교의 시행착오 덕분일 것이다. 이제 세계적인 명문 보딩스쿨은 스포츠를 인격수양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스포츠를 통해 그 어떤 책에서도 얻을 수 없는 덕목을 배우고 받아들인다. 스포츠는 전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심뿐 아니라 침착함, 자기극복, 공정함,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유감 없이 함께 축하할 수 있는 아량과 관용 등을 가르친다는 것이다(박지향,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문화로 읽는 영국인의 자화상’ 참고).

세계의 명문학교를 가다

기자가 세계 명문학교를 취재하면서 느낀 세계의 명문학교나 학생들과 한국의 명문학교나 학생들의 다른 점은 다름 아닌 ‘스포츠 중시’ 였다.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 차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영국처럼 제국주의 시대의 교육관이 남아 스포츠를 제국주의적 남성성을 키우는 장으로 활용했을지라도, 또 사립 보딩스쿨의 문란한 규율과 폭력성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했을지라도 현재 스포츠가 청소년들에게 주는 교육적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인성교육이 실종된 한국에서는 체육시간을 영어나 수학 자습시간으로 대체한다. 중3이나 고3 시기에는 체육시간이 없다. 그 시간에 학생들은 자신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이기적인 공부’에 열중한다.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은 옆자리 학생들의 면학을 방해하면서 ‘못된 행동’을 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스포츠를 매학기 필수과목으로 중시하는 세계의 명문학교는 스포츠가 인성교육의 핵심 과목이 되고 있다. 이제 한국도 인성교육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만 낼 것이 아니라 학교 체육시간을 적극적으로 부활해야 한다. 이제 스포츠는 19세기 영국에서처럼 학생의 폭력성을 막는 예방적 차원이나 국가적 충성심을 함양하는 국가주의적 차원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스포츠를 학교에서 부활하느냐 여부가 한국 인성교육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거창한 교육개혁보다 학교 스포츠를 매학기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초·중·고교에서 필수과목으로 만드는 것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켄트(영국)ㅣ최효찬〈객원기자·자녀경영연구소장〉 romai@naver.com